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환타지는 한 철의 유행 상품이 아니다

이렇게 시작을 합시다. 환타지의 (아마도 영원한) 고전인 J.R.R 톨킨의 반지 전쟁(The Lord of the Rings)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반응은 보통 양극단의 어느 한 쪽입니다. 한 권을 다 읽지 못하고 책을 집어던지는 경우와, 마지막 권을 덮은 다음 스스럼없이 '대단한 책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현재 국내 출판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환타지 소설들에 대한 반응 역시 극단적입니다. 심심풀이 이상은 되지 못하는, 일회용의 쓰레기더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그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이야기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톨킨의 소설은 환타지라는 장르가 문학성을 공격받을 때 요긴한 방패로 이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퇴마록과 같은 소설은 톨킨의 피 같은 것은 조금도 이어받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마도 그 후손이라고 생각되는 드래곤 라자 류의 소설 역시, 그 플롯이나 분위기나 주제의 어떠한 면에 있어서도 굉장히 가계를 찾기 어려운 혼혈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범람하는 매체와 정보들 사이에서 자라난 '장르'에 대해 애초에 그 혈통을 따지려는 노력은 애초에 무리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쯤에서 분명히 밝혀 두자면 이 글의 목적은 한 철의 유행 상품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환타지를 변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의 한 수단으로 생각될 수 있는 방법, 그 고귀한 혈통을 밝혀보자는 시도는 여기서 일단 배제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2. 통신 문학도 문학이다

통신망에서의 창작 활동이 기성 문단의 그것과 전혀 달랐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물론 통신망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문학성'이란 단어는 사용하기가 왠지 쑥스러웠던 단어임에 틀림없습니다. 문학성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문자 예술의 일반적인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만큼 그 정체는 모호합니다. 문학성에 대한 논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바로 이것이 문학성이다라고 관통할 수 있는 어떠한 주체도 없습니다. 대신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팽창시킬 수 있는 하나의 영역으로 생각됩니다.

통신망의 창작이 기성 문단에 진출한 것은 제법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기성의 문단과 동질적인 것으로, 그 곳에 흡수된 것일 뿐 표면적으로 어떠한 특별한 현상을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실제로 '통신망적'인 소설들이 기존 문단의 책들과 같은 무대에 서 있고, 이렇듯 동일한 매체라는 점이 이제서야 문학성의 사용자들을 자극한 듯 싶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책으로 묶여 나왔기 때문에 환타지 소설이나 다른 통신망적인 문학들이 문학성의 공격 범위 내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인식하자면 애초에 기존의 문학성의 사용자들과 통신망의 창작자들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지만, 출판이라는 사건을 통해 통신 문학이 기존 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옵니다. 이들 역시 언어로 된 예술 작품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그에 따라 실제로도 예술성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게 되므로, 문학성의 사용자들은 자신들의 문학성으로 신참자들을 평가해도 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존 영역으로의 침입은 통신망의 창작자들 스스로의 의지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인쇄 매체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출판업자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상업적이라는 오명을 둘러쓰기에도 딱 좋습니다. 문단과 출판계는 퍽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로 생각되는데, 환타지를 포함한 통신 문학은 그 둘이 살고 있는 집에 출판계가 데려온 자식과도 같다고 할까요.

