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에게 여의도는 무엇을 연상케 하는가. 국회 의사당, 여의도 공원, 방송국, 증권 회사, 63빌딩..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여의도 역에서 내려보자. 오른편으로 녹색 간판의 편의점이 하나 보일 것이다. 날씨가 화창한 날 그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보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여의도는 충분히 재미있다. 고급 양복차림의 회사원에서부터 노랑 머리의 젊은이들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운이 좋으면 탤런트나 국회의원의 고급 세단도 구경할 수 있다. 보도 블럭을 걸어보는 일도 좋을 것이다. 가끔 인터뷰 요청을 하는 라디오 방송국 기자들과 마주칠 수도 있다. 그렇게 걷다보면 여의도 공원이 보인다. 입구에서 오뎅을 하나 사 먹고도 주머니가 여유롭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공원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 한나라당 당사에 계란을 던지러 걸어가는 '국보법 철폐 농성단'을 만날 수도 있겠다.

상상해 보라. 얼마나 색다른 경험인가, 그 곳 여의도라는 곳은.

그런데 그 곳, 여의도에서 사는 이들이 있다. IMF 구조조정으로 쫓겨난 노숙자도 아닌 주제에 천막을 치고 산다. 요구사항이 있을 때마다 일시적으로 설치됐다가 사라지는 그런 농성단들의 천막과는 다르다. 하나는 이제 120여일, 다른 하나는 390일동안 줄곧 그 자리를 지켜온, 천막치고는 수명이 긴 것들이다. 정말 남다른 경험을 원한다면 그 두군데 천막장으로 가 보는 건 어떨까. 어떤 길을 따라 어떻게 가느냐는 여러분들 재량이다. (참고로 기자는 두 다리로 걸어갔다).  

천막 하나 - 자살한 아들의 억울함을 침묵으로 시위하는 아버지

남자가 있었다.
참으로 착실한 청년이었다. 학교 때부터 축구선수로 뽑힐 만큼 운동도 잘 했다. 공장을 다니면서 1년 반 동안 일본으로 교육도 다녀왔다. 부모님에게 걱정 한 번 끼친 일 없는 착한 아들이자 누가 봐도 나무랄 데 없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지난 여름 그는 자살했다. 스물 일곱의 아깝도록 젊디 젊은 나이였다.

"이제, 한메 잊을 때도 됐구마.. 어느 부모치고 120일을 자슥 사진을 앞에 놓고.. 이게 헐 짓이가.."
    
거친 경상도 사투리로 예순 다섯의 老父는 입을 열었다. 여의도 근로복지공단 앞, 아들의 영정을 지키며 천막 생활을 시작한 지도 122일째다. 그의 말대로 이젠 잊을 때도 됐건만 무엇이 그를 이토록 아들의 죽음에 집착케 하는가.

이상관씨(경남 창원 대우 국민차, 27)가 공장에서 짐을 옮기다 차에 치여 허리를 다친 것은 지난 2월 20일의 일이다. 산재(산업재해)로 인정받아 고향 근처 사천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5월 14일 '상태가 호전되지 않으니 퇴원을 하고 통원 치료를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 이씨는 계속되는 다리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고 다리가 말라 들어가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이씨의 아버지인 이석수씨(경남 사천, 65세)는 진주 복지공단을 찾았다. 상황을 설명하고 담당자에게 얼마라도 더 입원치료를 받게 해 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복지공단측은 다리의 통증이 "25살 이후 찾아오는 노화(퇴행성) 때문"이라며 연기신청을 거절했다. 병원에서는 입원시켜야 된다고 말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이씨의 다리는 혼자 화장실도 못 다닐 만큼 악화되고 있었다. 마침내 이씨는 "도저히 예전같이 회복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회복되지 않을거라는 불안감과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고용문제까지 겹쳐 죽음을 택한 것이다. 강제퇴원 당한지 한 달 만인 6월 22일의 일이었다.

이에 대해 이은주씨(마창 거제 산재추방연합 사무국장, 31)는 "이상관씨의 죽음은 명백한 타살이다"라고 말한다. IMF이후 근로복지공단이 보험료가 적게 걷히도록 지사마다 산재보험 환자를 줄이고 통원조치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이 이씨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일종의 보험회사다. 그러나 근로자들의 재해를 다루는 만큼 이익을 앞세우는 시장논리가 개입해서는 안된다. 작년 근로복지공단의 민영화가 반대여론에 밀려 보류됐던 것도 이 때문이다. 노동자들을 치료해 현장에 복귀시키는 게 공단의 존재이유이자 목적이다. 예산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치료가 덜 된 환자들을 퇴원시키는 행위는 생명을 담보하는 도박과 같다. 산업재해가 주로 저임금의 생산직 노동자들에게서 발생한다는 걸 안다면 그런 지침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공단이 병원에 압력까지 넣었다는 사실-이는 이석수씨가 병원 원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로 녹취자료까지 보관하고 있으나 공단은 이를 부인하고 있음-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이런 구조적인 모순을 체험하면서 아버지는 용감해졌다. 조직화된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지난 7월 초, 이석수씨는 지역의 산재추방연합 본부를 찾았다. 그리고 그 달이 다 가기 전에 서울 근로복지공단 앞엔 비닐 천막이 하나 들어섰다.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아버지의 마지막 父情이었다.

