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1호선 용산역 1번 출구 밖에는 고층건물이 많다.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려 10분가량 걸으면 풍경이 달라진다. 건물이 낮아지고 역 주변과 달리 밝은 조명을 보기 힘들다.

낮아진 건물 끝에 기찻길이 있다. 경의중앙선과 경춘선 화물열차가 통과하는 용산구 한강로동 백빈 건널목이다. 열차가 지날 때마다 종이 울려 땡땡거리로 불린다. 기찻길을 건너기 전에 불이 켜진 가게가 보였다. 35년째 같은 자리를 지킨 용산방앗간이다.

주인 박장운 씨(62)의 하루는 새벽 4시 전후에 시작된다. 가게 앞의 먼지를 쓸어내고 화이트보드에 적힌 예약주문을 확인한다. 시루떡, 가래떡, 영양떡…. 여러번 확인하고 쌀을 빻는 기계에 쌀을 쏟아 붓는다. 새벽 6시에 나갈 시루떡 3판이 가장 급하다.

▲ 박장운 씨는 일하기 전에 방앗간 앞을 청소한다.

쌀을 빻을 때는 소금 간이 필요하다. 물에 불린 쌀을 빻다 보면 미처 빠지지 못한 물기가 쌀가루와 뭉쳐서 떨어진다. 이 덩어리를 제때 빼야 한다. 쌀가루에 섞이면 떡이 잘 익지 않기 때문이다.

설익은 떡은 맛이 없다. 뜸 들이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떡은 네모난 찜기에서 찐다. 바닥 중앙에 뻥 뚫린 공간에서 뜨거운 증기가 올라와 떡을 익힌다. 찜기 바닥에 고운 망을 깔고 떡을 만든다.

빻아놓은 팥을 바닥에 깔고 쌀가루를 너무 얇지도 두툼하지도 않게 편다. 쌀가루가 익을 때까지 약 15초간 기다린다. 쌀가루가 익으면 하얀 가루가 반투명해지면서 숨이 죽는다. 그런 다음 말린 호박과 콩 등 부재료를 골고루 뿌리고 쌀가루로 다시 덮는다.

새로 깐 쌀가루가 익을 때까지 다시 15초를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팥을 한 번 더 뿌린다. 익었는지 젓가락으로 한 번 콕 찔러본다. 잘 익었으면 바닥에서 올라오는 증기를 끄고 뜸을 들인다. 시루떡이 나오는 과정이다.

잘 모르는 사람은 떡을 만들 때 박 씨처럼 층층이 익히지 않는다. 익히고 쌓는 과정 없이 한 번에 안친 떡은 가운데가 익지 않는다. 설익는다. 시루떡 세 판을 만들고 쉬는 시간. 새벽 5시 40분이었다.

▲ 시루떡을 만드는 모습

“신문배달하고, 우유배달하고, 떡집이 가장 부지런해. 다른 사람은 다 자잖아. 여기 가장 부지런한 세 가게가 모였어.” 방앗간 건너편에는 신문배급소가, 신문배급소 옆에는 우유보급소가 있었다.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골목에서 불이 켜진, 유일한 세 곳이었다.

“내가 15살에 시골서 도망 왔어. 형제가 많다 보니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도망가자고 완행열차를 탔지. 시골서는 서울에 가면 코 베어 간다고 했어. 용산이 종착역이었는데, 사람들이 다 내리니까 나도 덩달아 내렸지. 아무 목적도 없이. 그때가 새벽 5시였어.”

박 씨는 전주 출신이다. 10남매 중 다섯째. 아무리 일을 해도 남는 게 없었다. 돈은 모두 다른 형제의 교육비로 들어갔다. 친구와 함께 용산행 완행열차를 탔던 이유다. 동이 틀 무렵 역전의 식당에 들어갔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호남식당.

