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문인'이란 말이 낯설지 않을 만큼 유명한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일산 신도시. 새천년 민주신당에 영입된 여성들 가운데 가장 먼저 지역구(고양시 덕양구) 출마를 선언한 민족문학계열 소설가 유시춘(49) 씨도 매일 아침 일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나온다.

차의 시동을 걸고 확 트인 자유로를 지나 30분쯤 달리다 보면 어느새 여의도의 국회의사당을 유유하게 통과. 그러나 아직 그에게 국회의사당은 주차장으로 더 애용되는 곳이다. 차에서 내려 후문 쪽으로 10분 남짓 걸어가면 빌딩 숲 사이에 자리잡은 '국민정치 연구회'의 사무실에 도착한다. 1999년 3월에 출범한 '국민정치 연구회'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이들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축을 이룬 개혁적인 정치 세력이다. 유시춘 정책실장을 비롯한 '국민정치 연구회'의 여러 회원들이 신당 내의 진보세력으로 참여한다는 사실 때문에 언론에서는 이들을 김대중 정권의 '개혁 기관차'를 자임하는 '대안세력'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국민만이 좋은 정치의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정치가 욕먹을 만한 충분한 요인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냉소하거나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국가를 경영하고 있는 실질적인 주체가 바로 대의성을 지닌 정치인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소홀히 하면 손해를 보는게 당연하다는 것. 특히 여성들이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이제껏 여성에게 불리했던 많은 제도와 인습들이 여성들의 정치에 대한 낮은 인식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2000년 총선은 여성 정치참여의 원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는 신당의 여성창당준비위원으로 여성의 비례대표 의석 30% 할당제를 주장한다. 우리 나라도 여성 교육 1세기에 접어들었고 이미 많은 여성들이 전문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유독 여성의 정치 참여율은 후진국 수준을 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성 유권자가 전체 유권자의 과반수를 넘는 51.8%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지방자치 단체의 여성의원의 비율은 1.6% 에 불과하다. 여성국회의원 수도 3%를 조금 넘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여성이 정치에 진출하기 어려웠던 이유를 유시춘 씨는 우리 정치권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찾는다. 금권정치, 패거리 정치, 보수 정치의 높은 벽을 뚫고 정치에 참여하는 일이 특히 여성에게 더 어려웠다는 것. 그리고 여성 유권자조차 여성이 정치를 잘할 수 있다는 인식이 부족했던 점을 꼽는다.

"그러나 여성 유권자들의 인식부터 바뀌어 많은 여성 후보들을 당선시킨다면 우리 정치도 충분히 바뀔 수 있습니다." 그는 낡고 부패한 기성 정치를 개혁하는데 여성이 큰 몫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고학력 여성이 많이 살고 있는 일산 신도시에서는 두 명의 여성 지방자치단체 의원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여성 유권자의 힘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가 어려운 결심 끝에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할 수 있었던 이유도 점차 성숙해지고 있는 여성 유권자의 인식을 믿기 때문이었다. "비례 대표제로 공천받을 수도 있었지만 언제까지 던져주는 밥이나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냈습니다. 우리 여성은 이미 높은 정치 운동을 해왔습니다. 다만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못하고 세력화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유시춘 씨의 지난 30년 세월만 봐도 어떤 남성 못지 않게 치열한 사회운동을 해온 한 여성과 만날 수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73년,『세대』지에 투고한 중편「건조시대」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등단했다. 그후 13년 간의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거쳐 소설을 쓰고 민주화 운동을 해왔다. 그의 교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우산 셋이 나란히(1989)」,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다룬「안개 너머 청진항 연작(1995)」등을 비롯한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억압적인 체제에 희생당하는 인물이 많다. 파행적인 교육 현실에 고민하는 교사, 인권 단체 간사, 남북 분단으로 인해 희생당한 인간상, 남한 정권에 좌절하는 386….

그러나 이들은 모두 억압을 깨치고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한편 그는 1986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의 창립 총무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사회 운동을 시작한다. 당시 민가협 발족의 계기가 되었던 '김근태 사건'으로 김근태씨의 부인 인재근 씨와는 공동 총무를 맡아 함께 고생을 겪으며 절친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의 간부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994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와 민족예술인총연합회의 이사로 활동했다.

작년에는 민주화 운동의 동지이자 선배인 김근태 의원과 함께 고문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보상을 요구하는「이을호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발족했다. 1984년 당시 민주청년연합의 상임위원으로 연행되었던 이을호씨는 아직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이에 지난 10월 고문기술자 '이근안 자수'를 접하는 유시춘 씨의 감회는 남달랐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범죄자는 반드시 벌을 받고, 진실이 언젠가는 밝혀진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유시춘씨는 긴 안목에서 볼 때 사회가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지닌 사람이다.  그의 낙관적인 시각에는 어딘지 모르게 87년 '6월 항쟁'의 승리를 맛 본 자신감이 배어 있다. "최근 일어나는 변화들도 좋은 징조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얼마 전 연세대학교의 총학생회장으로 여성이 선출된 사실부터 남녀차별법이었던 '군복무 가산점'이 위헌판결을 받는 등의 일련의 사실들을 반기고 있었다. 특히 위헌 판결 결과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를 바로잡은 것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군 복무를 희생으로 보지 않습니다. 분단 국가에서 태어난 당연한 의무이자 성적 역할분담일 뿐입니다. 단, 국가와 군이라는 권력의 폭력이 문제라고 봅니다. 긍지와 명예를 갖고 복무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해야 합니다. 남성들이 한창 젊은 시절을 국가에 헌신하는 데에는 늘 고맙게 생각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헌 판결 이후에 흥분한 일부 남성들이 행정자치부 홈페이지를 해킹하는 등의 과격한 반응을 대해서는 "오랫동안 남성에게 유리하게 법 제도가 고착되어 왔기 때문에 작은 변화에도 진통이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면서 더 나아가 "실은 앞으로 고쳐야 할 것이 더 많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진리가 딱 하나 있는데 뭔지 하세요? 바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옳은 일에 몸을 던질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개인적이고 정치에 냉소적인 요즘 대학생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어느 세월에 바뀔 줄 알고…'라는 말로 얼마나 많은 실천들을 외면했을까. 지금도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해 작은 발판이라도 되고 싶다는 유시춘 씨. 그는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이 작은 관심과 실천이 아무 소용없을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김재은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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