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은 2014년 개봉했다.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와 동료들은 독일에 파견돼 광산 갱도에서 석탄을 캔다. 아내 영자(김윤진 분) 역시 파독근로자다. 간호사로서 시체를 닦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수발을 든다.

독일에 파견된 근로자는 1963년부터 1977년까지 광부가 약 8000명, 간호사가 약 1만 명이다. 노동력이 부족한 국가에 인력을 제공해서 외화를 벌고 한국의 실업난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이국에서 힘들게 돈을 벌어 모국으로 송금했다.

이창근 씨는 1977년부터 1993년까지 광부로 근무했다. 일의 종류는 다양했다. 석탄 캐기, 굴을 뚫기, 자재운반하기, 석탄 나르는 기계를 감시하고 운전하기 등. 이 씨는 대부분의 일을 했다.

독일에 보낼 광부를 모집하면서 연령은 만 35세 이하로 했다. 심한 노동을 하기에는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장화를 신고 일하면 안에 땀이 차서, 장화를 벗어서 물을 쏟아내는 형편이었다. 한국 광산보다 더 깊어 지열이 심했다.”

일하지 않는 주말에는 동료들과 시간을 보냈다. 기숙사 밑에 내려가면 잔디가 깔려 있어 날씨가 좋을 날에는 맥주를 마시고 탁구를 쳤다. 고국 이야기도 많이 했다. 이들은 기숙사 밖이 아니라 안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움직이면 돈입니다. 대중교통이 한국보다 비싸고, 또 금방 갈 사람들이 차를 굴리면 더더욱 비싸고. 주어진 3년 동안 돈을 벌어서 와야 하니까 밖으로 많이 나가지 못했죠. 나가면 돈을 많이 써야 하니까.”

▲ 파독근로자기념관의 모습

근로자 대부분은 먹고살기 위해서 갔다. 한국 역시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였다. 이 씨는 외국에서 벌어서 보낸 돈이 경제성장에 작은 마중물이 됐다면, 또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많다면 만족한다고 했다.

“이젠 한국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많지 않나. 예전 우리나라 부모도 외국에 노동자로 갔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 갑질하지 말고 인간적으로 잘 대해줬으면 좋겠다.”

이 씨는 계약기간 3년을 마치고도 계속 독일에 남아 일했다. 그곳에서 아내 황규숙 씨를 만났다. 황 씨도 1971년부터 25년 동안 간호조무사로 독일에서 근무했다. 두 사람은 1980년대 초에 만나 결혼했고, 2007년 귀국할 때까지 독일에서 살았다.

황 씨가 일한 곳은 병상 140개의 작은 병원이다. 한국인 간호사 4명이 있었다. 처음에는 환자의 몸을 씻기는 일을 했다. 젖은 수건 2개와 마른 수건 2개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기고 닦았다.

45~46kg의 간호사가 70~80kg의 환자를 다루기는 쉽지 않았다. 물리치료나 약을 나눠 주는 일도 했고, 조금 익숙해진 후에는 주사도 놓았다.

“한국 간호사들이 손이 빠르고 눈치도 빨랐다”고 황 씨는 말했다. 의사와 사이가 좋고 대처 능력이 좋아 많은 한국 간호사가 수술실에서 일했다고 한다.

문화차이로 인한 갈등은 어쩔 수 없었다. 독일어를 잘 모르니 동료끼리 농담을 하는데 같이 웃지 못해 미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도와줬다고 한다.

“주말이면 어딘가로 데리고 나가 구경시켜 줬다. 또 우리가 음식을 잘 못 먹으니까, 먹을 수 있는 통닭 같은 음식을 기억했다가 같이 먹어 줬다.”

가져온 음식이 동난 어느 날, 식당에서 까만 물을 접했다. ‘마기’라는, 간장과 비슷한 독일음식이었다. 나중에 슈퍼에서 찾았는데 너무 비싸 사지 못했다. 그래서 소금물을 끓여 가라앉혀서 마기를 조금 타고, 파를 넣고 삶아서 간장을 만들어 먹었다. 힘들었던 타지 생활이지만 황 씨에게 독일에서의 시간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람이 살고 나면 어려운 일도 아픔으로 남지 않아요. 왜냐면 그 안에 아팠던 것도 다 ‘나’라는 것이 형성되기 위한 작은 세포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슬프거나, 아프거나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정말 고맙죠. 한국에 있었으면 돈이 없어서 나를 간호학교에 못 보냈을 텐데, 거기선 자립으로 내가 할 수 있고. 또, 다른 나라의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근사한 일인 것 같아요. 잘 하든 못 하든 간에.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일이 더 많잖아요.”

파독근로자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파독광부기념관이 4월 30일 강원 태백시에 생겼다. 이창근 씨가 기념관에서 해설사로 근무한다.

기념관은 철암탄광역사촌 내부, 구 태백농협 철암지소 1층에 조성됐다. 태백시 탄광유산관리사업소의 김명희 계장은 “파독 광부, 간호사의 삶의 역사를 기억하는 기념관을 조성하여 지역의 문화가치 향상과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기념관을 개관하게 됐다”고 밝혔다.

▲ 파독광부기념관의 안내문

기자는 5월 25일 기념관을 찾았다. 토요일 오후라서 조용했다. 내부에는 역사자료와 당시 근로자의 생활용품과 서류를 전시했다.

‘한국광부 파견에 관한 한-독 협정서’가 1963년 12월 16일 체결됐다. 이에 따라 광부를 모집해서 독일로 파견했다. 월급은 평균 650~950 마르크(당시 한화 13만~19만 원)였다. 당시 국내 직장인 평균월급의 8배 정도였다.

1차로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 명이 넘게 몰렸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뽑힌 파독근로자들은 타지에서 힘들게 외화를 벌었다. 1966년 이들이 송금한 금액은 한국 수출액의 2% 정도였다. 기념관은 이런 역사를 담았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기념관을 한 바퀴 돌았다. 중앙에 한쪽 벽이 뚫린 방이 있었다. 파독광부 명단이 보였다. 해설사 김기복 씨는 “주말에는 90명에서 100명까지 오고, 평일에는 관광 차량이 오면 40~50명이 방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기념관처럼 파독근로자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활동이 꾸준히 추진됐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원은 미흡한 수준이다.

‘파독 광부·간호사에 대한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2017년 11월 발의됐다. 국가의 도움, 기념사업 수행 및 지원을 담았다. 이우연 한국파독연합회 회장은 “법안은 지난 3월 19일 소위원회에 상정됐지만 여전히 심의대기 상태”라고 밝혔다.

이 회장은 1977년부터 3년 동안 독일에서 근무했다. 정부의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파독근로자의 헌신을 인정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은 없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법안이 빨리 통과돼서 근로자 명예를 회복시키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국가가 발송한 사람들, 긍지를 가지고 독일로 간 사람들이다. 모든 국민이 지금의 부(富) 뒤에는 피눈물 나게 고생한 사람이 있음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역사가 사라지기 전에, 죽기 전에 반드시 이걸 해 놔야 되겠다는 각오가 있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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