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가이드라고 가정하고 영어로 창덕궁 관광 안내문을 작성하시오."

이것은 서울여고 1학년 영어과 수행평가 보고서 주제이다. 교육부에서 발행한 교직원 연수 자료에 따르면 수행평가란 평가자가 학습자들의 학습과제 수행과정 및 결과를 관찰하고, 그 관찰 결과를 전문적으로 판단하는 평가 방식이다. 지금까지 시험 답안만을 놓고 평가하던 방식과는 달리 실험, 실습 보고서 평가, 토의과정 평가, 논술 및 서술형 답안 평가, 수업 태도 평가 등을 점수화한다.

정부가 98년 10월 발표한 '새 학교문화창조-교육비전2002'의 계획은 학교교육을 정상화시키고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해 2002학년도부터 각 대학들이 학생들의 다양한 소질과 잠재력을 평가에 반영하도록 요구한다. 이에 따라 수행평가의 결과가 '2002년 대학입시'에서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게 된다. 99년 1학기부터 전국 중학교와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시작된 수행평가는 학교교육정상화를 목표로 한 교육부의 기대와 다르게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낳고 있다.

대학생 과제보다 어려운 고교 수행평가

"모든 과목의 수행평가 과제를 해야 하고 게다가 주제도 안락사, 풍수지리와 수도의 연관성, 지역갈등을 해결하는 법 같이 너무 어려워요." 서울 K 여고 1학년 조지영 양은 수행평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다. 인문계 고교와는 달리 예고의 경우 학생들의 고충은 더욱 심각하다. "저희는 실기 수업 때문에 숙제할 시간이 부족한 데도 매 시험마다 30%씩 반영해야 한다면서 수행평가 과제가 많아요. 수업시간에 아무런 준비 없이 시에 내포된 뜻을 쓰는 것도 있었어요. 집에서 궁중무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간 경우에는 자료가 부족해서 애를 먹었어요." 서울 덕원예고 1학년 최주희 양의 말이다.

서울의 ㄷ여고 윤리과 수행평가 보고서의 경우 '뱀이 몸을 사용하여 I love you를 썼다.  윤리 교과서에서 이 상황에 맞는 이론을 찾아서 쓰라'는 황당한 주제도 있다. 이 과제를 했던 학생의 과외를 맡았던 이화여대 2학년 김 모양은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학생이 숙제하기 힘들어해서 도와주기는 했지만 이렇게 어려운 걸 혼자 할 수 있는 학생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학생들의 불만과 맞물려 일부 지역 학원에서는 과중한 학생들의 수행평가 부담을 덜어 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받고 수행평가 과제를 대행해 주기도 한다. 강남의 옥탑 학원 관계자는 "우리 학원에서는 하지 않지만 인근 다른 학원들은 국어나 과학 분야의 종합적인 자료를 모아두고 수행평가를 대신 해준다는 명목으로 학생 끌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털어놓았다. 학원뿐만 아니라 인터넷 사이트에서도 수행평가 대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인터넷 학원인 한솔 학원(http://www.eduopen.co.kr)에서는 수행평가 솔루션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평가 대행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코다(http://www.coda.co.kr)에서는 각 학교별 수행평가 문제를 입수, 답안 작성에 필요한 정보를 구해주고 있다.

한 번에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는 교육부

이런 수행평가제도는 올 고교 1학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절대평가제와 맞물려서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각 고등학교에서는 더 많은 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높은 점수를 주려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에 따라 학교 내 성적 올려주기 현상이 나타나자 급기야 교육부가 지난 9월 전국 1천9백여 고교 중 1천1백여 곳을 대상으로 올해 1학기 성적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10.3%인 1백17개 고교에서 성적을 부적절하게 처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구일고 '공통사회' 교사 배은주(32)씨는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도가 저조하여 수행평가 지도가 힘들다고 말한다. "시사적 문제인 'IMF', '국내 체류 외국인의 법적  지위', '자원 봉사' 등을 토론 주제로 다루기 때문에 학생들의 참여도가 높을 거라 예상했어요. 하지만 한 반에서 10명 정도만 토론에 활발히  참여하더군요. 그렇다고 점수를 안 줄 수는 없잖아요. 학생의 관심도가 떨어지다 보니 조별 과제도  '무임승차'하는 학생들 때문에 수행평가를 하기에는 힘이 듭니다."

개별 학교의 특성과 과목에 따라 학생들의 참여도에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조별 과제 등 여러 학생이 공동 작업을 하는 경우 학생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 한보현(서울 구일고 1학년)양은 "조별로 할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점수를 받는 애들도 있어요. 그런 일을 선생님한테 이를 수도 없고 그래서 수행평가가 좀 더 공정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우리 나라 교육의 고질적 문제인 과학 실험 기자재 부족의 문제는 수행평가 시행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조별 실습을 하면 모든 학생들이 실험을 할 수가 없어서 일부 학생이 하는 실험을 다른 학생이 지켜보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서울 신림고 공통 과학 교사 손은주(38)씨는 수행평가 현실화의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교육부는 서울지역 고등학교의 경우 수행평가 반영 비율을 매 학기 당 과목별 총점의 30∼40%로 결정하였고, 수행평가의 반영 비율을 각 학교 자율에 맡겼다. 이에 따라 공정성 논란과 함께 수행평가 회피 현상이 일어나 대부분 학교에서 여러 과목들의 수행평가를 주관식 시험으로 대치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같은 현상은 교사 1인당 지나치게 많은 학생 수와 업무부담, 정확한 기준의 모호함 등으로 인하여 주관식 답안 채점의 공정성 유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수행평가를 서술형 주관식 시험으로 대치하고 모범 답안을 만들어 놓아도 서술형 주관식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답안을 채점하기엔 어려움이 많습니다." 서울 구일고 국어교사 임승천(51)씨의 말이다.

수행평가를 바라보는 교사들의 우려는 다음과 같은 자료에도 알 수 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전국 초·중·고 교사 1천 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10월 6일 발표한 '교육과정 운영실태 및 교원인식조사'에 따르면, 수행평가의 의의는 인정하지만 현장 여건상 무리거나 부적절한 시도라고 대답한 교원이 60.8%에  달했다고 99년 10월 국민일보가 보도했다. "학교에서 맡고 있는 일이 많은데 많은 학생들의 수행평가를 하다 보면 지치고 맙니다." 서울 신림고 공통 과학 교사 손은주(38)씨는 고충을 토로했다.

교육계의 많은 기대와 함께 출발한 수행평가가 시행 원년부터 폐지론이 대두되는 등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수행평가는 사교육비 절감, 점수 위주의 평가방법 개선, 학생의 다양한 잠재력 개발 등의 원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채 교사의 업무 부담과 또 다른 사교육비 지출로 이어지고 있다.

김지영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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