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테 안경에 굵은 웨이브 머리 그리고 조곤조곤한 말솜씨. 흡사 대학 교수나 음악회의 마에스트로를 연상케 하는 정재응 PD. 자세히 볼수록 그가 마주했을 현장이 외형에서도 느껴진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 날씬하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그는 EBS를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PD이다.
정재응은 최초의 사나이다. 세계 최초로 고대 로마를 3D로 재현한 <EBS 세계문명사 대기획-위대한 로마>(2013). 세계 최초로 미얀마 문명사를 조명한 <EBS 다큐프라임-3D 세계문명사 대기획: 천불천탑의 신비, 미얀마>(2015). 세계 최초로 진시황릉을 4K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EBS 다큐프라임-불멸의 진시황>(2017). 이 모든 것이 정재응 PD 연출작이다.
‘최초’라는 수식은 색달랐던 그만의 시선이 있어 가능했다. 그 시작을 알린 <위대한 로마>. 제1부는 로마 황제의 정치 무대 ‘콜로세움’, 제2부는 비운의 도시 ‘폼페이’, 제3부는 메이킹 필름으로 구성됐다.
“기존 황제 중심의 로마사 콘텐츠에서 벗어나 최초로 두 주요 사건을 통해 천년 로마제국의 역사를 조명했다. 2000년 전 콜로세움 건설과 폼페이 멸망을 통해 로마 역사를 들춰본다는 취지”라고 직접 밝힌 <위대한 로마>. 이를 시작으로 정재응 PD는 다큐멘터리에서 색다른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콜로세움에서 나우마키아(모의해전)를 담다 <위대한 로마> 제1부
“나우마키아는 콜로세움에서 발생한 가장 거대한 행사예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인류가 만들어낸 지상 최대의 행사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너무나 거대해서 상상하기도 힘들어요.”정재응 PD가 제작노트에서 한 말이다.
이미 너무나 많이 다뤄진 소재가 콜로세움이었다. 공간이 협소해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인 곳. 그때 정재응 PD는 콜로세움에서 모의 해전을 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수많은 책과 논문, 자료를 살핀 결과였다. 축구장 면적의 배가 넘는 콜로세움의 내부 아레나에 물을 가득 채우고 배를 띄워 해상전투를 벌인 나우마키아. 여기서 정재응 PD만의 로마 다큐멘터리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콜로세움에서 모의 해전을 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 깜짝 놀랐어요. 가능한가? 한 번 도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걸 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없는데.” <위대한 로마> 포스트프로덕션 슈퍼바이저 이성석이 제작노트에서 한 말이다. 전에 없던 정재응 PD의 도전은 동료마저 놀라게 했다.
“그동안 우리는 콜로세움을 검투 경기장으로만 인식해왔죠. 그래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얘기를 해야 되겠다. 이게 큰 과제였고 고민거리였어요. 그래서 찾아낸 게 콜로세움이 정치의 장이자, 고도의 커뮤니케이션의 장으로써 어떻게 기능했는지 이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풀어냈고요.” <위대한 로마>의 작가 정종숙은 제작노트에서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폼페이에 드라마를 입히다 <위대한 로마> 제2부
“현지에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연기자들을 썼다. 40여 일간 찍었는데, 하루 15시간 넘게 촬영해서 튀니지 배우가 기절하기도 했다” 정재응 PD가 2013년 5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문명사 다큐멘터리에서의 드라마 방식 도입은 아직 흔치 않은 사례다. 역사적인 사건을 현대인에게 보다 와 닿는 이야기로 그리고자 했던 정재응 PD의 신념이 만든 시도였다. 그는 제작노트에서 “기존에 고대 문명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 당대의 어떤 문명, 문화들을 잘 표현해놨어요, 이해하기도 쉽고 그런데 보고 나면 늘 드는 생각이 남의 나라 이야기 먼 이야기처럼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1% 부족하다는 느낌이 늘 들었어요. 그래서 저희 이번 위대한 로마 경우에는 2,000년 전의 제국 위대한 로마가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 어떤 의미로 와 닿는지 그런 부분에서 고민을 시작했고, 그게 우리 프로젝트 시작의 출발점이었어요.”라고 밝혔다.
정종숙 작가의 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폼페이가 한 순간에 정지된 도시인데, 이 도시의 숨결을 어떻게 살려내느냐, 이런 것이 굉장히 관건이었기 때문에. 그 중에서 아주 손을 잡고 있었던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잡고 있었던 한 쌍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캐스트가 있었어요. 그래서 이 연인을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도입해가지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갔죠.”