3.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환상, 환상 문학

국내의 환타지 문학은 이제 기존의 문학과 '문학'이라는 한 집에 살게 됐지만, 예전의 몇몇 통신 문학처럼 동화될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문학성이라는 것 역시 사용자들에 의해 그 테두리가 쳐지는 것입니다. 그 테두리 안에는 환타지를 포용할 수 있는 것과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그 테두리를 넓히는 것으로 해결이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새 테두리가 새로이 포용해야만 할 것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의외로 환타지 소설이 공격받는 구석은 단순합니다. 주로 현재 출판된 환타지 소설들의 표면적인 문제들은 황당무계함으로 표현되는 리얼리티의 결여, 문장의 빈약함(미적이지 않은 문장의 사용), 결정적으로 인간에 대한 (가장 중심적인 사물에 대한) 관찰의 결여 등입니다. 인간에 대한 관찰이 빈약하다든가 문장이 유려하지 않다는 지적은 출판된 소설에 한정된 단편적인 관찰입니다. 통신망에는 이러한 점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창작자들의 작품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앞서 언급했던 톨킨의 작품은 이러한 요소들을 충분히 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환타지 작가들이 스스로 문학을 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이상 그러한 점들은 작품의 양이 늘어나면서 꾸준히 정비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환타지는 결코 방사능에서 태어난 이상한 괴물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리얼리티로 관점을 좁혀 갑니다. 우리가 '있다' 혹은 '없다'로 생각하는 것을 살펴봅시다. 어떠한 사물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많은 것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듣거나 만졌다면 그것은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 가령 과거 속의 일들은 그것을 실제로 감지했던 자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지언정, 구전이나 문자로 인해서 '있다'는 것을 공인 받습니다. '있다'는 것의 의미는 여기까지 확장됩니다. 따라서 이 단계가 되면 일반적인 문학과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있다'라는 개념 하에서 창작된 문학은 그것 역시 '있음'을 주장하고, 그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지니는가는 '있음'에 대해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된 혹은 그 합의된 내용을 내재한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있음'으로 받아들여진 픽션은 또 다른 '있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내재화됩니다. 사실상 우리에게 있어서 어떠한 사실의 존재감은 이렇게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장하는' 단계에서 설정되며 실제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영역은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환타지는 이러한 점을 이용한 즐거운 프로젝트입니다. 어떠한 사물이나 사실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이 형성한 믿음의 구조망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그러한 믿음을 새로이 재구성해 내는 것 역시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야심에 가득 찬 SF 작가나 초현실주의자에 의해서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환타지가 특별히 강력한 점은 그 믿음의 구조를 신화나 민담 등 오랜 세월 동안 검증된 가상 체계에서 차용해 왔으며, 또 그러한 바탕에서 여러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그것을 키워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환타지 소설이 이제 와서 대중에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가상의 믿음 체계에서 현실감을 느낄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화나 민담이 지역이나 종교로 이루어진 믿음 체계에 어필하는 것이었다면 환타지는 오히려 발달한 통신 사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질 수 없는, 간접적으로 쏟아지는 정보가 우리의 믿음 체계를 구성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가상인 환타지의 믿음 체계를 받아들이는 일을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반지 전쟁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은 이러한 믿음 체계를 받아들이는가 그렇지 못 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환타지 소설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 역시 이러한 믿음 체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은 이것이 이미 어느 단계에서는 현실과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즉, 환타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이것이 역사상의 어떠한 일이나 먼 나라의 어떠한 일보다도 더욱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것입니다. 멀쩡한 지능을 지닌 중학생도 '나는 마법 검사가 꼭 될 거야'라고, 그러한 믿음 체계를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떳떳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돈키호테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그가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깁슨의 사이버 펑크 '뉴로맨서'에는 흥미로운 자이온 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환각과도 같은 어떠한 일을 말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것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 마치 시와 같은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경향은 대마초를 일반적으로 흡연하면서 생기는 것인데, 이러한 환각들이 자연스러운 언어 습관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들의 사회 집단 전체가 그러한 경향을 가지고 있기에 타인의 환각 역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형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이성에 의해 다듬어지고 풍부해진 환타지는 이런 경우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인 가상의 믿음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4.환타지는 만질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천공의 성

우리가 어린 시절 즐겨보았던 '캔디캔디'나 '마징가 Z'의 공간은 사실인 척 지명 따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공간과 사건은 지금의 환타지와 얼마나 차별성을 지니는 것일까요. 애당초 그들에게 주어졌던 이미지들은 그 시기부터 손에 닿을 수는 없는 것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역시 만질 수 있는 세계와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어린 환타지 창작자들은 용의 종류가 몇 가지인지, 마법 사용자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등, 이미 이루어진 세계를 정형화하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를 변형시키고 새로운 방향으로 창조해 나가는 것은 좀더 나이 먹은 창작자들의 몫입니다. 환타지는 만질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천공의 성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환타지가 햇빛 아래로 나온 이상, 그 사용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문학성'을 개발해 나갈 것입니다. 통신망에는 창조된 세계관이 얼마나 나름대로의 내재된 논리에 충실한가, 그리고 그러한 창조가 작품의 주제와 얼마나 부합하는가 등 가상의 믿음 체계에나 들어맞을 법한, 아직은 조금은 부끄럽게 생각하는 '문학성'의 기준이 있습니다. 인쇄 매체의 영역을 침범한 이상 이 새로운 문학성의 사용자들은 기존의 문학성과 어떠한 방식으로든 합의를 볼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이던 환타지의 영역, 그 새로운 현실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에(그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어떠한 형태로든 환타지 자체는 그 생명력을 계속 간직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기존 문학의 파괴가 아니라 거대한 신대륙으로의 확장을 의미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종현 daywol@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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