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 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옷로비 사건은 우리에게 대한민국에서 장관부인으로 살아가려면, 디자이너로 살아가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의 공직 생활에 누가 될까 28년간 하던 약국을 그만 둔 장관부인, '디자인만 있으면' 1시간 내에 뭐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동대문 시장 디자이너. 이들의 얘기는 옷로비 당사자들의 행태와 맞물려 미담기사가 돼 버렸다.

1시간이면 뭐든 만들어 낼 수 있다. 디자인만 있으면. 프라다, 샤넬, 구찌... 이들에겐 두려울 게 없다. "아예 옷을 근으로 다시죠"라고 말하던 한 패션지 편집장의 글이 떠오른다.

가짜를 입은 것도 죄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디자이너는 이중적인 이미지다. 화려하고, 창의적이고, 자유롭다는 이유로 청소년들이 되고 싶은 직업 1위로 뽑히는가 하면, 드라마에서는 사치스럽고 요란하고 때로는 교활하게까지 그려지기도 한다. 남자 디자이너의 경우 대부분은 중성적으로 묘사된다.

동성 연애자도 아니면서 사치스럽지도 요란하지도 않은 디자이너가 있다. 패션쇼장에는 교복 입은 여고생들이 몰려와 환호하는 남자-다섯살 난 아들을 둔 유부남임에도 불구하고- 송지오(38)가 그 주인공이다.

수 차례 패션쇼를 열고 고급 패션지마다 매달 등장하는 유명 디자이너이기에 그의 숍을 찾기 전 꽤 긴장을 했었다. 어떤 옷을 입고 가야 주눅 들지 않을까. 고급차를 끌고 가야 화려한 가게 앞에서 당당하지 않을까. 남산의 화려한 옷가게들을 상상했던 나는 압구정동 뒷골목의 작은 가게를 보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ZIO&ZIA라는 상호의 옷가게는 부인 이지아(34)씨와 함께 작업하는 곳이다. 붉은 벽의 실내에 검정톤의 정형화된 남성용 정장과 화려한 색상의 여성복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남자가 봤을 때 여성적인 옷을 디자인합니다. 아이디어를 복식사에서 많이 따와요. 그러다 보니 화려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이 많죠. 대신 남자옷은 클래식하게 갑니다." 
자신의 성격을 터프하다고 말하는 그는 터프한 남자들이 대개 그러하듯 '여성다운' 옷을 좋아한다. 몸에 꽉 끼는 소재에 과다한 노출. 그래서 송지오에겐 유행이 없다. 
"무슨 풍, 스타일이란 게 있죠. 파리 컬렉션에서 어떤 풍이 유행이다 싶으면 우리나라의 모든 디자이너들이 그 스타일을 따라갑니다. 유행이 아니라 카피의 수준까지요."

카피 얘기가 나오자 흥분하며 말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라는 말이 있죠. 그러나 창의적인 것은 있습니다. 파리 피카소 박물관에 가 보면 피카소의 습작들이 전시되어 있어요.  유명 화가의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린 것들이죠.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변형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무도 피카소 더러 카피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감을 얻고 합성을 해서 창작한 것은 상을 받고 창작자에게 대가라는 소리를 듣게 합니다. 그러나 잘 팔기 위해 베낀 것은 범죄가 되죠."

"파리 컬렉션이 끝나기 전까지 손 놓고 있는 디자이너들이 많아요. 출장 가서 샘플 사다가 만들고, 사진 구해다 가위질만 해서 만들고. 카피도 장르별로 합니다. 유행을 선도한다는 업체가 대부분 그래요. 그래 놓고 가격은 진짜만큼 받죠."
'카피'라는 얘기에 이태원표 디자이너들을 말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잘 나가는 '부띠끄' 디자이너들이 카피라니.

