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는 지금 만화 스토리 전문 작가다. 무술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는 그저 자신의 환타지 소설에서나 그 꿈을 펼쳐본다. 최첨단 기술이 총동원된 컴퓨터 게임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자신의 홈페이지는 업데이트에도 쩔쩔 맨다. 조율이 엉망인 피아노로 오케스트라와 협연이라도 하는 듯한 그의 별명은 '유쾌한씨'. 그렇다면 본명은? 이병학(25).
 
그는 "푸하!" 이런 소리를 내며 웃는다. 오늘 당장 만나자는 요청에도, 약속 시간을 자꾸만 바꿀 때에도, 15분이나 지각한 나머지 주변에 신경 쓰는 걸 잊어버린 숨찬 내 구두소리에도 그렇게 웃었다. 마디가 신경질적으로 선명한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는 여간해선 그의 입안에 들어가질 못한다. 얘기하고, 또 "푸하!" 이렇게 웃느라고. 웃을 때면 작고 마른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입이 크고 동그래진다. 날카로운 얼굴선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그 헤픈 듯한 웃음과 저음으로 말하는 목소리의 통렬한 부드러움에 녹아버린다.

"난 남도 잘 웃기고 또 잘 웃어요. 아마 내가 무술을 안 배웠으면 코믹만화 같은 걸 그리고 싶어했겠죠. 작가가 될 만큼 그림 솜씨가 좋은 게 아니라서 만화 스토리를 주로 쓰지만, 어릴 때 내 꿈은 그냥 만화가였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남들 다 배우니까 따라 배우기 시작한 태권도는 그의 인생에 참 많이도 참견을 했다. 어린 아이의 영웅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취미가 되고, 나중엔 잠을 줄여가며 연습할 만큼 배우고 싶은 무예의 수가 자꾸만 늘어났다. 지금까지 배운 것만도 10여 종류. 우리 나라 전통 무예는 물론이고, 일본 것이든 중국 것이든 배우려는 욕심에 끝이 어디 있을까.

 진짜 무술인의 진짜 무술 만화
고등학교 1학년, 남들은 가야할 대학을 정하고, 좋은 대학이라는 무게에 눌리거나 학교 성적이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결정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있을 나이, 이병학은 무술 배우는 일에 푹 빠져 있었다. 공부를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학교 가기 전 새벽 시간을 쪼개어 도장에 나갔다. "완전히 빠져버렸던 거예요. 운동을 못한 날은 하루 종일 안절부절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는 쉽게 "중독됐다"는 표현을 썼다. 아주 자랑스러워 하면서.

지금은 PC통신 무술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연습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 하고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이 무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만화가 이정욱과 합동 작업한 '글레디에이터'는 모 만화잡지에 4회 연재분까지 세이브 되었다가 액션 표현을 하기엔 페이지에 제한이 많아서 단행본 출시로 방향을 바꿀 만큼 무예에 관한 그의 지식과 상상력은 아직 타협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강조하여 말하는 무협 만화의 리얼리티와 한국적 정체성도 그가 무술에 바쳐온 시간을 압축하고 있다. "우리 나라 만화엔 아직도 장풍이나 쏘고 축지법을 누워 떡 먹듯 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게 문제예요. 전통 무예엔 그런 건 있지도 않아요. 난 무협 만화에도 리얼리티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는 아직도 어린 시절 읽었던 '북두신권'이라는 일본 SF무협 만화를 좋아한다. 철저한 고증을 거친 전통 일본 무예를 날카로운 터치로 살려낸 그림, 상상력의 한계를 깨는 탄탄한 스토리 진행. 그에 필적할만한 대작을 만들어 보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허무 맹랑하도록 초인적인 주인공도 아니고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데도 책이 팔릴까? '블레이드'의 원고 초안을 보고 출판사가 제일 먼저 했던 걱정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걱정하는 건 심의를 통과하는 일이다. 우리 나라 만화가 심의에 통과하고 안하고는 약간의 운과 심의 의원의 그 날의 컨디션에 달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긴 하지만 그의 책에는 끔찍한 살상 장면이 너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런게 바로 하드고어(hard-gore) 장르예요. 그리고 사람이 싸우다 죽으면 다 그래요. 그게 리얼리티인걸 어떡해요?"

그가 하고 싶은 일은 이렇게 두 가지이지만 결국 한 가지다. 무술을 연마하고 그 경험을 살려 완벽하게 고증된 동작이 표현된 만화를 만드는 일. 그의 이런 꿈은 만화가가 되고 싶은 소년이 태권도를 아무 생각 없이 배우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 꽤 역사가 긴 것이었고 대학에 두 번 입학하고 두 번 모두 한 달을 못 버티고 그만둘 정도로 그의 머리 속에는 만화와 무술 두 가지 뿐이었다. "두개를 놓고 뭘 해야 할지 고민도 엄청 많이 했는데…. .시시한 걸로 고민한다 싶어 우스운가요? 그래도 난 목숨 걸고 죽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은 그 두 가지 밖에 없어요."