이석수씨와 함께 천막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이은주씨 이외에도 여럿이다. 기자가 현장을 찾은 날에도 천막 앞에선 서울 보건 의료 청년회 회원들이 행인들에게 선전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이들말고도 민주노총, 금속 산재 피해자 단체 연합, 민중 의료 연합 등의 회원들이 천막을 지키고 있다. 순번을 정해 매주 하루씩 영정을 지키며 밤을 새는 일도 이들 몫이다. 산재문제에 관심이 있는 의사들과 국회의원들이 가끔 씩 천막을 들른다. 얼마 전엔 일본인 관광객들이 들러 점심이나 먹으라며 돈 봉투를 주고 갔다. 뭔지 모르는 글씨로 편지까지 써서 손에 쥐어줬다.

그러나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우선 공단측이 이은주씨와 이씨를 업무방해로 고발, 소환장이 발부돼 있는 상태다. 지난 달 14일엔 공단 앞에서 금속노련 산재 노동자들의 과격한 항의농성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천막에 상근 중이던 장성환씨(전해투 위원장)가 구속됐고 이은주씨, 이석수씨와 김학기씨(상근중이던 산재 노동자, 산재노협 간사)에게도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또, 26일엔 한 산재노동자의 항의를 돞기 위해 민원실을 찾은 김씨를 공단 직원들이 -귀찮게 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112에 신고했고 이 일로 김씨마저 구속됐다.

공단측에 의해 한 번 철거된 적이 있는 비닐 천막 역시 위기에 놓여 있다. 구청에서 철거 예정 통지서가 날아온 것이다. 일단 예정일은 일주일 뒤로 미뤄졌지만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근로복지공단이 행사하는 공권력이다. 이씨의 자살에 대해 공단은 '허리가 원인이 되서 다리가 아팠다'는 부분은 시인했다. 그러나 양측의 전문의로 구성된 공동 조사단 회의에서 심리학적 부검소견이 '외상 후 신경증'으로 났는데도 공단은 '자살과의 상관 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또 국정감사기간 동안 이 사건은 산재가 아닌 것으로 국회에 보고, 처리됐다.

비닐 천막을 파고드는 겨울 바람보다 이석수씨를 무기력하게 하는 것은 기성 언론들의 침묵이다. "SBS, MBC, KBS, 그 또 뭣이냐 PD수첩? 하여튼 기자들 숱하게 와서 취재해 갔다. 그럼 뭘하노? 신문에도 안내믄서..테레비에도 안 나오고.."

겨울을 어떻게 보내실 거냐는 질문에 그는 "매일 밥묵고 고마 차에 여 앉아갖고 밤 되면 누워자고.. 농성장 지키는 게 내 일과다" 라고 답한다. 아들의 죽음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었다는 것, 제도적, 구조적 모순이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갔다는 것을 공단측은 인정하라는 것이다. "인정했으면 내 벌써 내려갔다"고 말하는 그는 처음 취재를 나설때 기대했던 초라한 노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분노로, 그 분노를 대항으로 승화시킨 모습. 그것은 밤새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담벼락에 마지막 잎새를 그려넣은 늙은 화가의 모습이었다. 그가 그린 잎새는 얼기설기 얽힌 비닐 천막의 형태로 이 땅의 산재노동자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고 있었다.

천막 둘 - 치유되지 않는 상처 : 80년을 사는 사람들

여의도 국민은행 앞.
앞서 다녀온 천막과 이 곳 천막 사람들의 공통점을 뽑아본다면? 자식을 잃었다. 나이가 지긋하다. 죽은 자식의 명예회복을 위해 천막을 쳤다. 아무리 외쳐대도 꿈쩍 않는 상대와 싸우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도 역시 한 남자가 등장한다. 광주 전남대를 다니던 87년 영장을 받고 군대엘 갔다. 어느 날, 군대에선 5 18 광주 폭도들의 만행에 대한 강연 및 의식교육이  있었다. 한 고참이 그를 지목했다. "너 광주서 왔으니까 잘 알테지. 한 번 말해봐라."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그는 "그것은 군이 잘못하고 미군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었다고 보고들은 바대로 얘기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죽은 채로 발견됐다. 군당국은 "새 어머니와의 가정불화를 비관해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아버지 역시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자신의 재혼으로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84년 아들을 잃은 허영춘씨(의문사 지회장, 60세)의 경우가 그렇다.

