최고의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해도 모자를 정도로 최고였다, 마지막에 895명의 이름이 나올 때 소름이 돋았다, KBS만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공영방송의 가치가 느껴졌다…. KBS 탐사보도부의 ‘밀정 2부작’에 쏟아진 누리꾼 찬사다.

밀정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의 정보를 일본에 밀고하거나 독립운동 내부의 분열을 유도했다. 이런 인물 895명을 KBS는 지난해 8월 공개했다. 그중에는 건국훈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분류된 인물도 있었다.

취재는 2018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재석 기자가 경기 고양시의 카페에서 취재원과 대화하다가 일본 외무성 자료에서 우연찮게 ‘밀정’ 관련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촉을 언어로 명료하게 설명하기는 힘듭니다만, 요즘 말로 하면 느낌적 느낌이랄까요. 밀정에 관한 자료들을 끌어 모은다면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 KBS 탐사보도부원들이 수상 직후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 두 번째부터 이재석 이세중 권순두 기자)

KBS는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단’을 2018년 만들었다. 사원을 대상으로 기념사업, 콘서트, 방송 아이템을 공모했는데 ‘밀정 2부작’이 선정됐다.

구상부터 방송까지 1년이 걸렸다. 처음부터 한국인 밀정 혐의자를 알고 시작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일본 고문서를 확보해서 번역하고 취재했으나 소득이 없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세중 기자는 “하루, 이틀, 몇 주씩 지나는데도 이렇다 할 리스트를 확보하지 못했을 때 가장 막막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초반에 취재했던 내용의 대부분을 방송에 담지 못했다.

취재팀은 자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일본의 외무성, 방위성, 국회도서관과 중국의 공문서에 흩어진 정보를 뒤졌다. 그렇게 모은 문서 5만 장을 번역해서 한국인 밀정 혐의자 895명을 특정했다.

강형철 숙명여대 교수는 “학술연구를 통해 이미 밝혀진 바를 기사화 또는 영상화하지 않고 기자들이 1차 자료를 직접 발굴, 분석해 역사 교과서에도 실릴만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하다”고 말했다.

이재석 기자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공영방송의 정체성이 밑바탕이 돼 방송 스케일을 키울 수 있었다”며 “덕분에 평소 제작하는 시사 다큐멘터리에 비해 비교적 많은 예산과 인력을 배정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역사다큐멘터리가 지루하다는 이미지를 깨고 싶었다. 20대와 30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재미와 몰입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촬영기자에게는 감각적인 느낌의 영상을, 편집감독에게는 역동성과 속도감이 느껴지는 편집을 부탁했다.

영상에 많이 나올 일본 기밀문서를 어떻게 보여줄지도 신경 썼다. 기존 다큐멘터리와 차별화된 CG를 위해 방송 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그래픽디자인 업체와 접촉했다. 음악감독에는 예능프로그램을 주로 맡았던 인력을 섭외하고 영화 OST도 활용했다.

“전문가를 제외하면 10여 명의 팀원 가운데 저만 유일하게 40대고 나머지는 20~30대였습니다. 저는 취재초기부터 젊은 감각으로 만들어 보자고 강조했습니다.”

이세중 기자는 “화려한 넷플릭스 영화, 드라마에 익숙해 눈높이가 한껏 올라간 시청자 수준을 되도록 맞추고 싶었다”며 “20대와 30대가 봤을 때 채널을 돌리지 않을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첫 편(배신의 기록)은 KBS가 입수한 밀정 895명의 이름을 열거하며 끝난다.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역사를 직시한다는 것은, 과거의 빛과 그늘을 모두 다 들여다보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믿고 있다.”

▲ 방송에 나온 밀정 혐의자 목록

독립운동가 곽윤수 선생의 후손에게 가족 중 밀정의 지시를 받은 사람이 있었음을 알리는 데에는 고민이 필요했다. 전화보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상하이행 비행기에 오른 이유다.

집을 임시정부에 빌려준 곽 선생의 업적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곽 선생의 처남이 밀정의 지시를 받은 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가족의 책임이 아니라 비극적인 독립운동 역사의 단면임을 강조했다.

이세중 기자는 “한편으로는 안타깝지만 후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후손들은 처음에 놀랐지만 이내 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취재진의 의도를 이해하고 역사의 빛과 그늘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밀정 2부작’에 출연한 박환 수원대 교수(사학과)는 입체적 접근이 부족했던 점은 아쉬웠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의 동지인 우덕순은 밀정이라기보다는 변절자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시청자에게 지나친 선입관을 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건국훈장을 받은 밀정에 대한 서훈 취소요구가 잇따랐다. 취재진은 참고인으로 출석해 서훈작업의 부실함을 지적했다.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은 “사유가 밝혀지면 당연히 취소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며 전면적인 재심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밀정 2부작’은 지난해 10월 임종국상의 사회·언론 부문을 수상했다. 만해언론상 대상, 한국방송기자클럽의 올해의 방송기자상 대상, 민언련이 선정한 올해의 좋은 보도상도 받았다.

가장 정확한 지점까지 근접해 들어가려는 노력. 이재석 기자가 지키려는 마음가짐이다. 이세중 기자는 단독 욕심에 매몰되기보다는 보편적인 시민이 봤을 때 공감할 수 있는 기사를 쓰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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