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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직업 (13) 필름 현상소
이민서 기자 | 승인 2019.12.29 22:10

 

인터뷰를 위해 서울 시내 현상소 몇 곳에 연락을 남겼다. 발품을 팔며 취지를 전했지만 거절당했다.

어느 날, 현상소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영업이 끝난 뒤의 잔업시간에 인터뷰를 해도 괜찮겠냐는 내용이었다. 기자가 당장 내일도 가능하냐고 묻자 답문이 왔다. “네. 내일 오세요.”

기자는 11월 27일 저녁 8시, 서울 중구의 골목길에 들어섰다. 인쇄소가 많은 곳이었다. 세련된 호텔 맞은편으로 오래된 건물이 보였다. 계단을 올라 3층에서 회색철문 앞에 섰다.

전화를 걸자 낡은 문이 열렸다. 예상보다 젊은 주인이 들어오라고 했다. 현대적인 실내장식과 고전적인 소품이 대비를 이뤘다. 현상소 ‘일삼오 삼육’의 첫인상은 필름카메라 산업의 모습과 닮은 듯했다.

접수대 위로 서류봉투가 가득했다. 봉투 위에 인적사항을 손으로 직접 쓰는 것이 접수방법이라고 한다. 옛날 그대로다.

하루에 적게는 120롤, 많게는 150롤 정도를 접수한다. “일이 많아서 감사하지만 무미건조하게 작업 중이에요. 작업 물량이 꽤 많아 새벽에 퇴근하고 몇 시간 뒤 출근하는 게 일상이거든요.”

▲ 현상소의 접수대

‘일삼오 삼육’의 주인 이진혁 씨(32)는 한때 상업 사진사를 꿈꿨다. 사진 스튜디오에서 경험을 쌓았지만 나이와 수입 등 현실적인 고민에 부딪혔다.

“그때 떠오른 게 현상소였어요. 제가 원래 필름카메라를 좋아하기도 하고, 젊은 현상소를 꾸려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씨는 스튜디오 일을 그만두고 필름 현상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2년간 일을 배우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올해 3월 지금의 현상소를 차렸다.

그는 책을 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현상소 한쪽에는 주인이 직접 고른 서적이 보였다. 독립출판에 대한 그의 애정이 엿보였다.

기자가 진열대를 둘러보자 그는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필름카메라 입문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했다. “제가 쓴 책이에요. 별 건 아니에요.” 이 씨는 언젠가는 독립출판 시장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작업공간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이 씨는 접수대 안쪽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작업방식은 간단하다. 접수한 필름을 현상기에 넣고 ‘리더’라는 판에 건다.

인화부터 건조까지 모든 공정을 마친 필름은 스캐너에 넣는다. 스캔한 이미지를 컴퓨터에 저장한다. 인화한 사진을 봉투에 담는다. “계속 반복 작업이에요. 일하다 보면 저 스스로가 현상기 같아요.”

▲ 현상기(왼쪽)와 작업 공간

그럼에도 보람은 있다. “어느 날 할아버지 한 분이 찾아오셨어요. 오래된 필름인데 현상이 가능하겠느냐고.” 다행히 현상에 성공했다.

사진은 필름을 맡긴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담아다. 노쇠한 대신 씩씩하고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그는 요즘도 오래된 필름현상을 맡곤 한다. “보람 있죠. 필름 속, 그 시간을 찾아주는 기분이 들어요.”

그는 때로 필름 속에서 한 편의 영화를 발견한다. 카메라에 넣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필름은 색이 바랜다. 운 좋게 잘 보관된 필름을 현상하러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대부분은 몇 장만 사용한 필름을 현상하기 위해 남은 장수만큼 사진을 찍는다. 현상한 필름에는 과거와 현재가 담겨 있다.

“필름 앞부분에는 엄마 품에 아기가 안겨 있어요. 새로 찍은 부분부터는 성인 여성이 나타나요. 그 아기가 사진 속 엄마만큼 나이가 들어 필름을 현상하러 온 거예요.”

처음 현상을 배울 때, 이 씨는 얼마나 오래 일할지 의문스러웠다. 현상소를 차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악의 경우 다섯 달 안에 가게를 정리할 각오를 했다. 필름수요가 해마다 줄어들기 때문이다.

필름을 모르는 세대의 출현을 실감하기도 했다. 하루는 어린 연인이 현상소를 찾아왔다. 이 씨는 그들로부터 필름 한 롤을 건네받고 당황했다. “다 찍은 필름을 완전히 펼쳐 가지고 온 거예요. 필름은 빛에 노출되면 타버린다는 게 이제 어떤 세대에게는 낯선 사실이 된 거죠.”

필름카메라 산업의 사양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화여대 전영경 교수(서양화과)는 필름생산이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 스캐너 기술은 나날이 발전합니다. 소수가 되긴 하겠지만 필름카메라의 수요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필름 원판을 고해상도 기능의 스캐너로 디지털화하면 미래에도 충분히 질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필름카메라만의 차별점도 무시할 수 없다. 전 교수는 필름에 아날로그만의 맛이 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일부러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을 사용해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특이한 색감을 만들기 위해서요.” 결과물이 안정적인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필름카메라에는 예상치 못한 요소가 있는데, 이것이 분명한 강점이자 디지털과의 차별점이라고 했다.

이러한 매력이 디지털 세대를 사로잡았을까. “하루 고객이 열 명이라고 하면, 아홉 명이 20대 또는 30대예요. 하루는 우연히 20대 몇 명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어요. 요즘 필름 좀 만져야 힙하다고….”

대학생 박주현 씨(21)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현상소를 찾는다. 사진을 찍으며 한 장 한 장에 신중해지는 순간이 매력적이라고 한다. 구진희 씨(21)는 옛것임에도 필름카메라를 찾는 또래가 많아지는 점을 부쩍 느낀다고 말했다.

▲ 현상소 내부 모습

이 씨에게 필름의 매력이 무엇인지 다시 물었다. “말장난 같지만, 디지털이 아니라는 거요. 필름은 오래 남는 느낌이 있어요. 제 목표도 비슷해요. 그냥 오래 남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필름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현상소를 나서기 전에 이 씨에게 필름 한 롤을 건넸다. 기자가 처음 찍은 필름카메라 사진이었다. 다음날 정오가 채 되기 전에 현상된 사진 파일이 도착했다.

투박한 사진에서 뭔가가 와 닿았다. 이 씨가 말한 대로 ‘필름 속의 시간’이 느껴졌다. 거친 질감은 정겹기까지 했다.

필름 한 롤에 들어가는 수고와 값은 디지털 사진에 비교하면 사치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아직 필름카메라를 들고 현상소로 향한다. 그 발걸음에 담긴 설렘을 알기에 오늘도 현상소는 바쁜 하루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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