“주인이 ‘이놈의 새끼들 어디서 도망 왔어’ 이러면서 욕부터 하더라고. 도망 나왔지. 그리고 실컷 돌아다녔어. 서울 구경하고 차 구경하고 걷다가 다시 용산역에 왔어. 그리고 그 식당에 또 들어갔어. 저녁 먹으려고. 근데 사장이 그러더라고. 취직시켜줄 테니까 여기 있으라고.”

식당 주인이 전화를 걸자 방앗간 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찾아왔다. 친구와 함께 따라갔다. 일은 고됐다. 친구는 한 달을 못 넘기고 도망갔지만 박 씨는 버텼다. 그곳에서 13년을 일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일을 참 잘했다. 독립하고 3년 만에 방앗간을 샀다.

방앗간을 하면서 출근시간을 어긴 적이 없다. 전날 술을 사발로 마셔도 박 씨는 새벽 3시면 눈을 떴다. “부모가 고생은 시켰어도 몸뚱이 하나는 잘 물려줬지.” 박 씨는 지문도 없다. 쌀을 하도 만져서 지문이 다 닳았다. 동사무소에 가는 날이면 지문이 없어서 애를 먹는다.

▲ 박 씨의 손

“봉급을 타면 10원도 안 쓰고 다 저축했어. 80년대에 쌀 빻는 기본요금이 300원이었거든. 그걸로 1000만 원을 모으고, 1000만 원은 은행에서 대출하고, 300만 원, 500만 원씩 주변 사람한테 빌려서 3000만 원에 방앗간을 샀어. 참 열심히 모았어. 은행에서 저축상도 주더라고.”

방앗간 한쪽에 이층침대를 놓고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성실함은 배신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목 좋은 곳에 아파트를 샀다. 방앗간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되는 거리.

아들이 장가를 갈 때는 서울 도심에 아파트 한 채를 해주고, 딸이 시집을 갈 때는 섭섭지 않게 도움을 줬다. 작년에는 아내 환갑을 맞아 외제차를 뽑아줬다. 강원도 산기슭에 아늑한 별장도 짓는 중이다. 딱 하나 후회되는 점은 배우지 못한 일.

떡에 들어가는 부재료 하나까지 정성이 들어간다. 대표 상품인 영양떡에는 꼭 통밤만 쓴다. 재료비를 줄이려고 다른 곳은 밤을 쪼개서 위에만 살짝 뿌리지만 박 씨는 밤을 쪼개서 쓰지 않는다. 씹는 맛을 위해서다.

주문받은 떡과 소매용 떡을 다 만들면 오전 9시가 된다. 한숨 돌릴 틈이 없이 팥을 절굿공이로 으깨기 시작한다.

“기계로 갈면 분말이 많아지잖아. 그럼 같은 양으로도 떡을 많이 만들 수는 있어. 근데 떡이 맛이 없는 거야. 사람이 손으로 직접 해야 해. 그래야 팥 알갱이도 몇 개 살아있어서 먹는 맛도 있어. 팔이 아프더라도 내가 직접 찧어야 맘이 놓여.”

팥을 다 찧으면 식혀야 한다. 뜨거운 김 때문에 팥에 물이 생겨버리면 맛이 떨어진다. 으깨진 팥을 담은 고무대야를 비스듬하게 들어 고정하고 선풍기를 튼다. 팥은 오후 2시 정도가 돼야 잘 건조된다. 5시간 넘는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오후의 방앗간은 사랑방 같다. 20년이 넘는 단골은 손님이 아니라 이웃사촌 같다. 오후 4시에는 마지막 일과를 시작한다. 내일 만들 떡을 위한 쌀을 씻고 불린다. 여름에는 쌀을 불리는 데 3시간이면 족하지만 겨울에는 하룻밤이 필요하다.

단골에게 떡 한 덩이씩을 더 챙겨주고 보내면 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킨다. 귀가 후에는 저녁을 먹고 9시에 잠자리에 든다. 방앗간을 나오는데 박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자양반, 애기 생기면 백일떡 맞추러 와. 잘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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