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닥한 스노우 화이트지에 소복이 내려앉은 그림들은 아무도 보지 않은 밤 사이에 곱게 내린 눈이다. 그림 하나하나에는 글보다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화가 막스는 말한다. "그림들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해. 나한테도 그래. 어쩌면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내 그림 속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발견해낼 수 있을지도 몰라. 난 다만 채집가일 뿐이야. 순간을 채집하는…." 캔버스에 순간을 담는 화가가 있다. <소피의 세계>의 표지 그림으로 우리 나라에 알려진 독일인 삽화가 퀸트 북홀쯔(42). 그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이 책은 1998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픽션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순간과 영혼과 팔레트

시처럼 드문드문 늘어선 문장, 오래된 흑백영화 같은 타이프체가 수줍은 '교수님'처럼 가만가만 이야기를 건넨다. 구식 잠자리 안경과 통통한 몸 때문에 놀림을 받는 소년을 막스는 '교수님'이라고 부른다. 막스는 노래를 부를 때면 소년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부탁한다. 막스가 그림을 그리면 소년은 빨간 벨벳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본다. 바이올린을 켜기도 한다.

막스는 그림을 완성하면 뒤집어서 벽에 기대어 놓는다. 그러나 소년은 그림을 보지 못해도, 그가 그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한다. 멀리 뱃고동 소리와 괘종시계 소리가 자욱한 5층 방 안에서 그 둘은 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길이 있단다. 화가는 그것을 찾아내야 해. 그리고 그림을 너무 빨리 그려도 안돼. 그러다가 자칫 그 길을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막스는 자주 여행을 떠난다. 그럴 때면 소년은 항상 방파제에 서서 그가 탄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어느 날 막스는 집 열쇠를 맡기고 먼 여행을 떠났다. 방으로 올라와보니, 뒤집힌 채로 벽을 따라 죽 놓여 있던 그림들은 모두 "나를 보고 있었다."

"난
그렇게
그가 오직 날 위해 마련해 준
전시회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오직 당신을 위한 전시회

우리도 이제 그림을 볼 수 있다. 막스가 이야기한 신기하고 신비한 장면들이 캔버스에 담겨 눈 앞에 펼쳐진다. 그림엔 그려져 있지 않은 밤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할머니, 눈보라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캐나다의 눈코끼리. 애드벌룬에 매달려 도시의 밤을 유영하는 거대한 피리, 밤새 눈이 내린 다음날 아침의 정경, 전날 저녁 마지막 공연을 한 서커스단이 떠나가고 뒤에 남은 황량한 들판….

가장자리는 가장 자유로운 자리다.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여백의 공간. 막스의 그림은 소년에게 하얀 액자 너머를 바라보도록 이끈다. 옆에 놓인 작은 메모가 그림의 가장자리를 끝없이 확장시킨다. 소년은 막스가 그림으로 옮겨 놓은 '어느 특정한 순간'을 알아봤다. "그 순간 이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순간 이후에 뭔가 계속 이어져 나갔으리라는 것을 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은 언젠가 막스가 이야기한 '순간을 채집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했다. 여름방학 내내 소년은 막스의 그림으로 여행을 떠났다.

막스의 하얀 액자 안에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느껴 보았을 저마다의 소중한 순간들이 녹아 있다. 삶이 언제나 빛나는 광택을 뒤집어 쓰고 있다면 이 지루한 인생은 아름답지도 기쁘지도 않을 것이다. 특별한 언젠가에만 느낄 수 있는 특정한 순간을 소중하게 모아두는 사람들은, 그런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순간을 채집하는 사람'이다.

막스가 채집해낸 순간은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림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길을 찾아낸 막스는 소년에게도 자기만의 길을 찾아보라고 이야기한다. 그 그림 속에서 소년이 찾아낸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막스의 그림을 보며 어떤 길을 찾아낼까?

"시간이 지나면서
난 막스가 떠나있는 동안
내가 그 그림들을 봐야만 하는 까닭을
차츰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나와 함께 있지 않고,
내게 설명해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림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자
저절로
풀    렸    다."

여름방학이 끝났다. 마지막 그림을 이젤 위에 올려놓고 소년은 그림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해보았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멜로디가 되었다. 소년은 막스의 그림에 담긴 비밀을 스스로 풀어냈다. 바이올린의 가느다란 선율과, 부드러운 색깔이 점점이 내려앉은 고요한 캔버스. 소년의 음악과 막스의 그림이 함께 순간을 노래했다.

소년은 이제 음악학교의 바이올린 선생님이다. 막스는 곁에 없지만 그가 소포로 보내온 그림 속의, 방파제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잠자리 안경의 통통한 소년은 출근하는 그를 배웅한다. 종종 여행을 떠나는 막스를 배웅하던 어릴 적의 '교수님'처럼. 막스는 동봉한 메모에서 그림에 담긴 비밀을 알려준다. 소년이 이미 풀어버린 수수께끼를. "교수님, 알고 있나요? 내 그림 속에는 언제나 당신의 음악이 들어 있었어요."

조혜원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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