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가 저물고 있다. 20세기만큼 인종간, 국가간, 민족간 전쟁이 빈번했던 시절이 또 있을까? 양차 세계 대전으로 시작되어, 한국과 베트남, 걸프만에서의 선혈을 지나, 발칸반도와 인도네시아, 인도와 파키스탄의 캐시미르 전쟁에 이르기까지 20세기가 뿌린 핏자국은 채 가시지 않았다. 너무 많아 언급하기조차 힘든 전쟁과 폭력들. 그래서 누구도 20세기를 '폭력의 세기'로 규정하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추한 것에서 새로운 미를 발견하듯, 이 시기에 우리는 폭력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며 살았다.

그래서일까. 서점의 사회과학 코너에서 만날 수 있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폭력의 세기(원제 ON VIOLENCE, 1970)>는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 한나 아렌트의 학자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그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 최근에 와서야 몇몇 지식인들이 그녀를 소개했고, 대학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아렌트는 평생 자신이 망명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지적했듯이, "나라마다 쫓겨난 망명자들은 자신의 인민들의 전위를 상징한다.(<우리 망명자들 We Refugees>에서)" <폭력의 세기>를 완역한 역자 김정한의 말처럼, 그녀는 "20세기로부터의 망명자였고, 동시에 이미, 새로운 세기를 사상적으로 예비했던 전위였다."  

흥미진진한 20세기의 사건들이 이 책의 주제는 아니다. 20세기를 지배한 폭력의 역사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은 별 도움이 안된다. <폭력의 세기>는 한국어판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폭력의 세기'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단지 폭력 그 자체를 다룬 역작이다. 그녀는 폭력 현상을 탐구한 것이 아니라, 폭력의 내면을 탐구한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폭력과 권력은 같은 것인가? 흔히들 사람들은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폭력은 권력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진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폭력은 쉽게 정당화된다. 그러나 권력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권력은 개인이 아닌 집단에 속하며 집단 안에서만 존속한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권력을 가진 자'라는 말은 잘못된 어법이다. 권력은 집단에 의해 생성되고 개인에게 '위임'될 뿐이다. 마오쩌둥의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이 책에서 철저하게 반박된다. 총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복종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따라서 폭력과 권력은 대립한다. 폭력이 절대적인 곳에서 권력은 없다. 유럽을 휩쓸던 나치의 몰락은 폭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전체주의적 지배자는 그의 적뿐 아니라 동지들과 지지자들의 권력까지도 두려워한다. 다른 모든 것과 대립하면서 폭력에만 의존하는 순간 전체주의는 권력을 상실한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지만 권력을 생성하진 못한다. 폭력에 의해 권력이 무능력해진 그때, 그녀는 '행동능력'의 복원을 주장한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헤겔과 맑스의 관념은 그 후계자들에 의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폭력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폭력은 정당화될 수는 있어도 결코 정당성을 갖지는 못한다. 아렌트는 폭력에 의해 파괴된 권력을 재생하는 것은 인간의 행동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맑스, 니체, 프로이드, 그리고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폭력에 관한 짧은 에세이를 통해 20세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21세기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녀의 난해한 문체는 번역본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문장은 깊은 사고가 응축되어 곱씹을수록 독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폭력과 권력에 관한 그녀의 논의를 따라가면서 결국 독자가 접하게 되는 것은 현재 우리들의 상황이다. 거대화한 정치체제 아래에서 권력은 집중되었고, 집중된 권력은 무능력해졌다. 이제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처럼 무능력한 권력을 행동을 통해 복원해야 한다.

옮긴이 김정한은 한나 아렌트를 이렇게 평가했다. "19세기에 반하는 사상가로서 맑스, 니체, 프로이드 등을 언급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이 20세기를 자신의 세기로 선취할 수 있었다면, 20세기에 반하는 사상가의 목록에는 단연 아렌트가 올라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대한 논의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한국 지성계에서 이 책을 통해 우리가 그녀의 사상적 깊이를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책에서 그녀의 날카로운 지적을 만나는 것은 세기말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논쟁을 던져준다. 논쟁적인 아렌트의 명제들은 책장에 꽂아두고 볼 가치가 있다. 책 표지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이미지가 강렬한 건, 바로 그녀의 사상적 깊이 때문이다. 

 김수진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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