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시대의 북한은 개혁개방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특히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는 “우리는 제국주의자들이 떠드는 개혁, 개방 바람에 끌려들어 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개혁, 개방은 망국의 길입니다. 우리는 개혁, 개방을 추호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강성대국은 자력갱생의 강성대국입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개혁개방에 적대적이었다.

2000년대 들어와 북한은 7‧1경제관리개선조치를 실시하고 개성과 금강산 특구를 지정하는 등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와 유사한 정책을 추진했지만 개혁과 개방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계속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개혁개방에 대한 북한의 부정적 태도는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확인된 바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총비서와의 단독정상회담을 마친 후 방북대표단과 오찬을 같이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측은 신뢰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 북은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불신의 벽이 있었다. 그 중에서 예를 들면 개혁개방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그렇다. 어제 김영남 위원장과 면담에서도 그렇고 오늘 정상회담도 그렇고.”

대표단으로 함께 방북한 이상열 민주당 정책위의장도 북측 인사들과의 간담회 후 그들이 “개혁과 개방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고 개혁과 개방을 번영의 길로 나간다는 게 아니라 체제 전복의 길로 나간다고 보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김정일 사망 직후인 2012년 1월 16일 양형섭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은 AP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김정은이 지식기반경제를 만드는데 집중하고 중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의 경제개혁 사례를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고위간부의 이 같은 발언은 김정일 시대에 상상하기 어려웠다.

김정은 위원장이 해외경제, 특히 중국경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는 스위스 유학시절부터였다. 1988년부터 2001년까지 북한에 체류하면서 김정일의 요리사로서 김정은과 여러 차례 만났던 후지모토 겐지는 그의 저서(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서 김정은이 2000년 8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증언한다.

“후지모토, 위(김정일)에서 들은 이야기지만, 지금 중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 같아. 공업이나 상업, 호텔, 농업 등 모든 것이 잘 나가고 있다고 위에서 얘기하더군. … 우리나라 인구는 2300만 명인데, 중국은 1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를 가졌는데도 통제가 잘되고 있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아. 전력 보급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13억 명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농업의 힘도 대단하고, 식량 수출도 성공적이라고 하더군.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안 되겠지?”

2000년 8월은 김정일 총비서가 17년 만에 중국을 다시 방문해 장쩌민(江澤民)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정상회담을 개최한 지 3개월 되는 시점이다. 당시 김정은은 김정일 총비서로부터 발전된 중국의 모습에 대해 전해 들었다.

김정은은 그날 저녁 11시경부터 다음날 오전 4시경까지 후지모토 겐지와 북한의 현실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에 대해 5시간이나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김정은에 대해 일본인 요리사는 “북한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중국의 방식을 본보기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았다”고 적고 있다.

▲ 김정은 위원장이 베이징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촌(中關村)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 (출처=로동신문, 2018년 3월 28일)

김정은 위원장은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 스위스에서 유학했다.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1998년 6월 “후지모토, 외국의 백화점이나 상점에 가서 보니 어디를 가나 물자와 식품들로 넘쳐나서 놀랐어. 우리나라 상점은 어떨까?”라고 질문해서 놀랐다고 증언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2000년 8월에도 후지모토 겐지에게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비해 공업기술이 한참 뒤떨어져. 우리나라에서 내세울 것이라곤 지하자원인 우라늄 광석 정도일거야. 초대소에서도 자주 정전이 되고 전력 부족이 심각해 보여”라고 말했다.
 
이처럼 북한경제의 낙후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 이유는 어린 시기에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유럽 및 일본에 가족여행을 감으로써 북한과 외부세계를 비교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로 인해 ―프랑스 유학 및 장기체류를 통해 자본주의를 직접 체험하고 나중에 최고지도자가 되어 개혁개방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중국의 덩샤오핑과 장쩌민처럼― 개혁과 개방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판단된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의 2012년 1월 28일자 발언록을 입수해 그가 북한 최대의 터부 가운데 하나인 자본주의적 방식도입을 포함한 경제개혁 논의를 촉구했다고 같은 해 4월 16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의하면 김정은은 “경제분야의 일꾼과 경제학자가 경제관리를 이런 방법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도 색안경을 낀 사람들에 의해 자본주의적 방법을 도입하려 한다고 비판을 받기 때문에 경제관리에 관한 방법론에 의견을 갖고 있어도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터부가 없는 논의를 통해 북한에 맞는 경제 재건책을 찾아내도록 지시했다. 북한 노동당 관계자는 이에 대해 “김정은 동지가 최근 당 간부들에게 중국의 방법이든 러시아나 일본의 방법이든 활용할만한 방식이 있다면 도입하도록 지시했다”고 마이니치신문에 말했다. 마이니치신문이 입수한 김정은 발언록의 내용은 양형섭의 AP통신 인터뷰 내용과 상통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2년 1월 28일 경제 재건책을 수립하도록 지시한 직후인 같은 해 2월초부터 ‘김정은 서기실’이 2019년까지 완전 개혁개방을 실현하기 위한 로드맵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2012년 2월 16일 김정일 생일 70돌 기념행사 직후의 고위급 간부회의에서 “우리 인민들을 7년 안에 남부럽지 않은 인민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이후 북한주민이 ‘남부럽지 않은 인민’이 되지는 못했지만 북한경제가 상당한 중속성장을 이룩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작년까지의 지속적인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로 북한은 국제사회의 초고강도 제재에 직면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북미 수교,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및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전면해제에 합의한다면 북한도 중국과 베트남이 경제개방으로 이룩했던 수준의 고속성장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1. 정성장, “김정은 체제의 경제 개혁․개방 전망과 과제,” 『국가전략』, 제18권 4호(2012).
2. 후지모토 겐지 저․ 한유희 역,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 서울: 맥스media, 2010.
3. 임을출, “김정은의 경제 리더십,”정성장 외, 『김정은 리더십 연구』, 성남: 세종연구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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