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

1995년 9월 15일. 베이징 제 4차 세계여성대회 폐막식장. 베이징선언문이 낭독되고 여성대회는 막을 내렸다. "여성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다." 선언문의 한 구절이다. 이 말이 사실일까? 아니, 한국에서 이 말은 유효한 말일까? 글쎄.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특히 정책 결정과 권력참여에 있어서는 더 그렇다.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여성들이 뭉쳤다. 여성 정치세력화를 위한 민주연대(이하 여세연)라는 이름을 걸고. 지난 11월 22일 여의도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선 출범을 알리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단체가 구상된 건 지난 8월. 장하진 교수(충남대 사회학), 이계경 여성신문사 사장, 지은희 여성단체연합 대표, 강기원 변호사(대통령 직속 여성특위 위원장)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여성계의 리더들이 모여 3달간 논의한 끝에 이 단체가 태어났다. 물론 기존에도 여성 유권자연맹, 여성할당제연대 등 여성의 정치참여를 위한 단체는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단체들이 느슨한 연대의 틀로 선거 등 사안이 있을 때만 모여 활동했다면 여세연은 '생활정치'를 추구하고 나섰다. 

"여세연의 회원들이 정치를 직접 할 필요는 없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아도 정치세력화 하려는게 목적이다.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부담하는 많은 여성 386들이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 이들이 모여 새로운 정치질서와 사회문화를 창출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겠다는 장하진 교수(여세연 대표)의 말이다.

여기에 동참한 여성은 현재 3,000여명 정도. 이 단체가 전범으로 삼은 미국의 '에밀리 리스트'가 5만 명의 회원을 가진 것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숫자다. 그러나 회원들 모두가 소식을 듣고 적극적인 참여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또 유지나(영화평론가), 방은진(영화배우), 이계경(여성신문사 사장), 황덕희(변호사), 최은숙(사회복지사), 김수자(신주부운동캠페인 공동대표), 김수영(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등 18명의 준비위원을 각계의 추천을 통해 구성했다. 장하진 대표는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인사를 주축으로 기존 여성단체와 차별화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개혁성을 강조하면서도 여세연이 기존 여성단체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걷지는 않을 것 같다. 여성할당제 연대 등에서 추진한 30% 할당제 도입과 같은 운동은 여세연이 요구하는 것 중에 하나다. 장하진 교수도 "여세연이 차별성을 강조하지만 30% 할당제는 할당제 연대와 같이 하지 않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여성 정치인에게 가장 어려운 관문인 정당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이들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또한 비례 대표제 뿐 아니라 지역구에도 여성이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의 힘으로 새로운 정치구조와 사회문화를

이를 위해 현재 출마를 희망하는 50여명의 여성들 중에서 여세연과 뜻을 같이하는 후보를 선정하여 물질적, 정신적으로 지원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한 전국구, 지역구 뿐 아니라 지방의회와 지방자치단체장, 교육위원 등 모든 선출직에 출마를 희망하는 여성을 발굴 육성해 지원할 것을 밝혔다. 중앙 정치 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여성의 힘을 발휘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일차적 목표 이외에도 여세연은 ▲정치현안에 대해 주장을 밝히고 대안 제시 ▲잠재능력이 있는 여성지도자를 폭넓게 발굴, 육성 ▲투명하고 합리적인 정치문화를 만들어 갈 유권자운동 전재 ▲참여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관련법 및 제도 개선 촉구 ▲후원회를 조직해 개혁성과 도덕성을 갖춘 능력있는 여성정치인 후원 ▲정책 개발 등 정치문화 전반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목표를 세웠다.

"여세연은 정치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새로운 정치구조, 사회 문화를 여성의 힘으로 이뤄내려 하는 것이다." 김영옥 여세연 사무국장은 그들의 목표를 이렇게 말한다. "이미 3000여명의 발기인이 참여했다. 이들의 지지를 토대로 최소한의 후원금 보조에서 출발할 것이다." 아직은 후보지원에 있어서는 상징적 차원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그러나 남성위주의 현 정치풍토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일지 모른다. "남성들의 '선택'으로 한두명 국회에 나가는 것보다 이런 단체가 잘 되는게 더 큰 희망이다(송명진 전 숙명민주동문회 회장, 여세연 준비위원)." "여성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김수영 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여세연 준비위원)"이라는 말에서 여성정치세력화의 희망이 묻어 나온다.

일부에서는 선거철만 되면 여성단체가 모이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여성단체의 후원을 받아 당선된 여성 정치인이 정치권에 들어가서 연대를 계속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오히려 남성 정치인들보다 더 기존 정치문화에 무비판적이었다는 비난도 있다. 장하진 대표는 "여성 국회의원이 3.7%인 현실에서 그런 평가는 성급하다"고 지적한다. 더 많은 여성이 정계에 진출하고 난 후에야 공정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2000만 여성의 뜻을 모아

여성 국회의원 3.7%. 한국의 모습이다. 21세기를 누가 여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던가? 한국 사회에서 아직은 먼 얘기다. 그래서인지 당당하게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고 나온 이들에게 많은 여성들이 기대하고 있다. 장하진 대표는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최소한 1만명 이상의 회원을 모집하고, 여세연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해 구체적 행동 계획도 마련할 것이라고 한다. "여세연의 활동은 2000만 여성의 함께 하는 뜻이 모아져야 가능하다. 여성주체, 정치개혁, 민주연대의 뜻에 동의하는 모든 여성들이 힘을 모을 때다."

이제 여성 정치세력화를 위한 실천적 단체임을 자처하고 나온 배의 출항이 시작됐다. 여세연이라는 이름의 이 배가 순항을 유지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내년 1월에는 출범식을 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선거철이 되어 반짝 활동하고 그 이후에 지지부진하게 된 많은 단체들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그러나 2000만 여성의 뜻을 모아 항해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들의 활동을 기대해 본다.

 김수진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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