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수많은 책이 새로 진열되는 서점에서 읽을 만한 책을 찾아내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가볍고 감성적인 글도 나쁘지는 않지만, 마음 속에 오래 남아 자신을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글은 묵직한 울림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정의감에 불타오르게 하는 책도 좋다. 참여연대 사무처장 박원순 변호사가 쓴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는 이제껏 무심히 지나쳐온 법정의 역사를 조목조목 일깨운다.

「세기의 재판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수십 세기를 거슬러올라가 기원전의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다. 이어 기원의 주인공인 예수, 중세의 잔 다르크, 토머스 모어, 마녀들과 갈릴레이, 그리고 근대의 드레퓌스, 필리페 페탱, 로젠버그 부부와 D. H. 로렌스 등 열 가지의 재판을 다루고 있다. 열거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자기 시대의 모순을 고스란히 짊어진 채 수난을 당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당연한 듯 여겨졌던 이같은 법정 드라마는 후대에 와서 또다른 역전을 맞기도 한다. 박 변호사는 "당대의 법정"과 "역사의 법정"을 구분지어, 당대의 법정에서 수모를 겪고 목숨을 잃기까지 했던 이들이 결국 역사의 법정에서는 복권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양심이 과거 인류의 어리석은 잘못을 그대로 두고 보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중세 마녀사냥의 광기

암흑의 중세 시대, 전 유럽 등지에서 마녀라는 죄명을 쓰고 화형대의 재와 이슬로 사라진 백만 여성들. 이들의 죄목은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것들이었다. 악마와 계약을 맺은 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죄, 악마의 꽁무니에 입맞춘 죄, 아이들을 유괴하여 잡아먹은 죄. 이런 죄목이 거리낌없이 적용되고, 또 들불처럼 번져 수십만의 여성들을 사냥할 수 있었던 것은 중세유럽의 무자비한 사법절차와 가혹한 고문 덕분이었다. 사소한 풍문이나 의심만으로도 체포, 고문해서 마녀라는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2∼3세기 동안 수십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된 이 상상을 초월하는 마녀재판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책에 인용된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마녀재판이 지닌 실제적 의미는 마녀광란을 통해 중세 후기 사회 위기에 대한 책임을 국가와 교회로부터 인간의 형태를 취한 가상의 괴물들에게 전가"시킨 것이라며 중세의 위정자와 법집행자를 비난했다.

마녀재판은 중세 암흑 시대에 벌어진, 인류사에서 가장 끔찍한 한 부분이지만 이는 "모든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심리적 현상이며 동시에 모든 사회가 저지를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다. 익히 알고 있는 독일 나치즘과 이탈리아, 일본의 파시즘, 20세기 중반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에서도 우리는 마녀재판과 똑같은 광기를 읽을 수 있다.

분단 이래 반세기 동안 연출되었던 우리 나라의 빨갱이사냥도 크게 다르지만은 않다. 지금까지도 감옥에 갇혀 있는 수많은 양심수들은 우리 사회에 반영된 마녀사냥의 또다른 모습이다. 수 세기가 지나 이성의 시대, 르네상스를 맞으면서 억울한 죽음을 보상받은 마녀들처럼, 우리의 이 어두운 그늘도 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올 것을 믿어본다.

나는 고발한다, 내 모든 것을 걸고

이같은 사냥몰이식의 재판은 중세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최근 프랑스 군부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해 다시 한 번 전세계의 화제가 됐던 드레퓌스 사건.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는 군사기밀 문서를 작성했다는 누명을 쓰고 별다른 손을 쓸 틈도 없이 종신형을 받고 악마도에 유배됐다. 조잡한 조작으로 은폐될 뻔했던 이 사건은 당시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던 작가 에밀 졸라가 "내가 얻은 것, 내가 이룩한 명성, 내 생애와 명예"를 걸고 작성한 논설 「나는 고발한다」로 세상에 알려졌다.

국방성을 고발하고 군사법정을 고발한 이 글로 졸라는 전세계 지성인의 지지를 얻었지만 국가모독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형을 피해 망명길에 오른 졸라는 미처 승리를 보지 못하고 1902년 숨을 거두었으나, 4년 후 결국 드레퓌스는 복권되었다. 드레퓌스의 변호사 클레망소는 졸라의 죽음을 이렇게 기렸다. "가장 강력한 제왕에 반항하며 그에게 경배할 것을 거부할 만큼 강한 사람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다수에 저항하고 오도된 대중에 홀로 맞선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극우 파시스트의 희생양 로젠버그 부부

최고 문명국이라는 프랑스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조인 미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1949년 소련에서 원자실험이 실시됐다는 발표가 있은 후 곧바로 의회와 언론은 이 실험 성공은 누군가의 간첩행위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론을 몰았다. 당시 FBI 국장 에드거 후버는 "더 이상 원폭은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담은 보고서를 읽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소련도 그 정도의 기술과 과학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혈안이 된 FBI가 희생양으로 지목한 사람은 줄리어스 로젠버그였다. 45년 공산당원이라는 혐의로 공직에서 쫓겨났던 로젠버그는 이 사건을 더욱 그럴 듯하게 장식했다. 전직 가정주부였던 그의 부인 에설도 동생 데이비드 그린글래스의 증언으로 체포됐다. 데이비드는 집요한 수사관들의 압력에 밀려 자신의 면책을 약속받고 누이와 매부에게 혐의를 씌우는 데 협조한 것이다.

유일한 증거는 동생의 박약한 자백뿐이었지만, 이미 희생양으로 정해진 로젠버그 부부는 교황 파우스 7세, 아인슈타인 박사, 브레히트, 프랑스 오리올 대통령 등 전세계 지성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사형에 처해졌다. 죽음을 앞둔 로젠버그 부부는 공개편지에서 "민주적 가치를 희생해가며 우리들의 생명을 꼭 사야만 한다면 우리들의 계승자인 아이들에게 남겨줄 유산은 없다"며 "이런 신념을 공유하는 미국인들이 이 음모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처형 40주년인 1993년, 미국 변호사협회는 현직판사가 참여한 모의재판을 통해 로젠버그 부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박 변호사가 영국과 미국 유학 시절 수집한 수많은 자료와 연구서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세기의 재판, 그 법정 기록과 논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어떠한 압력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진실을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은 감동을 넘어 부끄러움까지 불러일으킨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스스로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조혜원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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