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여행, 로마의 4박 5일 일정은 그리스 로마 유적 전문가인 김문환 세명대 교수의 조언에 따랐다. 이 계획에 따라 셋째 날, 피렌체로 향했다. 짐은 로마 테르미니 근처의 숙소에 남겨두었다. 간단한 여행도구만을 챙겨서 오전 8시 45분 피렌체발 이탈로(Italo) 급행열차를 탔다.

피렌체를 갈 참이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 베로나와 수중도시 베네치아를 들러보라는 권유를 받았었다. 그러나 이미 서울을 떠난 지가 열흘이고 이틀 밤만 지내면 귀국을 해야 했기에 더 욕심내지 않았다. 대신 피렌체라도 제대로 살펴보자고 다짐했다.

하루 전, 왕복열차를 예약했다. 아침에 출발해 당일 저녁 9시 53분에 돌아오는 스케줄이다. 로마에서 피렌체까지 갈 때는 1시간 32분, 올 때는 1시간 36분이 걸렸다. 프리마 등급으로 예매했더니 54.90유로로 다소 비쌌다. 보통 등급은 40유로, 평일이라면 편도 30유로 정도다.

이탈로 프리마 좌석은 KTX 특등석보다 자리가 넓고 편했다. 더 빨라 보였지만 흔들림이 적었다. KTX와 달리 한 방향으로 좌석이 배치됐다. KTX 좌석은 이탈로와 달리 왜 열차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방향으로 배치했을까. 지금도 이탈로 서비스를 안내하는 이메일을 받는다. 비슷한 반도 열차이면서도 이탈로가 KTX보다 고객 관리를 잘하는 듯하다.

피렌체를 하루 낮에 돌아봐야 하기에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우피치 미술관을 우선 관람한다. 둘째는 《사랑한다면 이탈리아》라는 최미선·신석교 부부의 여행 서적에 나오듯이,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다리, 폰테 베키오(Ponte Vecchio)를 걸어본다.

그런데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다리는 여행기 2편에서 썼듯이 폰테 산타 트리니타이다. 산타 트리니타와 베키오 다리가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500m 사이를 두고 나란히 옆에 있다. 그래서 최미선처럼 주장할 수도 있다. 베키오 다리는 1345년 세워졌는데,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일 뿐만 아니라 로마 양식으로 세운 마지막 다리다.

▲ 단테가 산타 트리니타 다리에서 흰 옷을 입은 베아트리체를 쳐다본다. 왼쪽에 베키오 다리가 보인다. 헨리 홀리데이의 1883년 작품(단테와 베아트리체)으로 영국 리버풀 소재 워커 아트 갤러리 소장.

최미선은 동아일보 기자였다가 자유 여행가로 전업했다. 그는 베키오 다리에 대해 “16세기까지만 해도 이 다리는 푸줏간과 대장간이 가득”했다고 한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의 “최고의 스캔들을 일으켰던 프란체스코 1세” 이후 형의 자리를 이은 “페르디난드 1세가 시끄럽고 비위생적이란 이유로 푸줏간과 대장간을 몰아내고 금세공업자들을 불러들임으로써 지금의 귀금속 다리가 된 것”이라 설명한다. (최미선·신석교, 위의 책, 114쪽)

중세나 근세까지 파리 센 강의 퐁 네프를 비롯해 다리 위에 건물을 짓는 특징이 있었다. 다른 다리와 달리 베키오 다리가 여행객으로 북적인다. 단테나 프란체스코 1세나 그들의 사랑은 피렌체에서 해피엔딩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후세에 남겨 지구촌 관광객을 피렌체로 향하게 한다.

폰테 산타 트리니타(Ponte Santa Trinita)에 대해서도 한 마디를 덧붙여보자. 서양 지명에는 이탈리아어로 트리니타, 영어로는 트리니티(Trinity)라는 단어가 많다.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에 가면 트리니티 컬리지가 있다.

여기서 트리니티는 성부(Pater)와 성자(Filius) 그리고 성령(Spiritus Sanctus)을 뜻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트리니티가 기독교 교리인 삼위일체, 즉 트리니타스(Trinitas)를 나타냄을 깨달았다.

트리니타 다리에는 4개의 조각물이 있는데, 각각 4계절을 상징한다. 봄을 나타내는 여신상은 계절의 여왕 장미 화관을 썼다. 조각에서 밀이삭 관은 여름을 상징한다. 가을을 보여주는 조각상은 수확한 포도를 움켜쥐었다. 겨울을 나타내는 조각상은 지중해가 겨울에는 다소 쌀쌀해서인지 머리에 천을 둘렀다.

