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미디어
한국 언론의 개척자, 이상협
김진현 기자 | 승인 2018.05.21 00:03

 

“이상협은 우리나라 언론계 개척자였다. 일제때 우리나라 신문기자쳐놓고 그의 부하가 아니었던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1991년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서울야화’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를 작성한 사람은 1933년 매일신보에 입사해 당시 부사장이던 이상협과 함께 일했던 조용만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다.

▲ 이상협의 생전 모습.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 3면에 찍힌 사원씨명(社員氏名)에는 한 사람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 논설반 이상협. 편집국장 이상협. 사회부장, 정리부장 이상협. 게다가 이상협은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다. 한국 언론사를 연구한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는 1992년 신문과 방송에 쓴 ‘인물로 본 한국언론 100년’에서 이상협을 ‘신문계의 귀재로 불릴 만큼 편집과 경영에 뛰어난 수완을 보였으나 글은 별로 남기지 않았던’ 사람이라 평가했다. 1970년 4월 1일 동아일보 좌담회 기사에서 동아일보 첫 편집국 기자였던 이서구는 이상협을 ‘신문제작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없는 당대의 귀재였지’라고 평한다. 여러 직책을 맡길 만큼 기자로서 역량이 뛰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 동아일보 창간호, 사원씨명에 적혀있는 이상협(李相協)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상협은 신문 제작을 매일신보에서 배웠다. 1912년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입사했다. 1919년 매일신보에 입사한 뒤 동아일보 창간기자로 옮긴 유광렬은 1967년 6월 기자협회보에 이상협이 이모 고영희의 소개로 매일신보에 입사했다고 썼다. 고영희는 이완용 내각의 탁지부 대신이었다. 고영희가 당시 농상공부 대신 조중웅에게 자신의 조카 이야기를 했고 조중웅이 매일신보의 사장이던 요시노 다자에몬에게 이상협을 소개했다. 시쳇말로 ‘낙하산’ 입사지만 실력은 뛰어났다. 입사 4년 만에 편집부장이 됐다. 이상협은 입사 후 자신이 쓴 소설 <눈물>, 번안 소설 <정부원>과 <해왕성> 등을 연재한다. 유광렬이 회고록 <기자 반세기>에 적었듯 당시 기자들은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해 논할 수 없었기에 소설로 야망을 발산했다. 이상협은 소설 연재를 발판삼아 입사 3년 만에 사회·문화를 담당하는 연파주임이 된다. 이광수의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한 것도 이상협이었다. 조용만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서울야화’ 연재에서 관련 일화를 소개한다. 이상협이 매달 원고료 20원을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이광수에게 부쳐줘 학비로 썼다고 한다. 이상협은 편집부장이 된 후에는 기사로 이름을 날린다. 2014년 4월 신동아 기사는 ‘고종이 승하한 다음 날부터 40일 가까이 하루도 빼지 않고 지면을 덮은 덕수궁의 장례 기사는 거의가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고 소개한다.

동아일보 창간의 주역으로
매일신보에서 승승장구 하던 이상협은, 1919년 돌연 회사를 그만둔다. 조용만은 <울 밑에 선 봉선화야>에 ‘이상협이 매일신보 2층에서 독립 만세를 보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고 적었다. 3·1운동이 청년 이상협의 마음을 흔들어 놨다. 총독부 기관지를 나오게 된 계기였다. 당시 이상협은 조선광문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1965년 9월 22일 자 중앙일보 ‘신문개척기의 귀재 하몽 이상협’ 기사는 이상협이 최남선이 만든 광문회를 오가며 민족의 미래에 대해 자주 논했다고 적고 있다. 3·1 운동을 주도한 죄로 최남선이 구속되자 이상협은 그가 일하던 신문관 인쇄소 일을 임시로 맡는다.

인쇄소에서 일하던 이상협은 보성중학교 동창 진학문에게 ‘총독부가 민간신문 발간을 허용해줄 것 같다’는 소식을 듣는다. 동아일보 초대 학예부장 겸 정경부장이 진학문이다. 그는 당시 오사카 아사히신문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후 이상협은 민간 신문 발간 준비를 한다. 발간비용은 최남선의 동생 최두선이 해결했다. 당시 교육 사업으로 명망을 얻은 김성수에게 투자 약속을 받는다. 진학문의 말대로, 1920년 1월 총독부는 동아일보 발행을 허가한다. 함께 허가받은 신문이 조선일보와 시대일보다. 당시 일본이 민간신문 발행을 허락한 건 3·1 운동 이후 무분별하게 유포되던 ‘지하신문’ 때문이다. 지하신문 배포를 통제하기 위해 총독부는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해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다. 당시 도쿄 아사히 신문은 지하신문 배포에 대해 ‘조선에서 벌어지는 언론억압은 세계에 유례가 없어 어용신문 이외에는 발행을 불허하고 있다’고 원인을 분석했다. 

