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의 남일당 건물이 불타올랐다. 2009년 1월 20일이다.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특공대원 한 명이 죽었다. 용산참사를 생각할 때, 철거민과 경찰의 갈등을 떠올린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진영과 정부의 갈등을 떠올릴 수도 있다.

우리는 좀처럼 피해자 내부의 갈등을 상상하지 않는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잘 상상하지 않는 이야기. 영화감독 김일란(41)은 거기에 주목한다.
 
그가 공동연출한 ‘공동정범’은 용산참사 철거민 내부의 분열을 보여준다. 전국철거민연합회 소속 철거민은 연대하러 용산에 왔다가 죽었고, 다쳤고, 구속됐다. 이충연 용산철거민대책위원장은 철거민 모임에서 술 마시고 신세 한탄하기가 싫다며 이들을 외면한다. 연대 철거민들은 서운함을 느낀다.

갈등의 골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김일란의 카메라는 철거민의 다툼을 숨기지 않고 기록한다. 그는 한겨레21과의 인터뷰(2017년 12월 30일)에서 “믿었던 사람을 의심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 것도 국가폭력으로 인한 피해”라고 말했다.

제주 서귀포 상영회의 관객과의 대화에서 관객이 물었다. “주인공(이충연 위원장)을 나쁘게 만들었는데 그 주인공의 인권은 어떻게 할 건가? 도대체 이 영화를 만든 의도가 무엇인가?”

이충연 위원장의 아내 정영신 씨가 답했다. “영화를 만든 건 용산의 투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고, 함께 싸우려면 서로의 마음을 알고 서로의 상처를 감싸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독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영화에 출연한 인권운동가 박래군 씨는 “내부 갈등을 드러냈기 때문에 누구는 이 영화가 불편하다고 했고, 누구는 불쾌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김일란의 문제의식에 동의했기 때문에 함께 했다”고 했다.

김일란이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중앙대 영상예술학 대학원에 다니던 2002년의 일이다. 그는 한림학보에 ‘원근법을 해체하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다. 글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풍경화를 그릴 때, 우리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위치하고, 중심인 나로부터 세상은 원뿔형으로 펼쳐진다. 이러한 원근법적인 시각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속에서 있는 무엇이든 간에, 특정한 한 가지 기준에 의해서 서열화돼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 안의 모든 존재가 서열화를 강요받는다면, 그 세계는 너무나 폭력적이다.”
 
원근법을 해체하라는 선언은 김일란의 삶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존재에 주목하고, 소외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처음에는 용산참사 유가족이자 생존자인 이충연 위원장을 영화의 단독 주인공으로 기획했다가, 연대 철거민 4명을 공동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다. 비용산 철거민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기지촌에서 성판매를 하다 포주가 된 여성(마마상),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한 레즈비언(레즈비언 정치도전기), 트랜스젠더(3xFTM)···. 김일란 영화의 주인공에겐 닮은 점이 있다. 소외된 존재.

김일란은 씨네21과의 인터뷰(2018년 1월 25일)에서 “어떤 공간에서 누가 배제되고 있고 그 사람을 배제하는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질문하는 게 익숙하다. 내가 페미니스트고, 소수자로서 훈련된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 2012년 ‘뉴스타파 시즌2’ 앵커를 맡은 김일란. (출처: 뉴스타파)

김일란에게는 활동가란 수식어가 더 어울린다.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에서 14년간 활동하는 중이다. 그가 참여한 영화는 모두 연분홍치마의 공동 작업물이다. 김일란이 대학원 친구들과 만든 여성주의 모임에서 비롯했다. 함께 사회운동을 하자고 했지만, 영상 작업을 하려고 모인 건 아니었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기지촌 혼혈인 인권실태조사’에 참여한 일이 전환점이었다. 김일란이 경기 평택의 송탄 기지촌에서 만난 중년 여성은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하다가 성매매 알선을 시작했다. 반 년 간 그의 삶을 글로 기록했지만 한계를 느꼈다.

김일란은 영상을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카메라 다루는 법도 모르면서 선배에게 카메라를 빌려 기지촌을 다시 찾아 다큐멘터리 ‘마마상’(2005)을 완성한다. 서른 넷 김일란의 감독 데뷔였다. 이후 그의 삶은 늘 카메라와 함께했다.
 
김일란은 4.16세월호참사 미디어위원회 팀장이었고,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미디어팀에서 일했다.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에 동참했고,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를 도와 재판과정을 기록했다.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틈틈이 다른 현장에 나가서 카메라를 들었다.

영상기록은 김일란의 운동 방식이었고, 극장은 연대의 공간이었다. 미디어 연구저널 ‘ACT’와의 인터뷰(2015년 11월 15일)에서 그는 “관객은 사회를 함께 변화하자고 모인 사람들이고, 최대한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서 이야기를 건네야 한다”고 말했다.

▲ 연분홍치마의 활동가 5명이 찍은 사진.

너무 쉼 없이 달려온 탓일까. 김일란은 지난해 7월 암 선고를 받았다. 위와 대장에 암세포가 자랐다고 했다. 위 절제 수술을 받고 한겨레21과의 인터뷰(2017년 12월 30일)에서 김일란은 이렇게 말했다.

“올해 내 인생에 쓰나미가 온 느낌이었다. 가지도 부러지고 열매도 막 떨어지는데, 주변 친구들이 나를 꽉 잡고 있어서 뿌리는 상하지 않은 느낌. 상처가 크긴 하지만 뿌리는 뽑히지 않아서 잘 회복하면 될 것 같다.”

일터이자 쉼터인 연분홍치마는 그를 버티게 하는 공동체다. 투병 이후 연분홍치마는 ‘당기다600’ 후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수많은 동료가 후원하는 글을 쓰고 영상에 참여하자 시민들이 응답했다. 지난해 12월 기준, 연분홍치마의 후원회원은 600명이다. 그녀의 말대로 뿌리는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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