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가 오토바이도 타요?"
서울대 보라매 병원 신경외과 간호사 김용경(24)씨가 오토바이 분실신고를 하러 파출소에 갔을 때, 신고를 접수하던 경찰이 처음 내뱉은 말이다. 당시, 김 간호사는 오토바이를 직접 운전해서 타고 다니던 터였는데 안타깝게도 직접 운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도둑 맞고 말았다. 지금도 김 간호사의 꿈은 새 오토바이를 갖는 것. 오토바이가 사라진 후 김 간호사는 드럼을 배우고 있다. 무예 동호회에도 참여한다.

같은 병동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안효주(23)씨. 안 간호사는 죽도를 매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꼬마 아이를 불러 세웠다. "얘, 학원이 어디니?" 그 길로 검도 도장을 알아 보러 간 안 간호사.

빨간 매니큐어 칠하고도 간호는 할 수 있죠

두 사람은 모두 '간호사'에 대해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을 거부한다. "귀 세 개 뚫고 화장 진하게 하고도 얼마든지 간호를 잘 할 수 있는데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감염 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는 반지 같은 건 우리가 알아서 안 해요. 사람들은 병원 안에서의 간호사의 모습을 병원 밖에서까지 강요하려 해요. 근무 없는 날엔 우리도 빨간 매니큐어 칠하고 길거리를 다닐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용납 안 해요. 자신들의 틀에서 벗어나면 '간호사가 어떻게'라는 식으로 바라보는 거죠. '백의의 천사'라고 하는데 그것도 별로 달갑지 않은 이야기예요."

'못 말리는 간호사'에 나오는 도쿄 K병원 내과 병동의 신참 간호사 유키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유키에가 "백의의 천사가 뭐 이래?"라는 환자의 말에 발끈하며 '간호사'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심각하지만 약간은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고민하던 장면이 그려졌다.

"헌신적이어야 한다, 희생적이어야 한다는 게 강요가 되어선 안 되죠. 마음에서 우러나서 이제 막 하려고 하는데 누가 옆에서 해라, 해라 그러면 더 짜증스러워 지잖아요. 간호사도 무료 봉사가 아니고 하나의 전문 직업인데 그걸 '숭고하다, 헌신적이다 '라고 말할 땐 오히려 부담스러워 져요" 김 간호사의 말이다.

신참내기 유키에 간호사가 맥박을 재다 어디까지 세었는지 수를 잊어버려 다시 재고, 심전도를 잴 때 심장 반대편에 기기를 가져가 이상한 그래프가 그려지고, 혈관 주사를 동맥에 꽂아 난리를 치르는 등 웃지 못할 크고 작은 실수를 한 것처럼, 김용경 간호사 역시 간호사가 된지 1년쯤 되었을 무렵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진통제를 놓는데, 착각을 해서 이 환자에게 놓을 걸 다른 환자에게 놓은 거예요. 그런데 그 진통제를 잘못 맞은 환자가 하필 진통제에 부작용이 있던 환자였어요. 세상에, 진통제 맞은 환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어하는데, 내가 왜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했을까 딱 죽고 싶은 심정이더라구요."

크고 작은 실수를 하고, 일이 힘들 때면 간호사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그만 두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간호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힘을 얻는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김용경 간호사와 안효주 간호사가 근무하는 신경외과 병동엔 보호자 없는 40대 남자가 입원해 있다. 의식은 있지만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을 제외하곤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이 환자는 처음엔 스스로가 두터운 벽을 쌓았었다. 여성인 간호사에게 자신의 치부까지 드러낸 채, 씻겨주고 먹여주는 대로 자신을 맡겨야 하는 데에 수치심을 느꼈기 때문인지 좀처럼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진심으로 대해서 인지, 그 벽이 차츰 허물어지더라구요."
어느 날 이 환자가 간호사가 떠 먹여 주는 식사를 마친 후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라고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을 때, 김용경 간호사는 돌아서서 남 몰래 눈물을 글썽였다.

"할머니, 식사하셨어요?"라는 간호사의 말 한 마디에 감격해 손을 붙잡고 눈물 흘리는 외로운 노인들의 모습에, 명절 때 외출 나갔다 돌아온 환자들이 건네는 송편 하나에 간호사들은 울고 웃는다. 밤 근무를 할 때, 회진을 하면서 환자들의 들쳐진 이불을 살짝 덮어줄 때 찾아오는 흐뭇한 보람들. 간호사들의 생명수는 바로 이러한 데에서 솟아난다.

 

간호사가 참아야지…

여느 간호사와 다를 바 없이 이런 생명수를 마시며 활기차게 병원 생활을 해오던 김용경 간호사. 그런데 요즈음 김 간호사는 병원 생활 3년만에 병원에서도 전례가 없는 큰 일을 겪어 내고 있다.

