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교시 외국어 영역 시간입니다. 마지막 정성을 다합시다."
수능 고사장에서 감독관이 하는 말이 아니다. 2000학년도 수능 시험이 치러지던 11월 17일. 여의도의 한 교회 풍경이다. 교회 안은 수험생을 둔 어머니들로 빼곡하다. 그들의 등뒤에는 한결같이 코팅된 형광색 종이가 매달려 있다. 'xx교구 수험생 김OO, 학부모 박OO. 하나님 제발 도와주세요, 네!'

사회자의 인도로 기도가 시작되자 장내는 떠나갈 듯하다. 어머니들은 서로 경쟁이나 하듯 큰 소리로 기도를 한다. 옆 사람과 대화가 안될 정도다. 교역자들은 자신이 맡은 구역을 돌며 어머니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 준다. 일렬로 된 의자에 빈틈 없이 앉은 어머니들 사이로 교역자들은 신을 벗고 넘어 다니고 있다. 사방에서 울리는 통성기도 소리에 오싹하기까지 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신들린 사람들로 착각할 정도다.
"수능 당일 기도회는 20년도 더 됐습니다. 본당에만 2만 여명 정도가 모이고 각 지역에서는 위성중계로 참여합니다. 다 합치면 5~6만 명쯤 될 겁니다."
여의도 S교회 박정태 교무팀장의 말이다.

사찰도 별로 다르지 않다. 같은 날 그곳도 자녀를 시험장에 보내고 기도하러 온 어머니들로 가득하다. "아이들 시험에 맞춰 불공을 드리는 중"이라는 한 어머니는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애들이 더 힘들죠. 제가 여기서 소홀히 하면 애도 그럴 것 같아서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한다.

어머니들은 자녀의 시험시간에 맞춰 불공을 드린다. 쉬는 시간이 되어도 어머니들은 쉬려는 기색이 없다. 무릎은 쑤시지만 계속 절을 한다.

한국에서 수능 시험은 고3들만이 치르는 시험이 아니다. 자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대부분의 부모들은 막대한 과외비를 지출한다. 수험생 자녀에게 드는 과외비가 엄청나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족문화학회가 고3 수험생과 부모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85%가 학원수강을 포함한 과외수업을 시켰고, 생활비 중 평균 32.8%를 자녀교육에 바쳤다. 응답자의 52%는 이로 인한 경제적인 부담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부모들은 자녀의 입학과 동시에 수능 시험을 위한 뒷바라지에 들어가고, 그 하이라이트는 수능 당일 크고 작은 사찰과 교회에서 열리는 기도회다.

자녀는 고3병, 어머니는 '수험생 수발 증후군' 성곡학술문화재단이 98년에 발표한 '한국인의 기원행위에 관한 사회심리학적 연구'를 보면 40대 이상 집단이 가장 절실하게 기원했던 내용은 '자녀입시 및 공부'로 응답자의 32%가 답했다. 수험생을 둔 어머니들은 자녀 뒷바라지 틈틈이 사찰이나 교회에 찾아가 기도를 한다. '고3 수험생을 위한 40일 기도회', '수능백일관음기도회'등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익숙한 종교행사가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쯤 되니 고3병에 걸리기는 부모도 마찬가지다. 가족문화학회의 조사에 따르면 수험생 어머니의 94.4%가 하루평균 3~5시간을 잔다고 답했고, '수험공부는 엄마에게 달려있다'고 믿는 사람이 63%나 됐다. 이러다 보니 몸이 온전할 리 없다. 자녀가 고3병에 걸리듯 어머니는 '수험생 수발 증후군'이라는 신종 정신병에 시달린다. 실제로 80%의 어머니가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나른하다'고 답했고, 65%가 소화불량, 40%가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호소했다. 정신과 전문의 박영숙씨(이대 동대문 병원)는 "어머니들은 아이들 입시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몸이 아파도 병원을 찾지 않습니다. 자녀가 대학에 떨어 지거나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을 경우, 갑자기 입원하는 어머니들이 늘어납니다"라고 지적했다.

시험을 못 본 자녀의 부모만 병원을 찾는 건 아니다. 올해 수능 시험 후 쌍둥이 자녀가 예상보다 시험을 잘 쳤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숨진 일도 있었다. 이는 수능 시험이 자녀 성적에 관계없이 부모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을 말해주는 하나의 사례다.

어머니의 사회적 위치 상승과 직결된 문제 입시철만 되면 열병을 앓는 사회. 아니 그때가 되면 그동안 계속된 병들이 폭발하는 곳. 어머니들의 삶은 가정이라는 집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녀를 성공시키는 것은 어머니를 사회우등생으로 승격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자녀의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자녀를 대학에 입학시키는 문제는 그들의 사회적 위치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23일부터 4일간 학여울 국제무역전시장에는 '대학입시정보박람회'가 열렸다. 학생보다 어머니가 더 많이 찾았다. 그들은 입시생처럼 전국 각 대학의 창구에서 상담을 받는다. 두 손엔 대학 안내물과 입학원서가 가득하다. 전시장 밖 곳곳에는 다리품을 팔다 지친 어머니들이 바닥에 걸터앉아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남편이 지방에서 근무 중인데 아이 때문에 1년 동안 한번도 안 갔다"고 말한 한 어머니는 "다리는 아프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다"며 자리를 떨치고 다시 부스 사이로 걸어갔다.

본격적인 원서접수가 시작되고, 온가족은 휴대폰을 동원해 '작전'을 펼친다. 대학별 고사 전날에는 어머니와 수험생은 여관방에서 새우잠을 잘 것이다. '누구나 다 하는 일인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박람회장에서 만난 한 어머니의 걸어가는 뒷모습은 너무나 씁쓸하다. 어머니들도 입학시험을 치루는 나라.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상희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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