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의 로마 관광여행 칼럼을 싣는다. 제 1편은 로마 여행의 의미와 느낌을 서술했다. 제 2편은 콜로세움과 교황청 이야기, 제 3편은 로마에서 기차로 두 시간 남짓 떨어진 르네상스의 발원지 피렌체에 대한 여행기를 다룬다. <편집자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영어로는 ‘All roads lead to Rome’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인가. 이 말에 담긴 의미를 로마를 보고나서야 실감했다. 로마의 영어식 표현은 Rome이지만 이탈리어로는 Roma이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비슷하게 천년 제국을 이룩한 로마를 모르고는 서양문화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경주를 몰라도 오늘의 한국을 대충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인구 100만 정도가 거주했던 자그마한 도시인 로마를 몰라도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마 관광을 정년 뒤로 미뤘던 이유였다. 로마를 보고난 후로는 이제야 찾아 간 것이 후회막급이다. 아직 보지 못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로마 여행을 권장한다.

▲ 석양의 콜로세움

대학 졸업 후 13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세계의 중심은 당연히 미국이라 여겼다. 국제 경제도시인 뉴욕과 세계 정치의 무대인 워싱턴 DC를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았다.

그래도 추억 속 미국 관광의 백미는 역시 서부의 3대 국립공원인 그랜드 캐니언, 요세미트, 그리고 옐로스톤이다. 1984년 겨울 새벽에 하얗게 눈 덮인 옐로스톤에 총각 4명이 도착했다. 차안에서 본 옐로스톤의 자태는 ‘억년 비정의 장엄함’ 그 자체였다.

그 후로 그랜드 캐니언과 요세미티 그리고 옐로스톤을 두세 번 더 방문했지만 당시처럼 압도 되지는 않았다. 여행이나 관광에서는 감동을 받는 당시의 심리상태가 중요한 모양이다.

아들 연석의 졸업기념으로 미국의 3대 국립공원보다 풍경이 더 좋다는 캐나다의 록키산맥을 찾았다. 연석이는 첫째 날 록키의 풍광과 에메랄드 색 호수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하지만 다음 날 부터는 계속 이어폰만 끼더니 드디어 불만을 터트렸다. “아빠 비슷한 산이나 호수를 며칠씩이나 볼 필요가 있어요.” 내심 충격이었다. 사실 이 산이나 저 산, 이 호수나 저 호수의 모습이 그렇게 큰 차이는 없었다.

이후로는 “이제 세상에는 더 볼 게 없나”하는 회의적 생각이 들기도 해서 자연이나 풍광 관광이 시큰둥해졌다. 그 후 일본의 잘 정돈된 정원과 중국의 기묘한 풍광을 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광에 대한 이런 생각이 오스트리아에서 바뀌었다. 2006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국제커뮤니케이션학회(ICA)에 참석했다가 프라하와 부다페스트를 거쳐 빈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곳에서 쇤브룬 궁전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아시아나 미국과는 다른 유럽이란 또 다른 문화권이 존재함을 확인했다.

로마 공화정의 영웅은 시저,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에스파냐 사령관으로 귀국해 삼두정치로 로마제국을 형성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손을 잡고 지금의 중동인 소아시아를 정복했을 때 시저가 로마에 보낸 승전고는 단 세 마디였다고 한다. 베니, 비디, 비치(Veni, Vidi, Vici), 우리 말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이다. (이원복, 새 먼나라 이웃나라- 제 6권 이탈리아, 150쪽)

이 세 마디를 여행에 적용하면 “왔노라, 보았노라, 깨달았노라”가 되겠다. 여행지에 직접 가서 보고 느끼고 깨닫게 됨이 현대관광의 의미이다.

