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2일 김대중 대통령의 대 국민 사과로 내각제 개헌 논란이 막을 내렸다. 현재로선 개헌 유보든 포기든 간에 일단 그 불씨가 소각된 상태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한 숨 돌리기에 앞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다. 개헌이 되려면 국회 통과를 거친다 해도 국민 투표 과정을 거쳐야 할텐데 과연 우리 국민들은 내각제 개헌 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걸까? 내각제니 이원 집정부제니 하는 것들은 지금의 대통령제와 어떻게 다른 걸까? 97년 대선을 전후해 내각제 얘기가 계속 있어 온 건 알겠는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그저 막연할 뿐이다.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배운 얄팍한 지식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달 DEW는 내각제 개헌논의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것이고 그 내용이 무언지에 대해 되짚어 보고자 한다.

'DJP 합의문'의 태생적 배경 - 15대 총선

그 시발은 96년 4·11 총선 결과로부터 시작된다. 3당합당으로 YS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나 결국 민자당 내에서의 '설움'을 견디지 못하고 탈당한 JP는 95년 초, 스스로 자민련을 창당한다. 그 해 정국은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과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 등으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JP의 '5·18 특별법 위헌' 발언은 얼핏 보기에 대세를 거스르는 듯 보였으나 그것은 소수의 국회의원들, 당시 정국에 불만을 품은 일부 지역 및 보수 진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렇게 보수 진영에 대한 행보를 계속하는 동시에 그는 전직 대통령의 부패를 "대통령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된 현행 대통령 중심제의 폐해"라고 지적하면서 내각제 개헌을 계속해서 주장해 나간다. 이 시기 이른바 '청산 정국'을 이용하여 당의 세 불리기에 성공한 자민련은 96년 4·11총선에서 전국구 50석 확보라는 '선전'을 이루어낸다.

이에 반해 DJ는 95년 6·27 지방자치제 선거 전까지만 해도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조건부 내각제 수용의사를 밝혔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민자당이 승리를 거두고 '대선 자력 우승'의 가능성이 엿보이자 곧 대통령제 고수로 돌아선다. 그는 총선 기간 내내 '여권의 내각제 개헌음모설'을 주장하며 100석의 개헌 저지선 확보를 외친다. "우리 당이 3분의 1 이상 의석을 얻지 못하면 즉각 내각제 개헌 논의가 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뽑을 기회를 잃게 됩니다."(뉴스 피플 96년 2월 16일자) 그러나 총선은 신한국당이 과반수에 가까운 안정의석을 확보한 반면 국민회의는 상당 수 중진의원들이 몰락하는 등(79석 확보) 최악의 결과로 막을 내린다. 특히 역대 선거 사상 처음으로 수도권에서 제 1당의 위치를 여당에게 넘겨준 것은 그에게 큰 타격이 된다. 최악의 경우 30년 정치생활을 청산, 2선으로 퇴진해야 한다는 극한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 DJ의 정치 행보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추측들이 제기된다. 그 중 JP와의 연합을 통해 15대 국회 내에서 내각제 개헌을 시도할 가능성과 DJ가 직접 다음 해 대선에 재도전해 정면 돌파를 시도할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것이었다. 전자는 '대통령제 고수'라는 국민회의의 15대 총선 선거 공약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는 결국 두 번 째 가능성을 택한다. 그 수단으로 JP와의 연계를 통해 충청 및 대구 경북(TK) 지역과 보수 진영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미 신한국당이 총선을 통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놓지 않게 됨으로써 양김의 입지는 좁아진 상황이었다. 그들은 '양김 퇴진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필요할 때까지 '대여 공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대선 때까지 대여공세를 강화해 나간다. 96년 11월 1일 자민련 김용환 사무 총장과의 '목동 비밀 회동'에서 DJ는 자민련의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수용한다. '대통령 자리만 빼고 다 주면 될 것 아니냐'는  DJ 측근들의 얘기와 '임기 5년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교·통일·정책 결정권한만 갖고 국군 통수권을 비롯한 국정전반의 실권은 총리가 대행한다'는 자민련의 '내각 책임제 개헌안'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이후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곧바로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는 JP의 입장과 DJ간에 혼선이 있었지만, 97년 11월 3일 드디어 이 둘의 내각제 시나리오는 가시화된다. 이른바 'DJP 합의문'이라 불리워지는 이 합의문에서 둘은 99년 12월 말까지 개헌을 완료키로 하고 이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다. 2년 3개월의 대통령이라도 불사하겠다는 DJ의 대권에 대한 집념은 그 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를 이루어 낸다. 


