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깨알 크기의 자그마한 조각이 떨어진다. 길이와 두께가 가지각색인 도구가 보인다. 멈춘 심장을 살리기 위한 손놀림이다. 터럭 정도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

100개가 넘는 부품을 만지며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이 있다. 39년 경력의 시계 기술자 최광렬 씨(59). 그를 만나려고 서울 강남구 논현동 초이스명품시계를 찾았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시계수리 기능사 자격증을 2005년 폐지했다. 휴대폰이 시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한국시계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국내 시계 제조업체는 2002년 414개에서 2009년 208개로 줄었다.

최 씨는 이런 흐름 속에서 살아남았다. 수입시계의 시장이 커졌기 때문이다. 스위스시계산업협회(FHS)의 2018년 수출 동향에 따르면 한국 시계시장의 규모는 8억7850만 달러로 세계 11위다.
 
“어릴 적에 다리를 다쳤어요. 손재주는 좋은 편이었죠. 학교 다닐 때 자전거를 뜯어고칠 정도였으니까요. 집안 형편에 어려워서 기술을 배워야 했어요. 어느 날 형님이 시계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어른들 말로는 앉아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 시계기술자 최광렬 씨

스물한 살이 되던 1981년. 고향인 경기도 평택을 떠나 서울로 왔다. 남대문 한미시계학원에서 이론과 실기를 배웠다. 당시 학비는 15만 원이었다. 3개월 과정을 마치고 금은방에 들어갔다. 선배에게서 10년 정도 일하면 죽은 시계를 살리는 기사가 된다.

 
벽에 걸린 훈장과 상장이 최 씨의 도전을 보여준다. 취업을 하자마자 기능대회를 준비했다. 가게가 문을 닫은 뒤 새벽 2시까지 훈련을 했다. 부품 하나하나를 정밀히 깎는 선반작업부터 제한된 시간에 마치는 조립연습까지.

일부 부품의 크기는 0.2㎜. 미세한 부품과 씨름한 끝에 1983년 서울 대회에서 금메말을 받았다. 전국대회는 더 어려웠지만 네 번째 도전에서 1등을 했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했던 공부 덕분에 지금의 실력이 생긴 것 같다.”

이후 전국장애인대회 1등, 홍콩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 메달, 철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명예를 안긴 시계 수리기술 종목은 TV 수리 및 자수와 함께 사라졌다.

입상소식이 알려지자 명품 시계회사의 제의로 입사했다. 정통 스위스식 교육을 받도록 해 줬다. 그러나 어느 손님이 외환위기 때 “나가서 가게를 한번 차려 보라”고 권유하자 독립했다.

인터뷰를 하는데 ‘택배를 보내겠다’, ‘위치가 어디냐’, ‘이 시계를 고칠 수 있냐’는 문의전화가 이어졌다. 10여 년 전 잠실에서 맡긴 고객처럼 한 번 찾은 사람이 계속 부탁한다. 젊은 남성이 시계를 맡기며 말했다. “명품은 아닌데 집 근처 수리점이 여기 밖에 안 나왔어요.”

그가 확대경을 끼면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다. 개미 다리만한 나사 하나하나를 뽑아낸다. 혹여나 흩어지지 않을지 조심스럽다. 찰흙으로 먼지를 한 올 한 올 제거했다. 실 하나라도 잘못 남으면 시계는 망가진다. “처음 배우는 게 부품 찾기에요. 툭하면 날아가 버리니까요.”

▲ 최광렬 씨가 시계를 수리하는 모습

자석을 분리하는 탈자기, 방수기능을 확인하는 기계, 수십 개의 펀치, 초침의 허용오차를 확인하는 Q테스타6000이 작업대 뒤로 보인다. 색 바랜 도구가 시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시계는 기름으로 갑니다. 5년 정도 되면 그게 굳어요. 수명과 상태를 확인하려고 오버홀을 하죠.” 오버홀은 시계를 완전히 분해해서 점검하고 수리하는 일이다. 일종의 건강검진. 롤렉스는 기본이 30만 원이다.

시계 수만 개를 고치며 힘든 적은 없었을까. “시곗줄에 쌓인 때를 제거하면 가벼워져요. 손님을 위해 없앴는데 화를 냈어요. 바꿔치기했다는 거죠.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믿지 않았아요. 경찰서에 가셔야 손님이 사과했어요. 속상했죠.”
 
기자가 다른 날 들른 서울 서대문구 금은방 M 점포. 시계가 10개도 없었다. 가격대는 3만~4만 원. 요즘은 백화점을 제외하면 중저가 시계 파는 곳을 찾기가 어렵다.

“이제는 수리기술을 명품시계에 맞춰야 살아남아요. 금은방은 90% 이상 죽었죠.” 최 씨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 고급기술을 선택했다고 한다.

▲ 시계수리에 필요한 부품

동서울대 시계주얼리학과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시계수리를 가르친다. 졸업생 대부분이 명품 시계회사에 들어간다. 시계 기술자 자체는 사라지는 직업이 아니라고 이 학과의 조선형 교수가 말했다.

“국내 시계업체는 기술개발보다 디자인에 매달려서 경쟁력을 잃은 측면이 있어요.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으면서 고급 시계를 찾는 소비자가 늘었죠. 전문 인력이 오히려 필요한 상황입니다.”

자동화가 기술자 역할을 대체하지는 않을까. 실제로 오버홀을 하는 기계가 있다. 그러나 최 씨는 사람 손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자동화가 쉽지 않아요. 스위스 명품회사에서는 그래서 은퇴한 기술자를 재채용하기도 해요. 루트비옹 같은 시계는 제작에만 6개월이 걸려요. 이런 걸 고칠 사람은 많지 않죠.”
 
오늘도 최 씨의 손을 통해 시계가 살아난다. 그는 앞으로도 시계와 함께 할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면 좋겠어요. 인내력과 소질 있는 후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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