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에 홀로 섰다. 부채 하나 손에 쥐고 소리를 시작했다. 목소리와 몸짓만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예술, 판소리. 그런데 여느 판소리와는 다르다. 소리꾼은 한복 치마 위에 블라우스와 재킷을 입었다. 기타와 퍼커션 악사가 무대 뒤편에서 반주를 맞춘다.

소리꾼은 “대한민국 갑신년 사천이라는 도시에, 세 명의 수상~한 놈들이 찾아왔는디! 때는 배고픈 신신자유주의, 차디찬 실용주의 시대로구나!”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천은 서울을 비유한 공간이다. 바로 지금, 여기를 배경으로 만들었다.

판소리 ‘사천가’는 소리꾼 이자람의 손에서 태어났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사천의 선인’을 바탕으로 대본을 썼다. 무대에서는 목소리 톤과 몸의 동작, 표정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15명의 캐릭터로 변신했다.

소리꾼은 한 명이지만 3명의 신, 착하고 어리숙한 순덕, 악독한 뺑마담, 뻔뻔한 목수쟁이까지 선악을 넘나드는 인간군상이 무대를 꽉 채웠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소리꾼은 냉혹한 이 세상에서 사람은 과연 착하게 살 수 있냐고 질문한다.

판소리를 전통으로 보는 이들에게 창작 판소리는 낯설다. 이자람은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음악도, 미술도, 건축도 전통에 갇히지 않는데, 판소리는 오랜 시간 전통에 갇혀 있었다. 전통 판소리는 있다. 하지만 판소리 자체가 전통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문화재이자 전통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판소리를 하고 싶었다. 그 결과물이 2007년 초연한 ‘사천가’다. 2011년 초연한 ‘억척가’와 2014년 초연한 ‘이방인의 노래’도 마찬가지. 십 수 년 간, 그는 현대감각에 맞는 판소리를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

창작 판소리가 완전히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국립창극단도 현대 레퍼토리로 인기를 끌고, 소리축제와 판소리경연에 창작 판소리가 속속 등장한다. 이자람이 특별한 이유는 젊은 여성 소리꾼이, ‘개인의 이름’을 브랜드로 걸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해석으로 작품을 올린다는 점이다.

‘사천가’와 ‘억척가’는 버전이 업그레이드되며 몇 년째 무대에 올랐다. 티켓은 거의 매회 매진을 기록했다. 미국, 프랑스, 호주에서도 선보였다. 판소리가 낯선 해외관객도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의 작품엔 판소리 특유의 해학이 담겨 있다. ‘억척가’에서 주인공이 이름을 바꾸는 대목이 있다. “글로벌 시대에 맞춰 영어이름이 좋겠구나, 스칼렛, 줄리엣, 스테파니, 안젤라, 산다~~라!” 관객들은 소리꾼이 영어이름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꾼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 이상 아이는 안 낳을테니 안나! 안나!”라고 외치며 팔을 휘저었다. 그렇게 주인공의 이름은 김안나가 됐다.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모진 풍파 속에서 사람이 변하듯 이름도 김순종에서 김안나로, 김억척으로 바뀐다.

▲ 이자람이 극본·연출·작창·작곡·음악감독을 맡은 창극 ‘소녀가. (출처: 국립창극단)

이자람의 작품은 시대의 고민을 담았다. ‘사천가’에서는 돈만 중요한 세상, 제정신으로는 착하게 살 수 없는 세태를 그렸다. ‘억척가’에선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억척스러워야 살아남는 세태를 표현했다.

처연한 목소리로 ‘세상은 점점 화려해져 가는데, 우리네 추억은 텅~텅~ 비어가고’, ‘사람으로 태어나 제 한 몸 돌보는 것이 때로는 악이 되고, 때로는 독이 되는’ 세상이라 노래했다. 그가 포착한 이 시대의 고민이자,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이자람은 그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화려한 작품에 대한 기대도, 판소리의 대중화나 세계화에 대한 의무감도 없었다. “이야기를 해야 했고, 21세기를 살다 보니 캐릭터를 가장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서 (현대적인) 악기들과 작품들을 활용했을 뿐이다.”

그는 지난 3월 관객과의 대화에서, 작품을 올리기 전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찾는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수백 편의 작품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찾는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해석으로 선보인다.

지난 2월 창극 ‘소녀가’의 막을 올릴 때, 이자람은 극본·연출·작창·작곡·음악감독을 맡았다. 국립창극단 이소연이 주인공이었다. 동화 ‘빨간망토’를 각색한 장 자크 프디다의 ‘빨간 망토 혹은 양철캔을 쓴 소녀’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숏컷의 소리꾼이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새빨간 구두를 신었다. 동그란 무대 위에서 뛰어다니고 주저앉고 드러누우며 발랄한 소녀를 연기했다. 무대 아래 북과 드럼, 기타, 키보드 악사는 이런 모습을 음악으로 뒷받침했다.

사회적 금기를 상징하는 철 드레스와 철 구두가 소녀에게 채워질 때는 드럼이 ‘철컹’소리를 냈고, 숲에 매료돼 가슴이 두근거릴 때는 북 장단이 ‘두근두근’ 울렸다. 소리꾼은 “빨간 망또는 다 알고 있었따~!”고 능청스럽게 얘기한다. 소녀이자 여성인 빨간망토는 자신의 욕망이 뭔지 알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회적 금기를 과감하게 부쉈다.

판소리를 연구하는 이화여대의 이안 코이츤베악 교수(독어독문학과)는 이자람의 작품에 대해 “전통 판소리에 비해서 극 전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서 놀라운 점이 많다. ‘소녀가’의 경우는 동화적인 소재를 지금 시대에 맞춰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고 했다.

‘소녀가’엔 미투(MeToo) 운동을 연상시키는 대목도 있다. 이자람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작년 2월 작품 구상을 시작해, 그런 일(미투 운동)이 생길 줄은 정말 몰랐다. 시대흐름에 따라 생긴 일이고, 저 역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살다 보니 이 작품을 고른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관객 김정은 씨는 “전통 판소리의 애절한 감성이 좋아, 완창 판소리를 들으러 전주에도 간다. 이렇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의 작품도 좋다”고 했다. 김영희 씨는 “요새는 현대에 맞는 색깔을 넣어 젊은 관객도 많다”고 했다.

최근 이자람은 무대에 직접 서는 일을 줄였다. 무대 뒤에서 극본을 쓰고, 작곡과 작창에 주력한다. 그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많은 소리꾼이 작가를 만나지 못해서 혹은 스스로 작(作)을 쓸 여건이 안 돼서 저처럼 자신의 작품을 만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8년 전 강연에서 “앞으로도 21세기에 태어날 만한 판소리를 계속 쓸 거예요. 죽을 때까지요”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는 중이다. 이 시대의 소리꾼 이자람. 그의 바탕엔 판소리가 있었고, 그 중심에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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