"무술은 사람이 가진 능력이 무한하다는 걸 느끼게 해 줘요. 정말 커다란 매력이죠. 연습하면 할수록 한계를 뛰어 넘는 그 기분 알아요?"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인간 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방법은 의외로 여러 가지다. 태양 둘레를 백 바퀴 이상 돌아보지도 못한 채 영원한 침묵 속으로 사라져야 하고, 이미 만들어져 있는 조건에 자신의 삶을 내맡기며 적응하는 일이 고작인 지극히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역사의 흐름이나 인간 수명을 뛰어넘는 시간의 변화는 지리멸렬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 여행에, 환타지 소설에, 스타워즈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환타지 소설에서 나는 '신'(神)이다
이병학은 자신의 하이테크 환타지 스릴러 소설 '블러드 로즈'에서 신(神)처럼 군다. 벌레 한 마리, 나무 한 그루까지 현실과 달라야 재미있으니까. "만약에 6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쓴다면, 최소한 1세기부터 500년 이상의 역사를 혼자 마음대로 만들 수 있어요. 그 지역에 나라가 100개 있다면 각 나라의 역사, 정치적 힘의 균형이나 대립 관계, 경제관이나 종교까지도."


무(無)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채워 가는 일은 얼마나 신나는 일이고 또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는지, 그래서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아닐런지. 특히 그처럼 '로도스도 전쟁'이나 '반지 전쟁' 운운하는 정통 환타지 신봉자라면 말이다.

이병학은 그림을 잘 못 그린다. 맨 처음, 만화가 이정욱을 찾아가 어시스턴트로 써달라고 했을 때 나이가 많다는 궁색한 이유로 그는 거부 당했다. 나중에 만화 스토리를 써서 보여준 후에야 이정욱은 그를 '동업자'로 인정했다. 아직도 그림 실력이 늘지 않아 실망스러울 때가 많은 그는 스토리 작가도 어느 정도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말과 몸짓으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동작이 있을 땐 대충 그려 보여주기라도 해야 답답하지 않다고. 그렇지만 공동 작업에서 오는 답답함은 비단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는 아니다. 서로가 백 퍼센트 마음에 들도록 의견을 조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는 공동 작업을 할 때의 마음을 "합일점을 찾아 장기계획을 세우고 여행하는 기분으로"라고 표현한다. 이런 여러 번의 여행 때문에 그는 지금도 여럿이'함께' 최고가 될 게임을 만들고 있다. 

"내 글을 읽고 사람들이 나랑 똑같은 걸 상상했으면 좋겠어요. 소설은 천 명이 읽으면 천 명 모두 주인공에 대해 제각기 다른 이미지를 갖게 되잖아요.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여운이 가슴에 남죠. 난 눈에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걸 해보고 싶었던 거예요." 그는 경험도 없이 대대적인 컴퓨터 게임 프로젝트에 뛰어들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장르가 혼연 된 마지막 문화장르'라는 부담스러운 미사여구를 동원할 것도 없이, 게임은 이미 신세대 전용 문화의 울타리를 뛰어 넘은 지 오래다. 세계 대전을 치르고 있는 게임 시장에서 그의 무기는 '상상력'과 게임 프로그래밍에 대한 '무지'(無知).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따져보기 시작하면 스토리 진행은 기존 게임보다 나아질 수 없는 법.

 게임은 눈에 여운을 남긴다
그가 참여하고 있는 온라인 컴퓨터 게임 프로젝트는 그야말로 극비다. 게임은 거의 완성단계에 있지만 본격적인 광고와 제품 판매에 들어가는 올 5월까지는 프로젝트 팀원 외에 아무도 게임의 윤곽조차 알아서는 안된다. 그들만의 '특명'이다. "어떤 주인공과 소재를 사용하는지만 가르쳐 달라구요? 그게 우리 게임의 핵심이예요. 아주 특이한거죠. 상상도 못할 만큼.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세요." 그는 이런 말로 은근히 궁금증에 부채질하며, 또 한번 크게 웃는다. 사람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빠져 있을 땐 모두 다 그런 웃음을 웃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의 웃음은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 

그는 리얼리티가 없는 건 싫어한다. 코믹하기만 하고 진실이 없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도 신비한 동물이나 인간 이상과 이하의 존재, 마술과 초자연의 힘, 신들의 전쟁, 기괴한 자연 환경, 그리고 상상력의 제국인 환타지 소설을 쓴다. "돈 많이 벌 거예요. 애니메이션도, 게임도 차세대 유망 사업 아닙니까?"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면서도 계약금까지 받은 장편 환타지 소설 '게임메이커'에 성(性)적 묘사 부분을 삽입해주지 않고 결국 출판을 포기했다. 그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의 길을 선택할 때 많은 고민을 했다더니, 만화에 소설에 온라인 컴퓨터 게임 시나리오에까지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고추장 양념의 비밀을 지키면서 평생 떡볶이만 만들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는 핀볼 게임에 나선 사람같다. 한 게임을 이기면 또 다시 다른 게임을 치러야 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깊이가 없는 사람"이라고 낮추어 말한다. 메테를링크의 말처럼 인생이 한 권의 책이고 우리가 그것을 매일 한 장씩 쓰고 있다면 그의 책은 '옴니버스'가 될 것이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건 결국 단 한 가지예요. 내 상상력을 구체화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딱 한가지." 아직도 소년처럼 이런 말을 하는 소박함, 인습에 제한되지 않은 얼굴, 거침없는 말투, 얼굴 가득 웃을 줄 아는 입, 그리고 상상력이 가득 담긴 명민한 눈빛, 이병학. 

김상미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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