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한 순간도 그것을 느끼는 당사자에게는  사흘처럼, 20년처럼, 영원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인지 사람이 죽기 직전에 순간적으로 살아온 모든 날들과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말이 그럴 듯 하게 들린다. 영화 '박하사탕'도 주인공 김영호가 죽음을 맞는 순간, 그의 기억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며 시작된다. 야유회, 사진기, 삶은 아름답다, 고백, 기도, 면회, 그리고 다시 소풍. 거꾸로 달리는 과거로의 기차여행은 스스로 끊어버릴 만큼 엉킨 운명의 실타래를 한 가닥씩 풀어가는 희망의 여행이다.

주마등처럼 깜박이며 이어지는 기억의 파편들은 이창동 감독의 치밀한 구성으로 일련의 인과관계로 엮어진다. 증권에 실패한 파산자로 죽음을 결심했던 사흘 전, 권태기에 빠진 아내와 서로 바람을 피우며 가정을 파괴시키던 5년 전,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물고문 경찰 '견' 이 되어 버린 12년 전, 심성과 맞지 않는 경찰 생활에 접어들어 방황하며 첫사랑을 외면했던 15년 전, 광주 항쟁의 계엄군으로 투입되어 평생 다리와 함께 마음까지 절게 된 19년 전,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20년 전…. 모든 사건을 배경으로 어김없이 들리는 기적 소리만이 철교 위에 서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1999년,  마지막 순간의 그를 상기시킨다.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던 20살의 꿈 속에서 그가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가장 순수했던 모습의 그가 본 아름다운 풍경들이 그가 죽기를 결심하고 올라갔던 철교에서 내려다 본 시냇가의 풍경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자, 봐요…. 그때 모양 그대로 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양 끝이 뾰족한 모양의 박하 사탕은 조심스레 혀를 굴리면서 먹어야 한다. 표면을 감싼 까칠까칠한 설탕이 녹아 내리면 입안 가득 달큰한 물이 고이고 이내 단 맛이 가시고 나면 더욱 상쾌한 향이 목구멍까지 퍼져 나간다.

20년 전 영호는 이런 박하 사탕을 '되게' 좋아한다고 했다. 아니, 정말 좋아한 건 하루에 박하사탕 천 개씩을 포장해야 했던 첫사랑 순임이었다. 이 둘을 갈라 놓은 잔인한 시간은 1999년 어느날,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의식 불명의 순임과 폐인이 된 영호를 만나게 해준다. 두 연인의 모습은 초라했지만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 박하사탕을 통해서 변함없는 사랑을 절절하게 확인한다.

2000 01 01 0

새천년 첫날 첫번째로 개봉하는 한국 영화 '박하사탕'. 모두들 새로운 세기에 대한 희망으로 들떠 있을 때 '박하사탕'의 관객들만은 반대로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어두운 과거를 향해가는 기차를 타고 있을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사람들이 항상 '달콤한 과자'만을 먹지는 않을 거란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삶과 첫사랑의 진실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박하사탕'은 과연 달지만은 않은 영화였다

김재은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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