"대한민국 국민 중 범죄자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집집마다 가짜 샤넬백, 프라다백 하나씩은 있죠. 이거 예쁘다라는 칭찬에 씩 웃으며 '사실은 가짜야'라고 말하는 현대여성들은 자기도 모르게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중년의 한국 여성이 샤넬 옷을 입고 당당히 파리공항을 빠져 나가는데 세관원이 붙잡았다. 영문을 몰라하는 그녀에게 세관원은 "가짜를 입은 것도 죄입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엔 문화가 없습니다. 문화인만 있죠. 다들 고학력에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문화인들이요. IMF는 우리 사회가 경제만 거품이 아니라 의식구조도 거품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계기가 됐습니다. 빵 문제가  해결되면 정신개혁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패션 범죄 코리아

누구보다 IMF를 혹독하게 겪었던 디자이너가 송지오다. 96년 한창 거품경제로 치달을 때 대기업은 너도나도 패션산업에 뛰어 들었다. '세계최고주의'를 외치며 고부가가치 산업인 패션에 관심을 가졌다. 일본 기업을 벤치마킹해 젊고 유능한 디자이너들을 기업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송지오도 그 때 LG패션 OMSK의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됐다. 
"처음 OMSK에 들어 갔을 때 적자가 40~50억에 달해 있었어요. 1년간 너무나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디자이너들 스타일화 그리는 것부터 가르치면서 말이죠. 처음 두 시즌엔 별로 성과가 없었지만 세번째 F/W(가을/겨울)시즌부터는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처음부터 외국 옷 베껴다 만들었으면 훨씬 빨리 흑자로 돌아섰을 거예요.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네번째 시즌부터는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다 IMF가 터지고 그룹측에서 패션부문을 접으라는 얘기가 떨어졌다. 장사가 되는 남성복(로얄티를 지불하는 닥스)만 빼고.

"알렉산더 맥퀸, 핼무트 랭 같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키워낸 곳이 바로 일본 패션 회사들입니다.  그들을 벤치마킹 했던 게 우리나라 대기업이었고요."
디자이너가 창작만 해야 하나 장사도 해야 하나의 판단은 어려운 문제다. 그와 늘 비교되는 젊은 남자 디자이너를 그는 '장사꾼'이라 말하며 비교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대기업이 디자이너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해주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디자이너가 직접 판매도 담당해야 하는 구조다. 그런 면에서 송지오를 성공한 디자이너로 판단하는 것을 유보하는 사람들이 있다.

"송지오 선생님은 매우 학구적인 분입니다. 아주 크리에이티브한 분이죠. 그 분의 패션은 한국과 같은 상황에선 매우 힘든 조건입니다." 송지오와 잘 아는 사이인 <하퍼스 바자> 정현선 편집장은 말한다.

한국적 상황이 송지오를 힘들게 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93년 1월 부인과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지오 에 지아>를 설립해 활동하던 송지오는 94년 겨울 신성통상에서 같은 이름의 영 캐주얼 브랜드 '지오지아'를 런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브랜드 네임을 지은 곳은 '인터패션플래닝'이라는 패션 정보회사였다.  95년 1월 5일 등록을 했지만 이미 이틀 전 신성통상측에서 특허 등록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벌써 4년째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태지만 재판의 승패 결과를 떠나 피해를 보는 건 송지오 뿐이다.
"순천에 있는 팬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제 쇼를 보고 감동 받아 옷을 구입했다구요. 제 숍은 압구정동에만 있는데….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송지오는 유명한데 <지오 에 지아>는 그럴 수 없었다. 패션쇼를 열어도 '송지오'라는 이름으로만 열어야 했다. 디자인을 카피하는 상황을 뛰어 넘어 디자이너의 이름까지 카피하는 상황이다. '패션 코리아'가 아니라 '패션 범죄 코리아'로 구호가 바뀌어야 할 판이다. 

인터뷰 내내 아빠 곁을 맴돌던 다섯 살 난 아들 재우가 눈에 띄었다. "우리 아이도 디자이너가 됐으면 좋겠어요. 디자이너는 참 인간적인 직업이에요. 나는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내 능력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요. 다음 세대까지 승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하루에도 몇 개의 가게가 새로 생겼다 없어지는 이대 앞에는 30년간 그 자리를 지키는 곳이 있다. 가게 이름은 부부상회. 부부가 동업을 하면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속설을 증명하는 곳이 압구정동 한 켠 에도 자리하기를 바란다.

박내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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