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 서울시는 국내 최초로 지하철에 ‘범죄예방디자인(CPTED)’을 도입했다. 지하철 환경계획으로 범죄감시 기능을 강화하고 이용객을 안심시킨다는 취지였다. 2014년 말에 개통한 9호선 2단계 구간이 시범대상이 됐다. 1월 31일 오후, 기자는 이 사업의 실효성을 확인하기 위해 5개 역을 찾았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 범죄예방디자인이 적용된 언주·선정릉·삼성중앙·봉은사·종합운동장역에서 승객 30명에게 ‘안전구역’을 아느냐고 물었다.

“저게 안전구역이에요? 몰랐어요.”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지하철을 기다리던 승객들은 안전구역을 코앞에 두고도 알지 못했다. 범죄예방디자인의 핵심은 승강장에 설치된 ‘안전구역’이다. 승강장 내에 길이 5m, 폭 2m로 조성된 안전구역의 벽면에는 비상통화 버튼과 비상거울, 실시간 폐쇄회로(CC)TV 화면이 나오는 모니터가 있다.
 
기자가 만난 승객 30명 중 26명이 안전구역의 존재를 몰랐다. 봉은사역에서 퇴근시간 승차도우미로 일하는 이월승 씨(71)는 “사람들이 안전구역 쪽에 잘 안 온다. 뭐에 쓰는지 모르고 쓸 일이 없으니까 안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장 큰 문제는 위치. 안전구역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 언주‧삼성중앙‧봉은사역은 승강장 맨 끝에 안전구역을 마련했다. 지하철 9호선은 6량 급행열차가 정차하는 일부 역을 제외하면 4량 열차만 운행하기 때문에, 승강장 양쪽 끝에는 이용객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언주역과 삼성중앙역의 안전구역 앞에는 “이곳은 정차 위치가 아닙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출입금지 띠가 둘려 있었다. 이용객이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안전구역을 만든 셈이다.

▲ 안전구역 앞에 ‘이곳은 정차 위치가 아닙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위치가 잘못됐는데도 조정하기는 쉽지 않다. 언주역 고객안전실에 문의했으나 안전구역 위치를 옮기는 건 본사 소관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서울시 도시철도본부의 박노수 씨는 “일부 역은 중앙 계단 때문에 안전구역을 설치할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승강장 끝에 만들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개통 후에 모니터링을 하면서 안전구역 위치문제를 발견했다. 향후 안전구역을 설치할 때는 위치를 정확히 고려할 계획이다”라고 덧붙였다.

▲ 안전구역(길이 5m, 폭 2m)의 구성

안전구역에 있는 비상거울과 CCTV는 시야각이 좁았다. 비상거울은 안전구역의 가장자리에 하나씩 있다. 가로·세로 길이가 1m가량 되는 비상거울에 비치는 시야는 제한된다. 특히 선정릉역은 다른 역보다 거울이 높은 위치에 있어 거울에 비치지 않는 사각지대의 범위가 넓다. 기자가 거울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보니 허리선부터 상반신만 거울에 비쳤다. 다른 역의 비상거울은 같은 위치에서 발을 포함한 전신을 비춘다.

▲ 봉은사역과 선정릉역의 비상거울(왼쪽부터)

비상거울 사이에는 붉은빛을 뿜는 원형 비상통화 버튼 3개가 일정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가운데 비상통화 버튼 위에는 타일 한 칸 크기의 모니터가 있다. 모니터는 안전구역 CCTV에 찍히고 있는 화면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CCTV가 찍는 구역은 폭이 좁아서 이용객이 스크린도어 쪽으로 걸어가면 금세 화면에서 사라진다.
 
1월 25일 밤 11시, 기자는 종합운동장역을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늦은 시간대지만 약 30명이 전동차에 탑승했다. 그 동안 CCTV에 잡힌 건 안전구역 안의 의자에 앉아있는 모녀뿐이었다. 

▲ 언주역 에스컬레이터. 승객은 “에스컬레이터가 너무 길어서 불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범죄예방디자인 설계가 승강장에만 집중된 문제도 있다. 서울시가 2014년 6월 23일에 발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지하철을 기다리는 상·하행 승강장에 안전구역(존)을 1개씩 만들어 실제 범죄가 일어날 경우 신속대응하고, 범죄 심리도 사전에 억제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지하철 진입공간, 이동공간, 편의공간, 관리공간 등에서의 범죄 예방에 관한 언급은 없다.

지하철 성범죄의 대다수가 전동차 내부와 역구내에서 발생하는 점을 고려하면, 승강장 안전구역만으로 범죄예방 효과를 기대하긴 힘들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지하철 성범죄의 75.8%는 전동차 내에서, 18.2%는 역구내에서 발생했다. 평소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정서인 씨(25)는 “전동차 안에 사람들이 많을 때, 특히 취객이 근처에 있을 때 가장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도시철도본부의 박노수 씨는 “9호선 2단계 구간은 대부분 역구내에 역무실이 있다. 승강장은 역무원이 순찰하지만 상주하진 않아서 취약점이 있다고 보고 안전구역을 설치했다”고 말했다.

9호선 2단계 구간이 범죄예방디자인 사업 대상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선정릉역에서 만난 안소정 씨(34)는 “선정릉역은 주택가이고 삼성중앙역은 아파트단지 근처라 주민이 많이 이용한다”고 말했다. 이들 역은 주택가 근처에 있고 이용객이 적어 애초에 범죄 위협이 낮다. 2016년 지하철 성범죄 발생률이 높은 상위 10개 역은 홍대입구역‧고속터미널역 등 하루 평균 이용객이 10만 명에 이르는 혼잡한 곳이었다.
 
실제로 기자가 만난 30명의 승객 중 15명이 (다른 역보다) 안전하다고 느낀다고 했으나, 이들의 대다수는 안전구역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용객이 안정감을 느낀 건 인근 주민이 역을 이용한다는 점과 시설이 깔끔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 안전구역 안내문

서울시는 연말에 개통하는 9호선 3단계 구간에도 범죄예방디자인을 적용한 계획이다. 서울교통공사에 1~8호선 범죄 발생이 잦은 역에 범죄예방디자인을 적용할 계획이 있냐고 문의했으나, 추가적인 계획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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