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요. 반가워요." 편안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김근태 의원. 그가 입은 짙은 카키색 양복에 노란 점박이 무늬 넥타이의 어울림처럼 그와 미소와 잘 어울리는 온화한 목소리다. 12평 남짓한 그의 집무실에는 커다란 트로피와 상패들이 곳곳에 줄지어 있다. 각종 자료집과 책이 가득한 탁자에 기대어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는 모습은 그의 바쁜 일과를 짐작케 한다. 이근안은 자수하면서 숨가쁜 도피 생활을 끝냈지만 김의원은 더 빡빡해진 일정과 연이은 인터뷰에 숨가쁜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도 전혀 싫은 내색이 없다.

팔 뻗기에 서투른 정치인

권력과 자리다툼의 정치계에는 '연단에 서면 팔을 넓게 벌리라'는 말이 있다. 연단에 섰을 때 핵심인사의 옆에서 팔을 옆으로 쭉 뻗으면 그만큼 높은 위치에서 넓은 영역을 차지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김의원은 유난히 팔을 뻗지 못하는 정치인 중 하나다.

대중을 선동해  여론을 자기 마음대로 몰아가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강조하는 '대중정치'도 그와는 거리가 멀다. 국민 앞에 더 자주 보이기 위해 방송 전파를 빌리려 하지도 않으며 여론에 따라 이리저리 헤매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은 오로지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따라 한결 같이 원칙을 고수하는 곧은 정치인의 표본 같은 것이다. 최근 정치부 기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김의원이 '가장 신사다운 선량'으로 뽑힌 것만 보아도 그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김의원은 국회 상임위별 우수위원, 국감 베스트 의원, 차세대 정치리더, 차기 대권 주자 등에 대한 조사에서도 단연 수위를 차지한다. 이 정도면 자부심이 대단할 만도 한데 그의 대답은 겸손하기만 하다. "군사 독재 시절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고생한 것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권력 투쟁적인 정치 현장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좋게 봐주시는 것일 수도 있죠."

그가 개혁과 민주화의 선두주자로 인식되고 있는 뒤편에는 독재와 억압에 항거하고 끝까지 투쟁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의 과거가 자리하고 있다. 폭력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자유로운 표현과 사상을 탄압하는 정권에 반대하던 그는 결국 72년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된다. 그리고 74년 '민청련 사건', 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연거푸 수배되어 11년 간 얼굴 없이 숨어 지내는 고통을 겪는다.  

정권의 억압에 항거하던 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83년 '민주화 운동 청년 연합'을 결성하고 재야 시민 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한지 2년 만인 85년 그는 다시 안기부 요원에게 강제 연행 당한다. 표면적으로는 정부의 탄압이 느슨해져 있었지만, 그런 가식 뒤에 이근안 같은 고문 전문가를 숨겨놓고 있던 때였다.

95년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본격적으로 제도권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김의원은 정치인의 길이 자신에게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라고 말한다. "원래는 정치가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92년 이후 세상이 조금씩 변했고, 제도 정치권에서도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믿음이 생겨 정치에 입문한 겁니다."

정치란 국민의 마음 즉 여론의 뒷받침 없이는 설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정치가라 하더라도 국민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김의원은 정치를 하는 데에 신뢰 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소신과 철학을 가지고 일관된 모습을 보일 때 국민들은 믿음을 갖고 지지를 보냅니다." 국민이 믿는 정치인이 되는 길이란 그의 말처럼 간단한 어휘들로 채워질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 정치의 미숙한 토론문화가 저를 가장 어렵게 합니다." 김의원은 사회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해야 하는 정치인이 오히려 토론에 더 서투르고 의논하지 않고 타협할 줄 모르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의원의 말처럼 현 시대는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과도기다. 과도기라는 이름은 변화와 발전, 진보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정치와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게 아닐까.

과도기를 이끌어 가는 정치인은 의무는 개혁을 이루어 내어 과도기가 끝난 후의 세상을 책임지는 일이다. 그러나 그 책임이 소수의 정치인에게만 있을까? "정치인이 개혁의 선봉대에 서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동시에 정치가 무관심의과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도 정치인의 소임입니다. 그러나 국민들 역시 질책하기 이전에 한편에서 열심히 땀흘리는 정치인들을 위해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이 힘을 모아주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정치는 바로 설 수 없다. 정치가 바로 서지 않으면 새로운 시대를 대비할 수 없다. 국민과 정치인은 그렇게 상호 보완적 이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김의원이 바라는 정치인과 국민의 모습이다. "정치인도 칭찬을 들어야 힘내서 더 열심히 일할 게 아닙니까."

시대의 아픔을 잊더라도 마음의 여유는 잊지 말아야…

초등학생과 정치인의 공통점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라는데 김의원 정도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 그런 욕심이 없을 리 없다. "대통령이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탄탄한 정책을 바탕으로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정치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은 그가 항상 강조하여 말하는 '꿈이 있는 정치', '영혼이 있는 정치'를 더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시대의 아픔을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던 때는 지나갔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학생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을 생각하고 그 시대 정신에 충실하더라고 꿈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점점 개인화되어 가는 학생들이 가끔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의 말 속에 그의 인생 전체가 묻어나는 듯 하다. 불의한 권력에 맨몸으로 대항하다 온갖 고초를 겪었으면서도 선하고 온화한 얼굴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만이 가진 인생의 향기 말이다.

그래서 소설가 박완서는 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나 보다. "진정한 용기란 냉엄이 아니라 따뜻함이라는 걸, 강함이란 날카로움이 아니라 부드러움이라는 걸 알게 해준 사람이다."

윤주화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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