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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목소리, 니콜라스 크리스토프
유지혜 기자 | 승인 2018.06.17 13:13

 

“25년 전, 베이징에서 중국군이 천안문 광장 시위자들에게 발포한단 소식을 들은 날 밤이었다. 진압을 예상한 학생 시위자들이 도로를 봉쇄해 천안문까지 운전할 수 없었다. 대신, 자전거를 타고 최대한 빨리 천안문으로 달려갔다. 포격을 피해 도망가는 군중들을 비껴가면서 영원한 평화의 거리(장안거리)로 향하며 계속 생각했다. 군인들이 총을 쏘는 쪽을 향해 가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를. 군대가 오기 전에 천안문에 도착했다. 마오 동상 근처에 자전거를 대고 중국어로 사람들을 미친 듯이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자동화기 발사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곧 군대가 도착했다. 그리고 내가 있던 인파를 향해 바로 발포했다.”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칼럼니스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D. Kristof)는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이렇게 기억한다. 이 내용은 뉴욕타임스 온라인 취재기 ‘타임스 인사이더(Times Insider)’의 2014년 기사 ‘크리스토프가 베이징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하루를 떠올리다(Kristof Recalls a Bloody Day in Beijing)’에 나온다. 그는 중국 천안문 사태, 수단 다르푸르에서 벌어진 인종 청소 기사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 다르푸르 분쟁을 취재 중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 (출처=크리스토프 페이스북)

크리스토프는 여섯 대륙을 모두 돌아다니며 취재를 했다. 150개가 넘는 나라들을 다니면서 말라리아와 싸우고, 비행기 추락에서 살아남았다. 사람의 머리가 꿰어진 창을 든 무리와 마주치거나 콩고 정글에서 반란군에게 쫓기기도 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언급한 ‘악의 축’ 나라들인 이란, 이라크, 북한에 두 번 이상 다녀왔다.

그가 처음부터 대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토프와 함께 하버드 대학교 신문사 크림슨(The Crimson)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를 다르게 기억한다. 1980년 크림슨의 편집장이었던 알렉산드라 D. 코리(Alexandra D. Korry)는 2007년 크림슨과의 인터뷰에서 “크리스토프는 똑똑하고, 내성적이고, 다정했다”고 말했다. 뉴요커(New Yorker) 기자이자 CNN의 법률 분석가인 제프리 투빈(Jeffey Toobin)은 크리스토프와 1982년 크림슨에서 함께 일했다. 같은 인터뷰에서 투빈은 “그가 도덕적 양심을 가진 언론인이 된 것은 놀랍지 않지만, 인디아나 존스가 된 것은 놀랍다”고 했다.

'오리건 촌놈' 크리스토프, 언론인의 길에 들어서다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1959년 4월 27일 오리건주의 체리 농장에서 태어났다. 2008년 아카데미 어치브먼트(Academy of Achievement)와의 인터뷰에서 크리스토프는 그의 아버지 라디스 크리스토프(Ladis Kristof)가 루마니아 출신의 이민자라고 했다. 라디스 크리스토프는 동유럽 전문 정치학 교수, 어머니 제인 크리스토프는 미술사 교수였다.

2006년 크림슨의 기사 ‘Nicholas Kristof’에서 그의 고향 친구이자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던 스콧 안드로이즈(Scott Androes)는 크리스토프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똑똑한 친구였다고 했다. “부모님께선 그를 매우 자립적으로 키우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1년 동안 주(州) 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2012년 안드로이즈는 크리스토프의 칼럼 ‘아마 치명적인 실수(A Possibly Fatal Mistake)’에 등장한다. 크리스토프는 건강보험이 없어 치료를 미루다가 4기 전립선암으로 고통받는 그를 “망가진 의료 체계의 희생자”라고 했다.

크리스토프는 우연히 언론인이 됐다. 고등학교 시절 교내 신문을 창간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편집장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자리에 없던 그가 얼떨결에 신문의 편집자로 선출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신문 제작에 열정을 느꼈다. 그는 지역 신문사 맥민빌 뉴스 레지스터(McMinnvile News Register)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크림슨의 기사에 의하면, 당시 맥민빌 기자였던 랜스 로버트슨(Lance Robertson)은 고등학생이던 크리스토프가 맥민빌의 어떤 기자보다도 글솜씨가 훌륭했다고 했다.

크리스토프는 1978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시간 대부분을 공부하는 데 썼다. 그가 학업 다음으로 몰두했던 것이 크림슨에서의 활동이다. 2007년 크림슨의 기사에서 1982년 크림슨의 편집장이었던 윌리엄 맥키븐(Willam McKibben)은 당시 크리스토프가 썼던 기사들의 성격이 현재의 칼럼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끊임없이 사실을 파고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이 왜 중요한지를 증명했다. 그가 다르푸르 분쟁에 대한 칼럼에서 보여준 것도 마찬가지다.”