▲ 트리니타 다리 위의 조각상

피렌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로마의 축소판이다. 피렌체역에서 피렌체 시내를 관통하는 강인 피우메 아르노(Fiume Arno)에 당도하기까지 다섯 블록만 걸어가면 된다. 이 다리가 폰테 베스푸치(Ponte Vespucci)이다.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오면 카라이아, 트리니타, 베키오 다리가 두 블록씩 가깝게 떨어져 있다. 베키오 다리를 지나니 곧바로 우피치 미술관이 디귿 모양으로 강변에 나타났다.

로마에 오기 전에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에서 현역 교수나 언론인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나 서류를 보여주면 박물관이나 미술관 입장이 무료다.

미국에서는 개학을 앞두고 교사나 학교 직원에게 가격을 10%씩 깎아주는 대형 마켓이 많다. 이들 직업군이 그곳에서 본 내용을 학생이나 일반인에게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인 듯싶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그렇지는 않았다. 급히 표를 사서 우피치 미술관에 입장했다.

수많은 그림과 조각을 반나절 이상 봤기에 여기에서 느낀 감동이나 깨달음을 모두 소개할 수 없다. 다만 보티첼로의 <비너스의 탄생>과 같이 잘 알려진 작품 앞에는 관광객이 방 가득 몰려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그림에 스마트폰을 들이댔다. 대다수가 삼성 제품이었다.

▲ 관람객이 <비너스의 탄생>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

명화나 명소 앞에서 스마트폰을 들이대는 모습은 21세기 박물관 관람의 새로운 풍속도다. 이러한 새 풍속도를 자코모 자가넬리라는 사진작가가 <그랜드 투어리스모, Grand Tourismo>란 예술품으로 보여준다.

자가넬리는 그랜드 투어리즘이란 전시장에서 <환상(Illusion)>, <어디나 그러나 아무 데도(Everywhere but Nowhere)> 그리고 <우피치 투데이(Uffizi Today)>라는 세 가지 제목의 비디오를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또 하나 소개하고 싶은 명화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다. 김상근 연세대 교수는 “외설이냐 예술이냐,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이 그림에 내재한 창조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 명화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섹시한 그림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의 비너스는 베네치아파 화가 조르조네의 <들판에 누워있는 비너스>와 거의 같은 자세를 취했다. 마네의 <올랭피아>와도 구도가 비슷하다. 그림을 잘 모르는 나의 눈에는 서로서로 베끼고 또 베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 <우리비노의 비너스>는 유혹과 애도, 삶과 죽음, 생의 환희와 슬픔을 담았다.

김 교수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한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조르조네의 <들판에 누운 비너스>를 모방했다지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상당히 의미가 다르다. 그의 긴 설명을 짧게 줄인다면,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당대 최고의 여류 지성인이었던 비토리아 콜론나였다.

이 명화는 “남편을 잃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한 여인의 운명”을 그렸다. 그래서인지 이 명화는 “애도와 유혹, 죽음과 삶, 슬픔과 생의 환희”를 동시에 보여주는 탁월한 누드화로 평가 받는다. (김상근, 아레테의 힘-인문학으로 창조하라, 83-90쪽, 서울: 멘토프레스, 2013).

김 교수는 이외에도 피렌체를 위기에서 구출한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를 상징한다는 보티첼리의 <팔라스와 켄타우로스>를 소개한다. 이 명화 또한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켄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로 그림에서 보듯이 상체는 사람이지만 하체는 말로 반인반마의 형상이다. 팔라스는 그리스 여신 아테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림에선 이러한 괴물을 아테네의 여신 팔라스가 제압한다. 이 모습이 바로 피렌체를 위기에서 구한 로렌초 데 메디치라는 해석이다.

▲ 보티첼리의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로렌초는 1469년부터 1492년까지 실질적으로 피렌체를 통치하면서 그곳에 르네상스 문명을 활짝 꽃피운 일등 공신이다. 로렌초의 후원 덕분에 미켈란젤로가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 이외에도 보티첼로와 라파엘로의 스승인 피에트로 페루지노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를 후원했다. 그가 페루지노를 로마로 파견했다. 그래서 성 베드로 성당 옆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화인 <성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가 완성됐다.

로마행 기차를 탈 시간이 다가와 원조 다비드상이 있는 아카데미아 갤러리와 근처 피렌체 대성당(Duomo di Firenze)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또 아무리 시간이 없다하더라도 니콜로 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에 위치한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 언덕을 올랐어야 했다. 언젠가는 피렌체에 다시 와서 이곳을 호젓이 둘러보리라.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