왜 내각제인가

내각제하에서는 우선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뽑는다. 선거 과정에서 국민들은 정당의 정책 공약이나 능력있는 지도자를 수상으로 뽑겠다는 정당에 투표를 한다. 그러면 다수의 의석을 차지한 정당에서 수상을 뽑아 정권을 맡긴다. 이렇게 해서 수상과 다수당에서 선출된 장관들을 중심으로 국정이 이루어 진다. 이 과정에서 수상은 국회의 신임을 기반으로 하고 만일 불신임을 얻을 경우 축출당할 수 있기 때문에 의회를 통한 행정의 견제가 가능하다. 다수당은 국민의 신임을 잃을 경우 다음 선거 때 소수당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를 최대한 수용하려고 노력한다.

이런 내각제하에서는 한 정당 내에 잠재적 '지도자들'이 나타날 수 있다. 다당제 정당체계하에서는 모든 주요 정당의 지도자들이 총리나 내각의 주요 지위에 오를 수 있다. 따라서 국가 지도자를 꿈꾸며 의회에 진출하려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지게 된다. 이들은 원내 토론 과정에서 혹은 공공활동을 통해 명성을 쌓아 간다. 때문에 선거 기간이 아니라도 지도자가 될 잠재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대중 앞에 나타나게 된다.

이에 비해 대통령제하에서는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아 놓으면 그가 일정 임기가 다 할 때까지 국정을 총괄하게 된다. 한 마디로 일인 중심 체제다. 물론 의회 역시 국민 투표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지만 이들은 내각제와 같은 불신임 투표권을 갖지 못한다. 대통령은 행정부 권력의 소유자이면서 국가의 상징적 수반이고 탄핵을 당하지 않는 한 다음 선거 때까지 쫓겨나지 않는다.

이런 대통령제 아래에서는 대통령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일부 관료집단이나 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국정을 수행하기 쉽다. 내각 구성도 대통령이 지명권을 갖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의정활동을 통해서 보다는 개인적으로 대통령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또 대통령과 정당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경우 대통령은 비정당 인사 중 전문가 출신을 내각에 영입한다. 이런 경우 의회는 내각에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떤 이들은 총리가 빈번히 교체될 수 있는 내각제보다 행정부의 안정성을 보장 받는 대통령제가 더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엔 임기 동안 어떤 상황의 변화로 정부가 위기에 빠지더라도 대통령이 바뀔 수 없다는 데 가장 큰 맹점이 있다. 97년 한보 사태, 김현철 비리 의혹 등으로 한총련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 하야설이 불거져 나왔다. 이 때 자민련 뿐 아니라 신한국당 내에서도 개헌에 대한 물밑 교섭이 이뤄질 정도로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대통령의 '임기 내 개헌 불가'입장 고수로 모든 논의는 일축되고 말았다.

왜 99년 12월 말 개헌, 2년 3개월의 대통령인가

DJ로서는 내각제를 추진할 경우 대권에 도전할 기회를 잃게 될 상황이었다. 총선의 결과는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권을 포기할 만큼 절망적인 것도 아니었다. JP 역시 어차피 2인자를 노릴 바엔 내각제가 그 해에 YS 정권 내 이루어지든 아니든 별 상관이 없었다. 당시는 대통령의 '개헌 불가'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내각제 개헌은 거의 원천 봉쇄된 상태였다. 헌법상 개헌 제안은 재적의원 과반수 동의 혹은 대통령의 발의로 가능하도록(제 128조) 돼 있고 헌법안 통과에는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제 130조)이 있어야 한다. 당시 신한국당(157명)과 국민회의(78명)의원 85% 이상이 찬성하거나 신한국당과 자민련 의원 전원이 찬성해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또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원 전원이 찬성하더라도 신한국당 의원 가운데 75명이 동참해야 했다. 시기의 촉박함도 문제였다. 현행 헌법상 헌법 개정은 최소 50일, 최대 1백 10일까지 걸린다는 것과 대선 이전까지 개헌을 완료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소한 그 해 8월까지는 개헌 합의가 필요했다. 국민투표에 부쳐질 경우 국민이 받아들일 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험준한 과정을 거친다 해도 자민련 내의 TK세력이 신한국당과 연합해 다수당을 형성하게 되면 내각 구성에 있어 주도권을 뺏기게 될 거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앞서도 얘기했듯 국민회의는 이미 96년 15대 총선 공약으로 '대통령제 고수'를 내 놓은 상태였다. 때문에 선거 공약을 저버리면서까지 당책을 바꿀 수 없다는게 DJ가 내세운 이유였다(작금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전혀 설득력 없는 이유였지만). 이상의 이유로 99년 9월 정기 국회가 개회하면 개헌을 단행, 2000년 4월 16일 16대 국회가 들어설 때까지 대통령직을 고수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지난 4년간 가장 많이 회자돼 온 두 모델 - 순수 내각제와 이원 집정제
 
