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50301

웬일인지 엄마가 아침부터 들떠 있다. 부산하게 목욕을 하고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렸다. 잘 입지 않던 옷들을 몽땅 꺼내서 바닥에 늘어놓는 바람에 나는 밟지 않으려고 온 방안을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엄마, 엄마 오늘 어디 가?"
"응, 오늘이 엄마 아빠가 결혼한 날이야. 옛날에."

엄마는 화장을 하다가 거울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나는 여섯 살 소녀의 직감으로 둘이서만 몰래 놀러 나갈 작정인 거라고 느꼈다. 엄마는 버림받은 아이의 슬픔을 몰라!

"나도 데리고 가요∼"
"어린애들은 못 들어가는걸? 엄마가 부탁해놨으니까 아줌마랑 아줌마 애기랑 놀고 있어. 착하지."

울고불고 떼를 쓰는 중에 해가 넘어가고, 달래던 엄마는 약속 시간에 늦었다며 휑하니 떠나버렸다. 나는 하루종일 힘들었던 탓에 금방 잠이 들었다. 한참 지나 어수선한 소리에 눈을 슬쩍 떠보니 엄마 아빠가 돌아와 있었다. 나는 지금 토라져 있으니까, 엄마 아빠가 들어와도 반가워해주지 않고 자는 척을 했다. 엄마는 내겐 관심도 없이 뭐가 그리도 신이 난 건지, 높은 목소리로 계속 계속 떠들어댔다.

"전영록씨는 아직도 대학생 같아! 정말 젊어보여요. 어쩌면 그렇게 재미있고 멋있지. 아아, 너무 즐거웠어요."
"난 송창식씨 통기타 치는 게 그렇게 좋던데…. 목소리도 예전 그대로야."

어딜 다녀왔나 했더니, 며칠 전부터 속닥속닥 이야기하던 그 레스토랑에 갔었나보다. 전영록이 주인이라는 레스토랑. 나도 전영록을 보고 싶었는데! 눈 앞에서 노래하는 것도 보고 싶었고. 어리다고 안 데려가다니 억울해 죽겠다. 내가 어린 게 내 탓인가 뭐, 늦게 낳아줬으면서!

# 19850813

"또 비행기가 추락했네! 네 명만 살고 나머지 540명이 다 죽었대."
"어 그 일본 비행기. 안 됐지, 안 됐어. 비행기 사고가 한 번 나면 무섭다니까."

비행기는 타본 적이 없다. 그림책이랑 텔레비전에서 본 게 전부다. 하늘을 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또 하늘을 날다가 땅으로 떨어지는 기분은 어떨까? 금방 죽으니까 모르나. 죽기 전까지는 무서울까 아니면 재미있을까. 그네 탈 때 제일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거랑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보, 항공기 사고가 나면 여자들이 생존율이 높다는데."
"무슨 소리…. 누가 그래?"
"신문에 났어. 여자가 상대적으로 몸이 가벼워서, 떨어질 때 상대적으로 충격을 덜 받는대."
"하긴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가벼우니까. 걱정 없겠네."

또 시작이다, 또. 아빠는 뻔히 꼬집힐 걸 알면서도 엄마를 놀리곤 한다. 결혼할 때 통통했다던 엄마는 나를 낳고 완전히 말라버렸다고 했다. 내가 엄마 먹을 걸 다 먹었다나? 엄마는 자기가 비쩍 말라서 보기 싫다면서, 좀 살이 쪘으면 좋겠다고 그랬다. 내가 봐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남궁옥분이나 나미보다 엄마는 얼굴에 살이 하나도 없다. 모르지, 내가 좀더 크면 엄마처럼 마른 사람도 텔레비전에 나올지도.

# 19850925

멕시코에서 건물이 마구 무너지고 있다. 아빠 무릎에 앉아서 보는 텔레비전 뉴스에선 그 동네를 자주 비춰줬다.

"아빠, 여진이 뭐야?"
"음 그건. 지진이 나면 땅이 흔들리잖아. 그러면 그 흔들린 땅이 또 다른 땅을 흔드는 거야. 땅들은 다 연결되어 있거든. 그렇게 되면 연달아서 땅이 흔들리지? 그게 여진이야."
"아아 그렇구나."

아빠가 설명해주는 말은 어렵지 않아서 좋다. 뉴스에서도 그렇게 말하면 좋잖아?

"아빠, 저건 꼭 떡 같아. 차곡차곡, 제사상처럼."

한 건물이 차곡차곡 무너져서 층층이 쌓여 있었다. 할아버지 제사상에서 봤던, 내 무릎까지 오도록 높이 쌓아놓은 시루떡 같았다. 그 건물은 병원이었는데, 지진이 나서 무너지는 바람에 산모 백 명과 신생아 팔십 명이 죽었다고 했다. 산모고 신생아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람들이 그렇게 마구 죽어버리다니, 지진은 무서운 거구나.

"아빠 아빠, 우리 나라엔 지진 안 나?"
"우리 나라는 그래도 조금 안전한 지역이지, 지진에 대해선. 저렇게 건물이 무너지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

휴, 다행이다. 저렇게 층층이 쌓인 벽들 사이에 가만히 들어가 있는 것도 무서울 텐데, 그런 거에 깔려 죽는다는 건 정말 상상도 하기 싫다. 오싹.

# 19851104

동네 골목이 갑자기 와-! 하고 울렸다. 우리 집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는 금방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이다. 저건 웃는 거야, 우는 거야. 나는 텔레비전을 보던 그대로 멀거니 엄마 아빠를 올려다봤다.

"월드컵 본선 진출 확정!"
"이게 몇 년 만이야!!"

소리를 지르고 부둥켜 안고 난리도 아니다. 뭐가 그렇게 감격스러운 걸까. 동생은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새근새근 잠이나 자고 있다.

"일본에 일 대 영으로 이기다니! 아, 한 골 더 넣을 수 있었는데!"
"아깝다, 아까워!"
"그래도 잘 했어요, 너무 멋져!"

아까 누군가 공을 차서 그물에 넣었을 때도 고함을 지르며 펄쩍펄쩍 뛰더니, 지금은 훨씬 더하다. 게임이 끝났는데 왜 더 좋아하지? 도무지 어른들은 알 수가 없다. 몇 시간 동안 한숨을 쉬고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고 제자리에서 날뛰고, 애들 있는 데서 정신 사납게….

축구는 내 취향이 아닌가봐. 나는 작년에 밍키를 따라하며 공을 던지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축구 만화는 없었나? 있다면 한 번 따라해볼 텐데. 슛! 고∼오린!

조혜원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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