처음 하는 시도가 쉽지는 않았다. 촬영지였던 튀니지 사람들과는 일하는 방식부터 달랐다. 밤샘 촬영이 익숙한 한국인 배우들과 달리, 튀니지 배우들은 타이트한 촬영을 힘겨워했다. 현지 스태프는 복지 개선을 요구하며 짧게 파업도 했다. 하지만 고대의 비극을 현대인에게도 생생히 전달하고자 한 정재응 PD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튀니지 배우들에게도 통했다. 제작노트 속 인터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제 이름은 야신 벤 가마이고, 튀니지 배우입니다. 제 역할은 위대한 로마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티투스 황제입니다. 저희는 사랑하는 사이이고, 예루살렘에서 보기를 원했지만 그녀가 로마로 와버렸죠.” (튀니지 배우 야신 벤 가마)
“베레니케 공주는 티투스 황제와 사랑에 빠진 연인입니다. 비록 그녀가 40대의 연인이지만, 30대의 황제와 사랑에 빠졌죠. 이 러브스토리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티투스가 베레니케와 헤어진 후에 죽을 때까지 아무 여자도 안 만난다는 겁니다. 애틋한 이 러브스토리가 마음에 들어서 저는 이 역할이 참 좋습니다.” (튀니지 배우 매스린 마나이)
개척하는 PD, 정재응
처음부터 다큐멘터리 PD는 아니었다. <방귀대장 뿡뿡이>, <딩동댕 유치원> 등 유아 프로그램을 10여 년간 제작했다. 문명사 다큐멘터리로 장르를 바꾸는 것이 첫 도전이었을 그. 계속해서 최초라는 수식을 더해가며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두 번째 3D 다큐멘터리 <천불천탑의 신비, 미얀마>는 세계 최초로 미얀마 문명사를 다뤄, 미국 스미소니언 채널에서 2D 버전으로 선 구매해가기도 했다. 가격은 국내 2D 다큐멘터리 사상 최고가인 25만 달러로 책정됐다. 국내 평가도 좋았다. 2014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에서 <위대한 로마>의 작가 김옥영이 특별상을 받은 것이다. <위대한 로마>는 2014 한국PD대상 실험정신상TV 부문 본심에 오르는 저력도 발휘했다. 시청자들 역시 정재응 PD의 작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로마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 책도 많이 섭렵하고 다큐를 봤었죠. 그런데 이번 다큐를 보면서 사실적이면서도 정교한 영상에 더욱 실감나는 로마를 느낄 수 있었고 위대한 로마의 다양한 면을 알 수 있었습니다.’ - 김*선 (bob*******) EBS 다큐프라임 시청자 게시판, <위대한 로마 잘 봤습니다>
‘몇 년 전 로마에 가서 콜로세움을 보았습니다. 당시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가이드가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이번 ebs 프로는 큰 즐거움이자 유익이 되었습니다. 수고하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소장하고 싶습니다. 응원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프로그램 많이 만들어 주세요. 감사합니다.’ - 김*자 (ksj*****) EBS 다큐프라임 시청자 게시판, <정말 명품 다큐멘터리의 진수를 느낀 위대한 로마>
‘현지 인프라 사정을 알고 있는지라 장비 조달과 촬영 환경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가면서, 3D 다큐멘터리라는 아마도 미얀마 방송사에서는 처음 접해보는 기술력에 다시 한 번 더 한국에 반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 최*희 (tin*******) EBS 다큐프라임 시청자 게시판, <천불천탑의 신비 미얀마 시청 후기>
‘이런 대작을 무료로 볼 수 있어 감동입니다. 이야기의 전개와 집중할 수 있는 구성 등 :) 얼마나 많은 수고와 창작의 노력이 있었을지...편히 앉아 방송을 보는 게 죄송스러울 정도였답니다. 역시 ebs1, 진심 사랑 합니다. 끝으로 3d로 촬영도 하셨던데,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서 볼 수 있는지요? 극장에서 보고 싶답니다. 그 더운 나라에서 자료도 충분하지 않은 여건에서, 내용 구성 편집 등 모든 부분 멋진 작품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셔서 고생한 모든 관계자 분들과 제작진님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 - 이*근 (chi******) EBS 다큐프라임 시청자 게시판, <3부작 천불천탑의 신비, 미얀마 감동 입니다!!>
이후에도 정재응 PD는 한중 합작 <불멸의 진시황>(2017)을 내놓았다. 어린 시절 진시황의 모습부터 다루며, 그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했다. 익숙한 역사에는 색다른 시선을, 다뤄지지 않은 역사에는 숨결을 불어넣는 개척자 정재응. 그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