내각제 개헌 논의가 시작된 이래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한 꾸준한 공방 역시 있어 왔다. 오늘날에는 내각제, 대통령제라는 이원적 구별을 내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형태의 정치체제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현 시점까지 가장 많이 거론돼 온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모델이다.

1. 순수 내각제
일반적으로 의회가 최고의 권력을 갖는 것을 '순수 내각제'라고 보면 된다. 정치학에서는 집단 통치 행정부가 의회의 신임에 의존하고 행정부가 의회에 의해 선출되는 체제를 순수 내각제로 분류한다. 이런 내각제하에서는 내각을 성립시키고 지속하는 일, 의회에서의 교착 상태를 극소화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통일 독일의 경우처럼 상징적인 국가 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되, 외무·내무 등 국정 전반은 총리의 책임하에 들어 간다. 총리가 의회 해산권을 갖는 것은 물론이다. 97년 11월 당시 양당이 합의한 '대통령을 국회에서 간접선출하고 수상이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순수 내각제'가 바로 이것이다. 자민련은 여전히 순수 내각제를 주장하고 있지만 이 경우 DJ가 모든 실권을 포기하는 형태가 된다. 대부분의 서유럽 민주 국가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인도, 자메이카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2. 이원 집정제
이원 집정제는 국민들에 의해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선출된 대통령과 의회의 신임을 기반으로 한 총리가 함께 통치하는 체제이다. 이 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고-비록 총리는 의회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만-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기 위해서는 총리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만 대통령이 총리 임명권을 가지기 때문에 대통령의 권한은 총리 위에 있게 된다. 실제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은 독일 제국의회를 해산할 수 있는 권력과 동시에 그 해산에 동의할 총리를 임명하는 자유를 누렸다. 이 안을 실시할 경우 외교·국방·통일은 DJ가 내무와 경제 등은 JP가 맡게 된다. 때문에 97년 합의 때 DJ는 끝까지 이원 집정제를 희망했다고 한다. 현재 프랑스에서도 이 제도를 취하고 있는데 민선 대통령이 행정부 수장 지위와 삼권 통합 조정권을 갖고 행정부 권한 일부를 대통령과 총리가 분할한다. 또 총리와 각료에 대한 하원의 불신임권을 인정하고 있다.

내각제가 안 되는 이유
 
제도 상의 여러 장점을 가졌음에도 내각제 개헌론이 그렇게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97년 4월 뉴스 플러스에서 정치학 교수 101명을 상대로 벌인 여론조사에서도 71%가 '내각제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그들은 남북분단 상황에서의 정치 사회 불안, 국회 의원들의 자질 부족, 우리 정치 문화와의 이질성등을 꼽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내각제 논의의 배경 자체를 '정치 지분을 가진 사람들의 전략'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의 과정을 보면  6월 항쟁으로 절정에 달한 직선제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정치인들은 그들의 정치생명을 연장했다. 물론 그 때는 국민들이 직선제를 열망했었고 실제로 정치 행위자들의 선택에서 이것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이번 내각제 논의는 다르다. 97년 당시뿐 아니라 올 초 각 신문사들이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대다수 국민들은 내각제를 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에 응한 사람들이 내각제라는 제도를 알건 모르건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각제 등장 배경에 대한 의구심일 게다. 87년 때처럼 내각제 논의는 결국 기성의 정치권이 정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정략적 산물이었다. 그러나 그 태생이 어떻든 지금의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 공약으로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고 우리는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따라서 대통령의 개헌 유보 혹은 불가 발언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설사 국민투표에의해 저지당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국민의 의견에 귀기울이는 노력이라도 보였어야 했다. 


김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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