혹시라도 학생운동을 할까 두려워 그는 일부러 아들을 데모가 없는 부산으로 유학 보냈다. 그러나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간지 5개월 만에 아들(허원근, 당시 21세)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첫 휴가를 하루 앞둔 날 M-16으로 오른쪽과 왼쪽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은 농부인 그가 생각해도 석연치 않은 면이 있었다.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의 아들이 내성적인 성격을 비관해 죽었다는 것이다. 그는 군의 발표를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사체 부검 과정에서도 몇 가지 의혹이 발견됐다. 여러 곳에 내용증명을 보내고 탄원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직업이 바뀌었지, 농부에서 민주화 운동가로". 지난 15년은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세월들이었다. 88년엔 기독교 회관 시멘트 바닥에서 135일 동안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 시내 경찰서 유치장이란 유치장은 안 들러 본 데가 없었다. 그러나 영정을 들고 시내를 활보하던 때의 기운은 사라진지 오래다.

밝혀지지 않는 죽음 -상처

"시체를 보믄 말이다, 다 지 몸뚱아리에 '나는 자살이 아니요'라고 설명해 논기라."
 
실족으로 물에 빠져 죽었다는 사체에 피가 묻어 있고 분신 자살했다는 사체에서 수포가 발견되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물 속에서 피는 흐르긴 해도 응고되지 않는다는 것, 살아있는 채로 몸에 불을 지른 경우 피부에 수포가 남는다는 것 등은 법의학의 기본지식에 속한다. 그러나 그런 기본조차도 통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부모의 입회 없이 사체부검이 이뤄지는가 하면 아들이 목매달아 죽었다는 동굴을 파기해버리기도 했다. 

작년 11월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안'과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의 제정을 위해 세워진 유가협(전국민족민주 유가족 협의회) 천막 농성장엔 이렇게 말 못할 사연들이 있다.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의 집계 자료에 의하면 1973년 최종길 교수를 시작으로 1998년 5월까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은 42명에 이른다. 밝혀지지 않은 경우들까지 포함한다면 우리나라의 의문사 사건은 이보다 많을 것이다.

96년 국민고충 처리 위원회는 국방부에 몇 개 의문사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추적 60분, 사건 25시 등 언론에 여러 차례 사건들이 다뤄졌지만 모두 그 때 뿐이었다. 사람들은 너무 빨리 이들의 얘기를  잊곤 했다. 옷로비 사건은 특검단까지 만들어 재수사하면서 민주운동을 하다가 사라진 젊은이들의 죽음은 10년, 20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의문 속에 남아 있다. 법을 제정해야 할 의원들은 밤낮 싸우고만 있고 그러는 사이 천막을 친 지도 일년이 넘어갔다. 얼굴의 주름은 깊어지고 흰머리는 늘어만 가는데 이들은 80년의 기억 언저리를 서성인다. 8시 반과 11시 50분 국회의사당 정문에서의 하루 두 차례 피켓팅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자식들의 사체사진을 보여주는 선전전, 그리고 각종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이들의 일과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전기장판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자살로 죽은 사람은 천당도 몬 간다는데.. 저승은 편히 가야 안 되겠나. 우리가 죽으면 누가 이 억울한 사정을 밝혀줄끼고.."

혹시라도 다칠까, 구속될까 걱정돼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란 말을 한번도 못 했다는 이한열 군의 어머님(배은심, 유가협 회장, 61). 자식의 억울한 죽음도 죽음이지만 앞으로 이 땅의 젊은 목숨들이 더 이상 죽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한다.

얼마 전 모 일간지에서는 설문조사를 했다. 밀레니엄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연상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새 천년, Y2K, 컴퓨터 버그.. 이 밖에도 사람들은 사이버 생활, 재택 근무, 우주 여행 등을 꼽았다.
여러분은 올해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보낼 예정인가.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밀레니엄 이벤트를 즐겨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새천년을 맞는 지금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다가올 세기에 대한 기대나 흥분보다 중요한 것은 지난 세기에 대한 정리 작업이란 것을. 지난 역사를 부끄러이 덮어 둔 채 지나친다면 다가올 세기 또한 숫자의 바뀜 외에 아무 의미도 아닐 것이다.   

김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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