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2019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9%에 속한다. 국경없는기자회(RSF)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이런 정도만 언론자유가 있는 곳에서 산다. 지난해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언론자유지수(41위)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에 언론자유가 보장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긴급조치라는 이름으로 보도를 통제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권력의 입맛에 맞는 뉴스만 보도됐다.

하지만 누군가는 진실을 말하려 한다. 당시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지만 세월이 지나면 조금씩 드러나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자리 잡는다. 보도지침 폭로사건이 여기에 해당한다.

연극 <보도지침>은 실제 이야기를 재구성한 작품이다. 인물과 상황설정을 바꾸는 식으로 극적 재미를 시도했다.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주언 기자는 ‘김주혁’으로, 김종배 편집장은 ‘김정배’로, 이들을 변호했던 한승헌 변호사는 ‘황승욱’으로 나온다. 판사와 검사, 연극동아리 선배까지 6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대학에서 연극동아리를 함께했다. 세월이 흘러 모두가 무대에 오른다. 이번에는 연극이 아니라 재판을 위해서다.

언론과 연극 모두 당대를 정확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점에서 ‘시대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외부압력에 의해 왜곡된다. 보도지침 폭로로 재판을 받는 상황은 사회주의 작가의 작품을 연극에 올리지 못했던 대학 시절과 오버랩된다.
 
극은 두 개의 시공간을 오간다. 과거의 연극 동아리방과 현재 공방을 벌이는 법정. 무대는 극중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는 극장이자 논쟁이 펼쳐지는 광장이다.
 

▲ 연극 보도지침 무대

월간지 <말>은 월간지 <독백>으로 표현됐다. “연극에는 반드시 독백이 있다. 인물의 속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비추는 시간이다.” 대사처럼 연극의 독백은 할 말을 해야 하는 기자의 말과 닮았다.

극장 분위기는 무거웠다. 언론탄압이라는 주제가 어두운 조명 및 노래와 함께 5공 시절의 암울함을 느끼게 했다. 편집장 김정배는 이렇게 말한다. “제발 숨 좀 쉬게 해주십시오.”

취재진은 1990년대 생이다. 당시를 겪지 못했다. 연극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중장년 관객을 보며 궁금해졌다. 그 시대가. 당시 언론이.

1960~80년대는 명암이 뚜렷하다.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개발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과 자유는 희생되고 유보됐다.

언론자유를 위한 노력은 이런 상황에서 시작됐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를 열었다. 조선일보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참여한 기자 상당수가 해고당하고 처벌받았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이 출범하는 과정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과 언론 통폐합과 대량해직이 있었다. 모두가 숨죽였다. 언론 역시 그랬다. 암울했던 현실을 ‘보도지침’이 보여준다.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은 매일 아침 언론사로 팩스를 보냈다. 외형상으로는 ‘보도협조’를 위한 권고사항이었지만 사실은 지시와 강요였다. 어떤 사안을 어떤 방향, 어떤 내용으로 보도하라, 혹은 하지 말라고 했다. 기사 위치와 길이, 유형, 방향, 제목, 사진까지 정했다.

예를 들어 농촌이 파멸 직전이라는 기사는 보도가 절대 불가했다. 필리핀 민주화 운동 기사는 작게 보도하고 미국시각에서는 쓰지 못하게 했다. 경기 부천경찰서의 성고문 사건은 성고문이라는 단어를 빼고 부천서 사건으로 쓰게 했다. 언론의 편집권을 정부가 행사한 셈이다.

▲ 보도지침 사례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정남 전 교문사회수석비서관의 저서(민주화운동 30년의 여정, 진실 광장에 서다)에 따르면 민주화운동 대상 보도지침이 전체 688건 중 24.6%(169건)를 차지했다. 지시 유형별로는 보도 불가가 46.1%로 가장 많았다.

정부는 보도협조 권고사항이라고 했지만 김주언 기자는 “삭제, 왜곡, 첨삭, 축소 등을 지시하는 보도지침은 엠바고나 오프더레코드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며, 이는 협조가 아닌 강제지시”라고 재판에서 말했다.

보도지침은 지시적 어휘로 전달됐다. 어기면 정부기관이 나섰다. 문화관광부의 홍보정책실이나 국가안전기획부가 전화를 걸었다. 새벽 2시에 안기부 직원이 신문사를 찾는 등 압박을 가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아래 언협)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기자회견을 열고 보도지침을 폭로했다. 1986년 9월 9일이었다.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10개월간의 보도지침 전문(584개 항)을 제공하자 월간지 <말>이 특집호에 실었다.

검찰은 언협의 김태홍 의장과 신홍범 실행위원, 김주언 기자를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9년 만인 1995년 무죄판결을 내렸다.

▲ 보도지침 기자회견(출처=민주언론시민연합)

신홍범 위원은 모두진술에서 ‘인간이 사회적으로 나누는 말’이 언론이라고 했다. 변호인 반대신문에서는 권력의 일부가 되어 사실을 왜곡하고 축소하는 언론을 ‘제도언론’, ‘이미 언론이 아닌 것’으로 규정했다. 언론기본법을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언론에 없는 점도 비판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했다. 둘 중에 무얼 택하겠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신홍범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를 택할 것이냐, 신문을 택할 것이냐는 가설은 우리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정부다운 정부도, 신문다운 신문도 없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당시 언론인의 자괴감과 이들에 대한 비판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김주언 기자가 제4차 공판에서 반대신문에서 했던 말이다.

“기자들은 사회의 목탁이나 무관의 제왕이라는 허울 좋은 소리보다는 한낱 샐러리맨에 불과하다는 자조 섞인 한숨 토한다. 일부 젊은 층에서는 기자를 배고픈 자(飢者), 깃발을 들고 다니는 자(旗者), 기생과 같은 자(妓者), 버려진 자(棄者), 피해야 할 자(忌者) 등으로 자신을 낮춰 부르기도 한다.”
 
보도지침은 언론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답했던 기록이다. 역사는 이제 질문을 던진다. 가짜뉴스가 창궐하는 탈진실의 시대, 오늘날의 언론은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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