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국제교육관 10층. ‘North Korea Class’라고 써 붙인 강의실 앞에 섰다. 문을 열자 영어토론이 한창이었다. 누군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칠판을 보니 ‘북한에서 미디어 기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된다면(When various media devices became commonly available in North Korea)’이라는 문장이 보였다. 이게 주제구나 싶었다.

토론이 끝나자, 교실 한편에서 묵묵히 듣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학생들의 눈동자와 고개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존 박(John S. Park) 선임연구원이다. 방학동안 이화여대에서 북한에 대해 강의한다.

존 박 선임연구원은 캐나다 교포다.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이민을 떠났다. 토론토대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땄다.

그는 미국에서 잘 알려진 대북제재 전문가다. 연구 분야는 핵 안보와 동북아 국제관계. 메사추세츠공대(MIT)에서 핵 안보 연구위원을 지냈고 미국평화연구소에서 동북아 트랙 1.5 프로젝트를 총괄했다.

다양한 연구경험 덕에 그를 찾는 곳이 많다. 미 국방부와 재무부는 동북아 정책에 대해 꾸준히 자문을 구했다.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CNN CNBC 등 미국 언론도 그의 논평과 논설에 주목한다.

지금은 케네디스쿨 코리아 프로젝트(Korea Project)의 총 책임자이자 벨퍼 센터에 있는 핵 관리 연구소의 겸임교수(Faculty Affiliate)다. 그러면서 하버드대의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가르친다.

프런티어저널리즘스쿨(FJS) 특강 이후인 7월 25일, 그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근처의 스타벅스에서 다시 만났다. 장소를 정하면서 기자에게 문자를 두 번 보냈다.

‘조선호텔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봅시다.’ ‘조선호텔 근처엔 스타벅스가 두 곳 있어요. 한화빌딩 맞은편에 있는 호텔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에서 만나요.’ 한국을 자주 찾는 듯 했다.

▲ 존 박 선임연구원

그가 한국과의 인연을 다시 잇기 시작한 시기는 1993년 여름이다. 토론토대에서 2학년을 마친 뒤였다. 연세대의 한국어 어학당에서 공부했다. “제 코리안 헤리티지를 접해보고 싶었어요.”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도 궁금했다. 북핵이 국제적인 문제로 부상하던 시기였다. 1993년 3월,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확산 금지조약’에서 탈퇴했고 1년 뒤 미국과 협상을 벌여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를 체결했다.

그는 이 당시를 “한국에 굉장히 역사적이고 격변의 시기(transformed period)였다”고 표현했다. 그에게 북한 문제는 복잡한 퍼즐처럼 보였다.

“그때 모든 사람이 북한도 곧 망할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살아 있잖아요. 북한은 계속해서 바뀌고 진화하고 적응하고 있어요.” 존 박 연구원은 이 복잡한 퍼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공부하던 유럽의 국제관계는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다.

미국 금융권 출신의 대북제재 전문가. 한국 언론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북한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전에 금융권에서 일한 경력 때문이다. 그는 박사과정을 마치고 2000년대 초부터 보스턴컨설팅 그룹에서 근무했다. 뉴욕의 골드먼삭스 기업인수 자문그룹에서도 일했다.

보스턴 컨설팅그룹에 있을 때는 서울지사에서 근무했다. 한국이 외환위기 여파로 어수선하던 때였다. 당시 서울에서 일한 건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라고 전했다. “금융 위기 전에 한국은행은 굉장히 닫혀 있었어요. 그런데 위기를 겪고 나서 갑자기 확 열리기 시작했죠.”
 
금융권 경험은 연구에 도움이 됐다. “계획한 건 아니에요. (웃음) 하지만 의미가 있고 도움이 된 경험이에요.”

3년 전, 존 박 연구원은 MIT 연구원 짐 월시(Jim Walsh)와 함께 논문을 냈다. 제목은 ‘북한 멈추기(Stopping North Korea, Inc.: Sanctions Effectiveness and Unintended Consequences)’다. 북한이 국제사회 제재로부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아내고자 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존 박 연구원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2016년 3월 10일자)에 담겼다. 두 연구원은 북한의 비즈니스 방식, 경로 그리고 파트너를 분석해 정리했다. 북한의 무역회사에서 일했던 탈북자 40명을 인터뷰했다.

그렇게 해서 당국의 허가를 받은 북한의 주식회사를 발견했다. 이들 회사는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중국으로부터 사들이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자 중국 상업의 중심지에서 아예 사업을 시작했다. 북한에 대한 제재가 계속 강해지던 시기였다.

중국의 개인회사들은 강해지는 대북제재를 감수해서라도 북한에 물품을 보냈다. 북한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어서다. 강도 높은 제재가 오히려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 부품을 사들일 능력을 키웠다고 연구팀은 결론을 내렸다.

“북한을 연구할 때 편견을 갖게 되면 많은 걸 놓치게 돼있어요.” 존 박 연구원이  ‘North Korea Class’에서도 강조했던 말이다. 지금 관심을 두는 연구분야는 북한의 사이버 산업이라며 말을 이었다.

“학생들이 오해를 하는 게 있어요. 북한은 뒤쳐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나사에서 공개한 인공위성 사진 때문이죠. 밤에 찍힌 인공위성 사진을 보면 북한은 어두워요. 평양에만 조금 빛이 보이죠. 그것 때문에 북한을 굉장히 약한 나라라고 봐요.”

▲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한반도(출처=NASA 홈페이지)

북한현실은 우리가 아는 점과 다르다고 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잡았다. 중국의 최대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Huawei)가 북한에 들어간 덕분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화웨이가 8년간 북한의 3G 무선 네트워크 구축을 도왔다고 7월에 보도했다.

존 박 연구원은 “핀테크(Fin-tech)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이 발견됐다”고 했다. 핀테크는 우리나라에선 구글 월렛(Google wallet)과 삼성 페이(Samsung pay)가 대표적이다. 북한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더 객관적일 필요가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My identity is 짬뽕(제 정체성은 짬뽕이에요).” 존 박 연구원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국의 뿌리를 가진, 미국에 사는, 캐나다 국민 그리고 아시아 전문가인 배경을 떠올리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한국 어학당에서 공부한 건 눈이 번쩍 떠지는(eye-opening) 경험이었다고 했다. 어학당에 와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그전엔 한국을 한반도 그 자체로만 인식했다.

“거기서 독일, 호주, 일본, 스웨덴 교포를 만났어요. 해외로 뻗어나간 한국인을 만나고 나서 ‘와 한국의 헤리티지, 한국어는 굉장히 세계적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한류열풍이 불기도 전이었죠.”

존 박 연구원은 1993년 한국에서의 여름을 떠올렸다. 교포 친구를 만난 건 혁신(a revolution)이었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으니 한국에서 맺은 인연이야말로 그가 찾던 헤리티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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