크림슨 활동과 동시에 크리스토프는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서 인턴십을 수료했다. 하버드 졸업 이후 옥스퍼드 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했다. 아카데미 어치브먼트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그는 의대에 가지 않으면 법대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로즈 장학금(Rhodes Scholarship)을 받고 옥스퍼드에 가는 길을 택했다고 했다.

옥스퍼드의 첫 방학에 그는 폴란드에 갔다. 폴란드 공산주의 정부가 노동조합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크리스토프는 워싱턴 포스트에 연락해 기사를 썼다. 1981년 12월 16일 워싱턴포스트에 크리스토프의 기사 ‘A Subdued Krakow[(진압된 크라쿠프(폴란드의 도시)]’가 실렸다. 기사는 “지난여름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였고, 현재 옥스퍼드 대학의 법학과 학생인 크리스토프는 계엄령이 시행됐을 때 폴란드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후로도 크리스토프는 방학이 되면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로 여행을 떠났다. 2007년 크림슨의 기사에서 크리스토프는 그때를 이렇게 말했다. “옥스퍼드에 다니면서 방학마다 여행하고, 프리랜서 기자로 글을 썼다. 그때 교실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옥스퍼드에서 법학 학사를 취득한 후에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아랍어를 공부했다. 아카데미 어치브먼트와 인터뷰에서 크리스토프는 아랍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가 1982년 시리아 하마에서 일어난 폭동이라고 했다. 당시 영어를 하지 못하는 생존자들과 인터뷰를 하지 못했고, 아랍어를 하는 기자가 많지 않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1984년 뉴욕타임스에 입사해 처음에는 경제 분야를 보도했고, 이후 로스앤젤레스와 도쿄에서 취재했다.

의견 저널리즘의 새 장(場)을 열다

뉴욕타임스에서 홍콩과 베이징, 도쿄의 지국장을 역임하기까지 크리스토프는 특파원으로 백여 개 나라를 돌아다녔다. 이때부터 크리스토프는 종종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다. 언제나 멀리 있고, 덜 알려진 곳에 관심을 가지는 그에 대해 1982년 크림슨의 편집국장이었던 로런스 그라프스테인(Laurence Grafstein)은 크림슨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와 함께 여행한다면 그건 위험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믿기 힘든 뉴스거리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라프스테인의 말처럼 크리스토프는 특히 정부가 불안정한 개발도상국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수단 정부의 아랍화 정책으로 인해 유혈 분쟁이 일어난 다르푸르 지역을 10번 이상 방문 취재했다. 두려움 없이 뉴스를 찾아다니고, 집요하고 철저하게 취재한다. 그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리며 대중의 관심을 촉구하는 방법이다.

▲ 북한에서, 두려움과 함께 (From North Korea, With Dread)

북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크리스토프는 1989년과 2005년, 그리고 2017년 9월 북한을 방문해 취재했다. 2017년 10월 뉴욕타임스 칼럼 ‘나는 왜 북한에 갔는가(Why I Went to North Korea)’에서 크리스토프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왜 북한에 갔는지를 설명한다.

“나는 수백만 명이 죽어 끔찍한 대재앙이 될 수 있는 전쟁의 위험에 대해 우리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북한을 떠났다. 바로 그래서 북한 내에서 취재하고 보도하는 일이 중요하다. 간단히 말해, 취재현장에 직접 가보는 것을 대체할 방법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이라크 전쟁을 바로 앞두고 터득했어야 했던 교훈이다. 그때는 현장에서보다 워싱턴에서 늘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위주의 취재와 보도가 이루어지는 경향이 다분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의 생명이 걸려있고, 공식적인 대화 채널이 없을 때는, 언론이 때때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경고를 전달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 천안문 사태를 취재하던 크리스토프 부부(출처=크리스토프 페이스북)

크리스토프는 유일한 퓰리처상 부부 공동 수상자이다. 그는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부인 셰릴 우던(Sheryl Wudunn)과 함께 1990년 중국 민주화 운동 천안문 사태를 탐사 보도해 첫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2006년에는 다르푸르 분쟁에 대한 칼럼으로 두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심층적이고 생생한 보고를 통해 다르푸르 대학살을 알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지구 곳곳의 수많은 이들의 대변자가 되어 줬다”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는 2011년 미국의 인기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그를 선정해 의견 저널리즘을 새로 썼다고 표현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은 “세계의 가장 어두운 곳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가 진정한 선구자”라고 했다.