지난 7월 12일, 오후 3시경 로마공항에 혼자 도착해 16일에 떠났다. 꿈같은 4박 5일이었다. 로마의 첫 인상은 그저 그랬다. 1주일 앞서 국제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회(IAMCR) 발표 차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하자마자 동료교수가 가방을 통째로 들치기 당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마드리드보다 소매치기가 더 많다고 들었다. 과연 이탈리아에 들어온 상태로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을까?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피우미치노) 공항에서 직행 고속열차를 타고 테르미니(Termini)로 불리는 로마역에 도착했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로마시의 사방팔방이 테르미니를 중심으로 엮여있다.

걸어서 숙소에 도착한 후 우선적으로 여권과 지갑과 카드와 현금을 분리했다. 호텔 방의 안전 금고에 여권과 카드와 귀중품을 넣었다. 저녁을 먹고 반바지 차림으로 핸드폰과 명함을 챙겼다. 카드 하나와 20유로와 2유로짜리 동전 다섯 개를 들고 로마의 밤 구경에 나섰다.

로마는 피우메 테베레(Fiume Tevere)를 사이에 두고 강동과 강서로 나누어진다. 마치 서울이 한강을 두고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어진 형세와 비슷하다. 로마를 관통하는 피우메 테베레는 길이가 406㎞로 이탈리아에서는 세 번째 긴 강이다.

장화모양의 이탈리아반도는 척추처럼 남북으로 아펜니노 산맥이 뻗쳐있다. 반도가 이 산맥으로 동서로 나뉜다. 테베레강은 반도의 중부에서 시작해 아펜니노 산맥과 나란히 남쪽으로 흐르다가 지중해로 들어간다. 로마는 테베레 강의 하류에 위치한다. (이원복, 새 먼나라 이웃나라- 제 6권 이탈리아, 37쪽)

구글에 따르면 로마의 넓이는 서울의 2.5배 정도, 근교 생활권까지 합쳐서 300만 명 정도가 거주한다. 하지만 내가 본 로마는 용산구보다도 작은 지역으로 로마역에서 바티칸까지 1시간 이내의 거리였다.

역사적으로 로마제국은 테베레강을 따라 형성됐다. 그런데 로마를 관통하는 테베레강의 폭은 ‘이솔라 티베리나(Isola Tiberina)’라는 삼각지를 연결하는 다리 폰테 체스티오(Ponte Cestio)와 폰테 파브리치오(Ponte Favricio)를 합쳐도, 반포대교 밑에 있는 잠수교의 5분의 1 수준이다.

▲ 테베레강의 이솔라 티베리나

이탈리아어로 피우메는 강이고 이솔라는 섬이고 폰테는 다리이다. 한강의 세빛둥둥섬에 이솔라라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이탈리아어로 섬이라는 뜻이다. 체스티오와 파브리치오 다리가 기원전 62년과 27년 사이에 세워졌다.

2000년 이전에 세워졌는데 아직도 건재함에 놀랐다. 다리 아래의 하천 길은 마치 청계천 산책로를 연상케 한다. 야간 불빛이 휘황찬란하며 열대야를 식히려는 인파로 로마의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하는 중이다.

로마에서는 테베레강 동쪽이 다운타운으로 유적지의 대다수가 이곳에 있다. 넓이는 용산구 정도다. 서울역에서 걸어서 용산역을 거쳐 한강대교까지 1시간 이내에 이를 수 있듯이, 로마역인 테르미니에서 카보르 길(Via Cavour)를 따라 1.3㎞를 가면 포로 로마노(Foro Romano)가 나타난다. 바로 옆이 콜로세움이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 공회장이다. 로마의 천년 역사가 이곳에 묻혀있다. 지금은 폐허 속에 신전 기둥과 주춧돌만 남았다. 그런데도 팔라티노 언덕에서 내려다보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

▲ 로마 공회장인 포로 로마노

로마는 기원전 700년 전 작은 도시국가로 시작해 지중해 전역과 문명의 기원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까지 합쳐서 서양문명의 중심지였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문명을 꽃피웠던 로마인처럼 나도 인간이란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마음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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