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0521

목요일마다 방영되는 TBC의 '독수리 5형제'가 오늘도 변함없이 힘찬 주제가로 시작되었다. 슈파 슈파 슈파 슈파! 태양이 빛나는 지구를 지켜라 정의의 특공대 독수리∼ 오형제∼ 눈을 빛내며 등에 베개를 받치고 앉아서 만화에 열중해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큰아버지의 다소 다급한 듯한 목소리는 수화기를 넘어서 내게까지 들려왔다. 엄마는 당황하면서 크게 걱정을 하는 모습이셨다. 내용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무언가 큰일이 난 모양이다.

만화가 끝나고 시작된 뉴스에서도 엄마가 기다리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시다가 성당에 다녀오겠다며 나가셨다. 엄마는 저녁 먹을 시간을 넘긴 후에야 돌아오셨다. 딸랑이를 흔들며 가만히 누워서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들었다. 광주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면서, 엄마는 큰아버지 가족을 걱정했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만 백 명도 훨씬 넘는다던데," 맙소사, 아직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까지 밖에 셀 수 없는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손가락에 발가락… 얼마 안 되는 머리카락까지 모두 동원한다고 해도 셀 수 없는 숫자다. 그렇게들 많이 죽었는데도 왜 뉴스엔 그런 이야기가 없었지. 작년에 대통령 하나가 죽었을 때는, 며칠 동안 만화도 하나도 안 하고 추모 특집만 가득했었는데.


# 19800613

5개월 된 아기의 옹알이라는 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마", "빠", 좀더 노력하면 겨우 "맘마"를 발음할 수 있게 되는 그 사랑스러운 어설픔이란. 게다가 통통함의 절정을 이루는 볼살과 온통 새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또 얼마나 예쁜지. … 그러니까 지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좀 쑥스러운데. 후훗.

아직 걸음을 걷지 못하는 나는 엄마 품에 안겨서 나들이하는 것을 좋아한다. 오늘은 장충단 공원에 다녀왔다. 공원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저만치서 처음 보았을 땐 쓰레기장인 줄 알았다. 사실 바로 앞에서 봐도 물보다 쓰레기가 더 많아 보였지만. 엄마가 나를 번쩍 안아 들어서 무등을 태웠다.

"어우, 이거 봐. 저 위에 저 신라호텔에서 나쁜 물을 여기로 다 흘려 보낸 거야. 너무 더럽지."
"(손가락으로 연못을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친다) 빠, 빠."
"그래, 나빠."

오, 감탄. 엄마와 아기 사이에는 초능력이 흐른다.

"지난 봄에는 돼지똥물이 경인천으로 흐르더니 이번에는 썩은 물이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돼지 응가와 쉬를 모아두는 웅덩이에서 개천으로 흐르도록 하수구와 통해 있다고 해서 3월엔 아주 떠들썩했었다. 수돗물을 못 믿겠다며 아빠는 새벽에 일어나 약수터에 가서 물을 떠오기도 하셨다. 나는 아직 맛있고 영양 많은 엄마표 우유를 먹고 있었을 때였으니 괜찮았지만.


# 19800805

너무 더운 여름날 저녁이다. 마루에는 초록색 모기향이 연기를 폴폴 내며 피어오르고, 나는 돗자리 위에 철퍽 엎드려서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었다. TV 쪽으로 고개를 돌릴 기운도 없이 겨우겨우 숨을 쉬고 있는데 뉴스를 보고 있던 아빠의 "어유, 저 사람들 시원하겠네."라며 감탄하는 목소리. 스윽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뉴스에서는 바닷가에서 작은 배를 끌어올리고 있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스물 아홉 살짜리 젊은 오빠 두 명이 파랑새호라는 작은 요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는 이야기였다. 국내 최초로 건넌 거라는데, 태평양이 70일이나 걸려야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건가?

70일이면 두 달이나 되는데. 그 동안 바다 위에서 뭘 하고 지낸 거지. 그러고 보니 난 두 달 전에는 이빨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아래쪽 잇몸이 슬슬 간질간질하더니, 어제는 엄마가 들여다보고는 이빨이 났다며 굉장히 기뻐하셨다. 아직 완전히 올라온 건 아니지만 혀로 이가 난 자리를 쓸어보는 건 정말 색다른 느낌이다. 이가 다 나버리면 이런 신기한 느낌을 다시 느끼긴 어려울 거란 생각을 하자 어쩐지 내가 부쩍 늙어버린 것 같다.


# 19800901

일주일에 한 번, '요술공주 새리'가 하는 즐거운 월요일이다.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방안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내가 부르는 노래와  TV에 나오는 노래는 목소리도 다르고 음도 달랐다. 오늘은 좀더 잘 듣고 연습도 해볼 생각으로 TV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새리는 안 나오고 웬 대머리 아저씨와 한복을 입은 아줌마가 등장했다. 만화는 어디로 간 거야.

골이 나서 볼을 부풀린 얼굴로 계속 보고 있자니, 제 11대 대통령 취임식 녹화방송이라는 자막이 뜬다. 전두환이라, 저 사람은 군복을 입고 군모를 쓰고 TV에 자주 나왔었다. 지난 5월에도 합수부장의 이름으로 TV에 나와서 삭막하게 경고나 해대던 사람이다. 왜 대통령이 되어 있는 거지. 그저 먹고 자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사이 세상은 나도 모르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 19801231

지난 12월 1일부터 TBC가 사라졌다. TBC는 내가 TV를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밀림의 왕자 타잔, 원탁의 기사, 요술공주 새리, 독수리 5형제, 들장미 쥬리 같은 주옥같은 만화들을 많이 해주었었다. 이제 KBS2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서 만화들을 못 보게 되는 건가 걱정을 했었는데 그렇진 않았다. 들장미 쥬리는 KBS1으로 옮겨져 계속 나왔다. 그리고 원탁의 기사가 끝나고 보물섬이 시작했다. 외다리 실버는 멋진 중년이다!

"7번이 없어진 거, 이게 언론 통폐합이라는 거야."
엄마가 내게 어려운 말로 설명해 주셨다. 또 이름이 바뀐 여러 신문의 예를 하나하나 들어주셨는데 힘든 발음의 한문 투성이라 영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방에 있는 기자들도 모두 철수하게 했다면서, "해외 특파원들도 보내는 시대에 그런 일은 말도 안 되지?"하고 여전히 이해를 못 하는 내게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귀여운 딸내미가 아나운서라도 되었으면, 내심 바라고 계셨던 것 같다. 그 바람은 이제 절반쯤 들어맞은 게 아닐까.

그리고 드디어 컬러 TV가 우리 집에! 문갑 위에 놓여 있던 흑백 TV가 치워지고 컬러 TV가 올라앉았다. 까맣고 하얗게만 보이던 화면이 정말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진짜 색깔로 바뀌었다. 아직 전부가 컬러로 나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애기들 차지'는 컬러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만화들도 컬러로 나왔다. 보물섬에 나오는 그 넓고 푸른 바다. 해가 바다 속으로 저물면 붉게 물드는 바닷가 풍경. 이런 걸 볼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조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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