7월 16일자 한겨레신문 사회면에 실린 '간호사에 행패부린 의사 큰 코 다쳐'라는 제목의 기사. 이 기사 속의 '김 아무개 간호사'가 바로 김용경 간호사다.

지난 6월 28일 오전 8시경, 서울대 보라매 병원 신경외과 레지던트 강모(33)씨는 환자 남 모씨에게 아직 처치가 내려지지 않은 것을 보고 주치의인 레지던트 이모씨를 윽박지르며 질책했다. 질책이 계속되자 이를 지켜보던 김용경 간호사는 "강 선생님, 그게 아니라 이 선생님이 오더를 내렸는데 인턴과 연락이 되지 않아서 연결을 못 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 지더니 "야! 왜 네가 끼어 들어? 너는 상관 마!"를 시작으로 강 모씨의 폭언이 계속됐다. 갑작스런 반말과 윽박지름에 당황한 김 간호사는 "야?"라고 반문했고 더욱 흥분한 강모 의사는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어 김 간호사를 향해 던질 태세를 취하다가 병실 복도를 향해 의자를 집어 던졌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강모 의사는 김 간호사를 처치실로 끌고 가서 내동댕이치며 "내가 이 선생한테 말하는데 네 까짓 게 왜 끼어 들어?"하고 폭언을 계속했다. 지나친 반말과 욕설에 김 간호사는 "그건, 끼어 든 게 아니라 간호사로서…"라고 말하며 강한 태도를 취했다. 여기서 급기야 강모 의사는 옆에 있던 유리로 된 수액병을 집어 들었다. 주위의 만류에 간신히 상황이 진정되기는 했지만, 이 사건은 병원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다음 날, 병원엔 강모 의사의 해임을 요구하는 대자보가 붙었고 병원측은 가능한 한 사건이 커지지 않게 무마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병원측은 교육위원회를 열어 강모 의사에 대해 6개월간 10% 감봉 조치를 내렸다. 병원측에서는 이것이 전례 없는 중징계라고 이야기 하지만 서울대병원 노조측에서는 꼭 이번 사건 뿐 아니더라도 강모 의사의 평소 환자 보호자나 도료 직원을 대하는 무례한 태도, 불성실한 치료 등을 이유로 강경히 강모 의사의 해임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김용경 간호사는 요추염좌로 인한 2주 진단서를 끊어 강모 의사를 상대로 동대문 경찰서에 고소한 상태다. "사실 저도 처음부터 소송을 걸 생각은 아니었어요. 또 소송에서 이길 가능성도 거의 없구요. 하지만, 병원측의 미온적 태도에 화가 났고 앞선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또 '간호사가 참아야지'라는 식으로 넘어가면 안될 것 같아서…"
김 간호사의 말은 단호했지만 그 속엔 깊은 갈등과 고민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주위에서 많이 말렸죠. 괜히 이러다 너만 다치는 것 아니냐면서요. 괜히 내가 총대를 맸다 싶기도 해서 고민도 많이 하구." 사건이 있던 날부터 소송을 걸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김 간호사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두고두고 후유증이 남을 듯 했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간호사가 의사의 동등한 파트너로서 인정받는 단계까진 아직 올라오지 못했고, 또 그러기에는 아직 많은 길이 남았다고 안효주 간호사는 말한다.
"간호사와 의사가 하는 일이 많이 다르고 그래서 간호사가 독립적으로 하는 일이 많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직도 간호사는 의사의 명령만 수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죠." 안 간호사의 안타까운 말이다.

'못말리는 간호사'에서 의사와 간호사 두 집단간의 갈등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파트너십을 구축하면서 이상적인 결론을 맺었는데…. 역시 현실은 만화와 같이 이상적일 수 없다는 씁쓸함이 느껴진다.

앞으로 어떤 간호사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폭력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느라 어두워졌던 두 간호사의 얼굴이 다시 펴졌다.

"이론과 기술(능숙함), 그리고 환자와 공감할 수 있는 마음.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룬다면 좋겠죠?" 싱긋 웃는 김용경 간호사의 모습에서 프로다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 중 제일을 꼽으라면, 난 환자를 이해하고 공감해서 환자와 친밀해 질 수 있는 정서를 꼽을게요." 미소를 띄우며 안효주 간호사는 자신이 교수님에게 들었다는 한 토막의 짤막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교수님이 외국에서 근무하실 때 일이에요. 어느 날 새벽에 근무를 하고 있는데, 한 환자가 부르더래요. 그래서 갔더니 환자가 앉아서, 지금은 교수님이 된 그 간호사를 위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는 거죠. 저도 그런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힘들게 일하는 새벽, 환자가 간호사를 위해 노래를 불러줄 만큼 정서적으로 친밀한 간호사요."

"넌 될 수 있을 거야." 툭 던진 김용경 간호사의 한 마디에 안효주 간호사가 수줍게 웃는다.


 이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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