발행인 겸 편집인 이상협은 동아일보 지면구성을 총괄했다. ‘동아단편’, ‘횡설수설’, ‘휴지통’ 등을 만들었다. 휴지통은 아직도 동아일보 사회면에 고정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파원 이상협
이상협은 현장을 중시했다. 1966년 4월 5일 중앙일보에 실린 ‘1920년대의 명 사회부장’ 기사에 관련 일화가 나온다. 화재현장을 찾은 수습기자는 취재를 어떻게 할지 몰라 이상협에게 전화를 건다.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기도 했던 이상협은 “기자는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거야. 불길 속에 기사도 있어”라고 답한다. 불구경만 하지 말고 현장에서 적극 취재하라는 의미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불 속으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22년 8월 6일 동아일보는 시나노 수력전기회사가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상협을 특파했다고 기록한다. 본인이 편집국장이었으니 특파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갔다고 보는 편이 맞는다. ‘특파원’ 이상협은 이틀 뒤, 본래 취재하려던 내용과 다른 내용이 담긴 전보를 보낸다. ‘노동자들을 인솔하던 간부가 음식과 물품을 비싼 값에 강매하고 학대·협박했다. 부산에서 홋카이도로 일하러 가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도주했다.’ 현장에서 적극 취재해 또 다른 기사를 발굴해냈던 것이다.

이상협이 시나노 학살사건을 조사하자, 일본 당국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당시 이상협이 전한 수력전기회사 기사는 48건이다. 첫 기사에는 ‘차기회에 철저단속’ 하겠다는 내무성 당국의 성명과 조선인 근로자 처우 개선을 약속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는 당국의 부인을 그대로 믿지 않고 취재를 계속한다.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사>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도쿄 유학생들이 파견한 학살사건조사회 소속 나경석, 김약수와 함께 학살사건을 조사한다. 이후 ‘겟토 답사기’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과 학대에 대해서 보도한다. 노동자들은 계약상 받기로 한 왕복 여비를 받지 못했다. 다쳐도 치료비를 지급하지 않았고, 휴가도 없었다. 노동자들은 ‘지옥실’이라는 곳에서 감금되어 감시당하며 근무했고, 도망치다 잡히면 학대와 고문을 받아야 했다.
 

▲ 이상협이 쓴 ‘혈등(겟토) 답사기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난다. 이상협은 다시 일본으로 갔다. 동아일보 1923년 9월 11일 자는 이상협이 동경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보도한다. 1970년 4월 1일 21면에 실린 기사를 보면 당시 이상협이 일본에서 어떻게 취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이상협은 오사카에서 동경지방 이재조선인구제회가 모금한 돈으로 위문품을 산다. 면보 1만 2500개와 통조림 7300개, 사이다 2400병과 식량 2만 2100섬. 위문품을 사 배에 싣고 요코하마로 간 이상협은 9월 10일 도쿄에 도착한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여드레 만이었다. 위문품을 동포들에게 전하고 그는 취재에 나선다. 일본인이 조선인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내용 등을 여섯 차례 회사에 전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이를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한다. 이상협이 전달한 내용 중 보도할 수 있었던 내용은 지진 생존자 명단뿐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를 보면 1923년 10월 18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동아일보 이상협 귀선후의 동정에 관한 건’으로 이상협의 동정을 기록했는데, 이상협이 “감옥에 가더라도 진상을 천하에 알리고자 한다”고 말했다고 적혀있다. 조선총독부가 기록한 ‘1923년 치안상황’ 문서는 당시 언론탄압을 보여준다. 총독부는 한국에서 관동 대지진에 대해 쓴 602건의 기사를 금지했다.

한국 신문사에 족적을 남기다
이상협은 1924년 4월 동아일보를 떠난다. 1월 3일 자 사설이 문제를 일으켰다. 이광수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사설은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논란을 일으켰다. 독립신문이 반대 견해를 표하고 각종 민간단체가 반대·불매 운동을 했다. 동아일보는 4월 27일 사설을 통해 이상협 등 간부들이 사표를 제출했다고 밝힌다.