2007년 소저너스(Sojourners)와 인터뷰에서 그는 기자로서의 분기점이 천안문 사태라고 말했다. “천안문 사태는 정신적으로 아주 큰 충격이었다. 족히 500명은 사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해진 것은, 수치를 따지는 것이 전체 중국의 맥락 속에서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중국 시골 지역에서 매년 3천 명의 사람들이 홍수로 죽어가고 있으며, 70만 명의 젊은 여성과 소녀들이 납치되고 팔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사실은 그가 아내와 함께 <절망 너머 희망으로(Half the sky)>를 집필한 계기가 됐다.

<절망 너머 희망으로>는 현대에도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 세계 절반 여성들의 삶을 담은 책이다. 비극적이고도 처참한 실상과 희망이 담긴 해결책을 다룬 여성 인권 보고서로, 출간 이후 크게 주목받았다. 빌 게이츠, <세 잔의 차> 저자 그레그 모텐슨, 배우 조지 클루니 등 유명 인사들의 추천뿐 아니라 워싱턴포스트 등의 평론가들 역시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았다. 이 책은 배우 앤젤리나 졸리가 책 출간 기념 및 단체 기금 모금회에 참석하는 등 이 책의 홍보 대사를 자처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소저너스 인터뷰에서 그가 인도주의적 문제들에 관심을 두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그 사안에 관련된 숫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5달러면 모기장 하나를 살 수 있어 최소 한 가족을 말라리아에서 보호할 수 있다. 아동 성매매 문제도 마찬가지다. 캄보디아에 처음 갔을 때는 매음굴로 납치된 아이를 구하기 위한 몇몇 단체의 시위로 업소가 문을 닫는 것을 봤다. 이런 문제들은 모두 거대해 보인다. 하지만 어떤 사안은 분명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

블로그에서 소셜 게임까지: 웹 저널리즘의 선구자가 되다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뉴욕타임스의 첫 번째 블로거(blogger)다. 그는 2003년 블로그 ‘On the ground’를 개설해 칼럼에 담지 못한 이야기와 독자와 생각을 나누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일주일에 두 번 쓰는 칼럼으로는 이라크 전쟁에서 그가 매일 보는 광경을 담기에 부족했다. 그때 그는 뉴미디어를 저널리즘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2012년 패스트컴퍼니(Fast company)는 크리스토프에게 왜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게 됐는지 물었다. “우리는 모두 뉴스 산업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때 소셜 네트워크가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블로그뿐 아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채널도 운영한다. 6월 13일 기준 트위터 팔로워는 약 219만 명, 페이스북 페이지 ‘좋아요’ 숫자는 68만여 개,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약 4만 6천 명, 유튜브 구독자는 5천여 명이다. 취재를 위해 아이티에 갔을 때, 그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사람들이 어떤 것을 알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대중의 지혜’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는 그는 이러한 소통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아이디어를 칼럼에 반영한다.

▲ 케이틀린 제너, 비평가들을 만나다(Caitlyn Jenner Meets Her Critics)
 

유튜브 채널에서 가장 높은 조회 수(56만 회)를 기록한 동영상은 ‘케이틀린 제너, 비평가들을 만나다(Caitlyn Jenner Meets Her Critics)’이다. 전 올림픽 챔피언이자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미국의 유명 방송인 케이틀린 제너(69)가 크리스토프와 함께 뉴욕 브루클린의 한 고등학교를 찾아 학생들과 대화하는 내용이다. 이 영상에서는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렌스젠더)로부터 정치적으로 비판받아온 제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크리스토프는 아내와 함께 페이스북 게임을 개발하기도 했다. ‘Half the Sky Movement’가 만든 이 게임은 소셜 게임 ‘팜빌(FarmVille)’과 유사한 방식이다. 마을을 건설하고, 그곳의 여성들과 소녀들을 돌보는 이 게임은 단순히 가상 세계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게임에 성공하면 실제로 학교와 난민 캠프가 만들어진다. Half the Sky Movement 홈페이지에 따르면, 1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게임을 했고, 여성들을 돕는 단체에 5백만 달러 이상 기부됐다.

2017년 12월,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This Blog, R.I.P.’라는 글을 남겼다. 미디어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블로그에서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가겠단 내용이다. 이 글은 “우리는 적응하고, 우리는 실험하고, 우리는 진화한다. 이것은 모두 저널리즘이다”라는 말로 끝난다.

크리스토프는 이미 뉴욕타임스의 대표 칼럼니스트이다. 그러나 절대 안주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고,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고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든다. 그 자신도 끊임없이 실천한다. 2009년 빌 클린턴 글로벌 이니셔티브 연설 중 “나는,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말처럼 그는 우리에게 휴머니즘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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