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캔디라고 해. 아다치와 강경옥, 김진태 만화를 좋아해." 박무직의 <TOON>에 나오는 만화  동아리 PASS에 들어서면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가 손을 내민다. 그들의 소개는 이런 식이다. 필명과 좋아하는 만화가, 만화를 이야기하는 것. 비좁은 방 안에는  에바 티셔츠를 입은 오혜성, 아톰 귀걸이를 한 여자애, 가필드 넥타이를 맨 아저씨, 스누피  시계를 찬 택진오빠, 뽀빠이 양말을 신은 란마가 낮은 상 주위로 빙 둘러 앉아있다. "넌 무슨 만화가를 좋아하니?" PASS에 이제 막 들어온 신혜에게 그들이 묻는 질문이다.

만화 동아리 「걸쭉」의 회원 김진영(24)씨. <언플러그드  보이>의 주인공 강현겸 열쇠고리를 가방에 매달고 있다. "<슬램덩크> 그린  이노우에 다케히코, <블론드>의 오자키  미나미, <써퍼>의 나리타 이나코를 좋아해요." 모자를 눌러쓴 옆자리의 정인숙(23)씨는  소중한 이름을 부르듯 작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말한다. "박희정님하구요. 이향우님이요, 우주인 그리신."

만화 동아리 모음 사이트 카클, 아세요?

「걸쭉」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96년 겨울.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다섯 명이 모여 본격적으로 프로를 지향하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동아리 안에서 이들은 서로를 Joker, Ray, Virus, Sapyro, Joy라고 부른다.「걸쭉」은 "오래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걸쭉하게 연결된 관계"를 추구한다. 이후로 몇 명은 휴가를 내기도 했고, 신입 회원이 들어오기도 했다. 지금은 Virus  김진영씨, 별나라대왕 정인숙씨, Sapyro 김주희(24)씨 세 명이 정예 멤버다.

마음이 맞는 몇몇 사람이 동아리를 만들어 회지를 내고 만화를 공부하는 것은 이제는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걸쭉」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신입회원 정인숙씨는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이 혼자 하는 공부보다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고 말한다. "혼자 작업하기는  힘들고 어려우니까요. 관심사가 같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기도 하고."

중고등학교·대학교의 만화 동아리는 동아리방이 있고 학교의 지원도 있는 반면 사설 동아리는 마땅하게 모일 만한 장소를 찾기 어렵고 자체 지원금으로 꾸려 나가야 한다. 상대적으로 모임을 운영하기 어려운 사설 동아리는 홈페이지를 꾸며 온라인 모임을 갖고 홍보도 한다. 만화 동호회  홈페이지들을 깔끔하게 모아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만화 동호회 및 만화 관련 홈페이지 모음  카클(http://www.kacl.co.kr)이다.

"넌 무슨 만화를 좋아하니?"

어떤 만화를 좋아하냐는 진부한 질문에 정인숙씨는 "깨달음을 주는 만화를  좋아한다"고 진지하
게 말한다. "재미도 있고, 읽고 나서 감동과 교육의 효과까지 있는 만화가 좋아요. 박희정님의 호
텔 아프리카처럼." 얌전한 첫인상의  김진영씨는 의외로 남자 동성애물,  흔히 말하는 야오이물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김씨가 지난 회지에  실었던 <소문대로 호모가 된 사나이>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렇지만 아직도 동성애는 주류에서 인정받기  힘든 장르임이 틀림없다.  인터넷에는 야오이 만화 사이트가 몇 개 있지만 들어가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회원제인 데다가 가입 절차도 수월하지 않다. 동성애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이른바 사상  검증을 받고 나서야 가입할 수 있다.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자구책이다.

제법 알려진 우리 나라의 동성애물이라고 해야 작가의 지명도에 힘입은  원수연의 <Let Die>정도일까. 김씨는 남자 동성애를 다룬 <Let Die>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원수연님의 만화는 이런 것도 연재될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놀랐어요."

배고픈 만화가, 행복한 꿈

<TOON>의 오혜성은 꼭 사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바로 마법 참참슈트. 상당한 고가의 이 참참슈트를 사기 위해 혜성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그의  소원을 알게 된 PASS 사람들도 혜성을 도와주고, 드디어 혜성은 마법 참참슈트를 사고야 만다. 좀더 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김진영씨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김씨는 <브론즈>의 비디오 CD와 음악 CD 를 사고 싶었다. 전부 세 장짜리 비디오 CD를 사려면
목돈이 필요했다. "아직 일본  음악 들여오는 게 불법이기 때문에 비싸요. CD 한 장에 삼사만원씩 하죠." 일반 사람들이 보기엔 혜성이나 김씨가 그토록 절실하게 돈을 모아가며 '가지고 싶어하는 물건'이 낯설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그들만의 코드로 이해될 수 있다.

만화에서는 재미있게 과장돼 그려졌지만, 실제로 만화 동아리를 꾸려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다섯 호를 낸 회지를 만드는 비용은 인쇄비만 해도 한 번에 80만원씩이 들어간다. 동인지가 많아지면서 갈수록 고급화되는 회지 비용을  대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미술 재료  같은 건 확실히 비싼 게 좋으니까. 아르바이트를  해서 꾸려나가긴 하는데 힘들죠. 집에서도  별로 도움을 주지 않아요."

정인숙씨는 본격적으로 만화공부를 하려고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직해서 동화  작업을 맡았었다. "만화를 그리고 싶은데 미대엔 못 가게 했거든요. 그래서 좋아하는 만화를 할 수 있겠다 싶어 취직을 했는데 6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씬과 씬을 연결하는 동화 작업이, 힘은 엄청 드는데 돈은 정말 조금밖에 안 줬어요. 용돈도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비용은 어떻게든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프로 만화가를 지향하는 이들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내가 정말 만화가가, 프로가 될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려온 김진영씨는 요즘 들어 불안한 마음도  든다. "옛날에는 스무 살만 넘으면 당연히 만화가가 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지난 5월에 이슈 공모전에 출품했었는데 떨어졌거든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들기도 하고…." 만화가로 데뷔하는 경로는 공적인 매체, 즉 만화 잡지 등에 자기 작품이 실리는 것이다. 공모전에 몇 번 출품했지만 번번이 떨어진 김씨는 고민스러운 표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일이 많아도  만화를 그리겠다는 생각만은 변함이 없다.  "만화를 그리겠다고 결심한 건 기억도 안 날만큼 옛날이에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는  만화책을 본 적도 없거든요. 신기하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자신이 운명처럼 선택한 길을 자랑스러워하는 정인숙씨의 웃음이 미덥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김진영씨의 얼굴에도 이미 고민의 흔적은 지워져 있었다. 그들이 바라고 사랑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오로지 만화, 그 한 가지이기 때문에.

조혜원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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