동아일보를 떠난 이상협은 그해 9월 조선일보 편집고문이 된다. 이상협은 ‘신문의 귀재’답게 조선일보를 빠르게 바꾼다. 10월 13일부터 ‘멍텅구리 헛물켜기’라는 네 컷 만화를 연재한다. 당시 한 컷짜리 만화는 있었지만 네 컷 만화를 실은 건 조선일보가 처음이었다. 이상협이 아이디어를 냈고, 산수화가 노수현이 그림을 그렸다. 11월 23일부터는 한국 신문 중 처음으로 조·석간을 발행했다. 조간 2면 석간 4면으로 제작했다. 이상협의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기자 최은희를 채용하고 김준연을 소련에 특파했다.

▲ 조선일보에 실린 멍텅구리 헛물켜기 (출처=디지털만화 규장각)

 
하지만 이상협은 불운했다. 자신이 변화시킨 조선일보를 뒤로하고 또 회사를 떠나야 했다. 1925년 9월 8일 조선총독부가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을 문제 삼으면서 사설을 쓴 신일용을 구속하고 조선일보 무기한 정간 조치를 내렸다. 정간조치를 해제하려면 사회주의 색체를 띤 기자와 사원을 해고하라고 요구했다. 신일용, 박헌영 등 20명이 해고됐다. 이때 이상협도 기자들과 함께 회사를 떠난다.

 조선일보에서 나온 이상협은 1926년 9월 18일 총독부에게 중외일보를 창간 허가를 받는다. 중외일보는 앞서 허가받은 민간 신문 중 시대일보를 인수해 이름을 바꿨다. 당시 시대일보는 자금난을 겪고 폐간한 상태였다.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7>에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최남선이 운영하던 시대일보가 자금난을 겪고 폐간하자 당시 산업조선위원회 전라북도 위원이었던 백인기가 자금을 대 시대일보를 인수했다. 백인기가 인수한 중외일보 주간을 이상협이 맡았다. 이상협의 중외일보에서 한풀이하듯 신문을 더 과감하게 편집한다. 농촌독자를 위해 농업란을 만들고 중외일보에도 네 컷 만화를 도입한다. 1929년 9월 17일부터는 지면을 늘린다. 조·석간 4면씩, 하루 8면을 발행했다. 중외일보가 8면을 찍어내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지면을 8면으로 늘렸다. 그러나 중외일보는 ‘가장 값싸고 좋은 신문’을 내세워 염가정책을 고수하다 1931년 재정난으로 폐간한다. 당시 월 정기구독료가 1원이었는데, 중외일보는 60전을 받았다.

중외일보가 폐간되기 한달 전 이상협은 중외일보를 떠난다. 두 번의 필화 사건에 휘말리면서 이상협은 벌금을 두 차례나 받았고 총독부의 퇴진 압박이 지속됐다. 조용만이 회고한 당시 이상협은 ‘얼굴이 초췌하고 양복저고리 소매 끝이 닳아 너덜거리고 구두도 다 헤진 헌 구두’를 신고 다녔다. 매일신보에 부사장직으로 복귀한 것이 1933년이다. 3년간 이상협은 가난으로 고생했다. 금전적 어려움이 그를 다시 일본 기관지 매일신보로 돌아오게 만들었을 테다. 1945년 11월 23일 미군정이 매일신보의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꿀 때까지 이상협은 부사장으로 지낸다.

이상협이 한국 언론사에 남긴 족적이 크지만 알려지지 않은 건 친일행적 때문이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그의 이름이 실려있다. 1949년 2월 혁신출판사에서 출간한 <민족정기의 심판>에 그가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으로 참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41년 설립된 조선임전보국단은 태평양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했다. 1948년 출판된 <친일파군상>도 그가 ‘내선일체’ 강조 등 시국을 홍보하는 애국단체시국간담회 조직에 참여했던 것으로 기록한다. 그는 1949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뒤 구속 수감됐다 풀려났다. 후에 조용만은 당시 매일신보를 회상하며 ‘몸을 판다’는 의미의 ‘매신(賣身)’이라 부르며 반성한다고 했다. 그의 친일 행각 대부분은 매일신보에 있을 때 행해졌다. 청년 이상협이 3·1운동을 보고 회사를 그만뒀다면, 필화와 검열에 시달린 후 이상협은 일제를 위해 일했다.

일제강점기 후반 친일행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그가 1920년대 한국 언론에 남긴 족적은 선명하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뿐 아니라 후에 <서울신문>이 되는 <매일신보>와 <중앙일보>가 제호를 계승한 <중외일보>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신문제작, 경영, 취재 등 다방면으로 한국 언론사에 기여했다. 그는 광고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동아일보 내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일본 광고를 받아 싣기도 했다. 조선일보 최장수 고정란  ‘팔면봉’도 그가 만들었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  |  대표전화 : 02-3277-2267  |  팩스 : 02-3277-2908
발행인·편집인 : 이재경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경
Copyright © 2013~2019 스토리오브서울.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