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쿄코님.                                                                    
이렇게 맘대로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얼마전 한 시사주간지에서 이메일 주소를 봤습니다.  아이디가 'kyoko'더군요. 혹시 무라카미 류의 <KYOKO>를 보셨나요? 책으로도 영화로도 나왔죠.  여주인공 쿄코는 친구를 위해 마이애미로 길을 떠나는 여행자입니다. 겉으로 슬쩍 미국 자본주의의  황량한 풍경을 스케치해주는 이방인이기도 하구요. 그러고 보니, 독일속의 한국 유학생이자, 소위 주류  사회에 이런저런 딴죽을 거는 주변인이라는 입장이 조금 묻어나는 이름인데요.
 
그 시사 주간지 칼럼 이름이 '엑스 리브리스(EX LIBRIS)'였어요. 맞다, 에셔의 그 그림 생각나요. <미학 오디세이>에서 봤습니다. 책을 뚫고 밖으로 나오는 송충이 같은 벌레였죠. 책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책 밖으로 나오려고 애써 꿈틀대는. 우리의 세계도 결국은 커다란 텍스트. 책으로 책을 말한다는 것인가요? 한 권의 책을 통해서 사회를 비판하는 그 글에서도 여지없이 파시스트 이야기가 등장하더군요.

사실 제가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은 그 '파시스트' 때문입니다. 극우 파시스트 연구서라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읽었거든요. 여기저기서 재밌다고 그러더군요. 패러디, 텍스트 해체, 풍자...... 저는 머리말을 보면서 지은이를 다시 확인했죠.

진중권. 80년대의 분위기가 나는 잠자리 안경테의 주인공. 에셔와 마그리트의 낯선 그림들 사이로 미학과 예술사를 항해하는 동안 만날 수 있었던 <미학 오디세이>의 저자. 맞았습니다.
책 두 권 분량의 아쉬운 방랑을 접었던 독자라면, 미학의 고전들에서 그런 다이제스트를 뽑아 내 자기식으로 여행 가이드를 만든 작가를 기억하지요.
 
사실 <네 무덤에......>를 읽는 동안 씁쓸했습니다. 책읽기는 상상의 놀이인데, 별로 유쾌하지 않았어요. 독설적인 문체의 도마 위에 펼쳐진 논리들도 기대만큼 지적인 자극을 주지 못했구요. 확대 해석된 텍스트와 왜곡시킨 문장들의 조합은 선정적이었습니다. 진중권식 렌즈는 사물을 날카롭게 포착하지만 굴절되어 있기도 합니다. 파시스트의 논리로 파시스트를 뒤집는다는 것은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자의성의 한계와 객관성의 확보에는 의구심도 들구요.


파시즘의 논리가 세계대전을 뒷받침했고, 그 파시스트들의 끔찍한 만행은 얼마나 잔악무도했습니까? 책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사회의 고명하신 '극우 똘반 학생들'은 나치의 전범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본의 극우파와 견줄만 합니다. 대한민국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어리석기만해서 우리 나라 파시스트들의 행태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 걸까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코메디는 도처에 있습니다만, 주관과 객관의 문제에 따라 양상은 달라질 수 있지요.
 
여기서  칼.R.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읽은 것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역사주의에 대한 개념부분이죠. 역사는 특수한 역사적 법칙이나 진화의 원칙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 이것들을 발견하면 인간의 운명도 예언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어요. 이 역사주의의 뿌리는 선민사상에 기원을 둔 유신론적 역사주의에 있다고 합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우파의 파시즘과 좌파의 마르크스 역사철학으로 전승되었죠. 파시즘의 인종주의 철학이 선민의 역사 해석에 우위를 둔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선택된 계급을 그 자리에 대치시키고요.

그렇다면, 과거의 역사법칙을 비춰서 현재의 파시스트들의 프리즘으로 미래의 스펙트럼을 만들어 내는 쿄코님의 태도 역시 역사주의자의 스타일 아닌가요? 텍스트를 쪼개서 그 이면을 자신의 역사적, 철학적 논리로 재조립하고 앞날을 진단하는 방식. 책에 등장한 파시스트들의 공통점과 쿄코님의 논리는 여기서 만납니다.

언어철학자의 글쓰기에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그저 순진한 생각일까요?
파시스트의 싸구려 감상주의에 대한 힐난 뒤에는 저자의 감정적인 배설들이 함께 다닙니다. 일면적인 시각에 덧칠해진 이죽거리는 문체는 냉소적인 태도와 합쳐져서 파시스트의 그것 못지 않습니다. 논리 실증주의를 고수하기 위해선 언어의 폭력도 묵계되나요? 어떤 형태든지간에 폭력이야말로 파시스트들이 선호하는 수단이라고 읽었는데 말이죠.

인격을 무시하는 어휘들은 너무 오만합니다. 그들을 뒤집을 논리에 나름대로 자신있으므로 그런 표현들을 사용했으리라  짐작하지만 말입니다. 사고의 경직성을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들의 자기 성향에 근거한 합리성들은 어떻게 함부로 단죄하죠?

사회 기득권 밖에서 자기 목소리를 높이려는 사람들은 때로 지식인이라는 미명하에 전복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지적하신대로 답답한 현실에 '콱' 죽을 수도 없으므로, 정체성을 지키려면 자극적이고 거친 비명소리를 낼 수밖에 없을 때도 있겠죠. 하지만, 더 크고 오래 남을 울림은 탄탄한 틀에서 비롯된 낮으면서도 힘있고 침착한 목소리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문장의 작업 속에는 타인을 위한 얼마나 많은 사랑이 있는지 아무리 말해도 끝이 없다는 롤랑 바르트의 지적은 비단 문학 작품에만 한정된 말이 아닐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론 이 글은 어디까지나 어줍잖은 제 생각을 인상적으로 풀어본 것입니다. 풍자문학으로 읽어 달라는 책을 진지하게 보다가 혼자 흥분했을 수도 있구요. 결례가 됐다면, 청소년을 위한 대중 교양서 <미학 오디세이>를 나이들어 읽은 학생의 아쉬운 팬레터쯤으로 양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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