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에이치오티(H.O.T)가 '늑대와 양'이라는 음반을 들고 컴백했을 때, 멤버 각자의 이름을 헝클어져 엉켜 있는 듯한 영문자로 표기해 옷마다 붙이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 중에, 그러한 스타일의 문자가 '그래피티(graffiti)'를 활용한 디자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피티란 '벽에 그려진 낙서기 있는 문자와 그림'을 의미하며 'Spraycan Art', 'Aerosol Art'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본래는 고대의 동굴 벽화나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지칭하는 개념이었으나, 현대에 와서 도시의 건물 벽에 스프레이와 페인트 등으로 그린 그림(mural painting)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죠. 본격적인 그래피티 아트의 탄생은 뉴욕 할렘가 흑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초창기에 이들의 그림은 도시 미관을 해치는 '범죄'로 취급받았지만, 80년대를 넘어서면서 미국과 유럽을 위시해 세계 젊은이들에게로 저변이 확대되자 힙합 문화의 안에서 장르적 개념으로, 기성 예술 표현의 발상을 뒤집는 거리 예술로 평가 받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래피티가 보편성을 지닌 예술 장르로 뿌리 내리기를 고대하는 이 사람, 반달(Vandal)이라는 태그네임(tag name)을 쓰고 있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홍희남(26)씨의 설명이다. 

압구정동 어느 건물 지하에 아직 걸음마를 하고 있는 한국의 그래피티를 훌륭한 마라토너로 만들고자 하는 젊은이들, Vandal's Art Factory 바프(VAF)가 있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반달'과 웹 마스터 이상용(26)씨, 그리고 모든 매니지먼트 업무를 담당하는 강태우(26)씨를 주축으로, 객원 그래피티 아티스트 매녹menok(이성규, 18) 객원 웹 디자이너 김준호(25)씨 등이 모여 본격적 의미에서의 그래피티 아트를 세상에 내놓으려 하고 있다.
 

 
구색 맞추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힙합에 구색을 맞출 때 DJing, MCing, B-boying 그리고 '그래피티'. 이렇게 네 가지 요소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바프의 홍희남씨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힙합 문화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 그래피티를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식의 접근은 힙합에 대한 자신의 박학 다식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 그래피티라는 이름을 건드려 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힙합이라는 토대 없이 그래피티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 문제를 대담하고 가시적으로 비난한다는 면에서 그래피티는 힙합의 다른 요소들과 맥을 같이 한다. 실제 그래피티 작업을 할 때의 즉흥성 또한 '힙합스러운' 면이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프레이를 사용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대중에의 근접성 또한 그렇다. 미술용 도구가 아니라 공업용 도구인 스프레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보수 문화의 틀과 현대 미술에도 여전히 나타나는 고전적 형식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그래피티는 힙합 문화의 기본 정신을 제대로 잇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피티를 힙합 속에 뭉뚱그려 지나쳐 버리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한국적 특수성 때문이다. 

한국의 신세대들이 힙합의 음악과 패션, 자유로운 표현 정신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빠져있다는 것은 이미 거론할 필요가 없는 얘기다. 그런데, 힙합과 똑같은 지역적, 사회적, 정신적 바탕에서 출발한 그래피티에 대해 신세대들의 반응은 이상하리만치 냉담했다. 외국의 경우 젊은이들의 힙합에 대한 관심은 처음엔 음악, 다음엔 패션과 그래피티 아트라고 한다. 모든 문화는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바라보면, 한국 젊은이들의 힙합 문화는 절름발이 문화다. 그래피티는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은 그래피티의 불모지나 다름없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그래피티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프리랜서들을 키우고 지원해서 문화적 공동체를 만드는 겁니다." 홍희남씨는 바프의 활동을 통해 그래피티 아트가 대중적 주류문화로 떠올라와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http://graffiti.corea.to)에 그래피티의 정의부터 역사, 스프레이, 그리는 방법, 자신의 작품들, 그리고 바프에 찾아오라는 뜻에서 약도까지 실었다고 한다. 바프는 자신들의 활동 영역을 그래피티 스타일을 활용한 인테리어와 캐릭터 상품 개발까지 넓힐 계획을 하고 있지만, 지금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한국에 그래피티 아트를 대중화 시키는 일이다. 

한국적 힙합 속에서의 한국적 그래피티

그래피티의 대중 인식도가 높아지게 되는 시점부터 생각해 주어야 하는 것은 "한국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사실 '한국적'이라는 것처럼 퇴색과 변질의 좋은 방패가 되는 말도 없다. 그러나 외국에서 건너온 문화의 토착화는 그 사회의 토착적 정서에 대한 배려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한국적 그래피티 개발은 반드시 선구적 위치에 서 있는 사람부터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바프는 한국 그래피티의 선구자를 자처하는 입장이니 만큼 그래피티에 한국적 개성을 담는 일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우리는 그래피티에서든 다른 디자인에서든 한국적인 느낌을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선 우리 사무실부터 한 쪽 벽면을 한글 그래피티로 디자인 했어요." 

 지금까지 우리가 접해온 그래피티 작품은 대개 백인이나 흑인 얼굴 이미지의 과장이거나 영어 일색이었다. '금다래,신머루'처럼 한복 치마 저고리를 입은 인물만 한국적이고 고글 쓰고 보딩하는 모습은 한국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다. 그렇지만 정서적으로 더 친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을 표현해 내고 싶은 것이 바프의 욕심이다. 

그래피티의 전파 과정에서 선구자적 입장에 있던 사람들은 선진하고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그래피티 스타일을 모방하고 배우는 일에 열중해왔다. 한국에서 힙합 음악의 대중화란 곧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힙합 문화 전체에 있어서, 정통론이 득세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바프의 시도를 '변형'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변질'을 옹호하려는 것으로 보기 쉽다. 

서태지의 노래 '교실 이데아'의 가사는 롸임(rhyme 각운)이 거의 맞지 않아 정통을 왜곡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가사의 내용은 한국적 현실에서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래피티에서도 한국 사회 현실에 맞는 'social words'를 뱉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유럽은 미국적 그래피티의 초창기 스타일인 올드 스쿨(old school)에서 뉴 스쿨(new school)로 그래피티의 판도가 변하는 과정을 겪었고, 이것은 분명 정통에 대한 도전이었고 변형이었다. 분명하고 강한 선, 원색의 강한 대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변형을 적게 가한 글씨체는 다분히 추상적이고 몽환적, 비현실적 느낌을 주는 스타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뉴 스쿨에 대해 힙합 정신의 변질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새로운 스타일로의 전환은 그래피티 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자유와 평등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그래피티의 정신이 변하지 않는 한 표현 방법상의 차이로 이단과 정통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강태우 실장의 생각은 본질론자들이 말하는 힙합 정신과 많이 닮았다. 디자인이란 어차피 기존에 주어진 코드를 활용해 창조하는 작업이란 점에서,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시도일 수록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생각의 끝에 이르면 전하고 싶고, 깨닫는 대로 나누고 싶어서 글을 쓴다고 한다. 홍희남씨가 말하는 그래피티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 "자기 맘을 진솔하게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어쩌면 그래피티는 일기장 같은 거죠." 바프는 지금 멋진 새 일기장을 마련했다. 여럿이 같이 쓰는 일기장을. 
 
 

김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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