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배치돼 있는 ‘여기’의 서가. 차근차근 성 평등의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의미로 계단을 형상화한 모양의 책장이 인상 깊다.

자유분방하게 배치된 책장은 높낮이가 서로 달랐다. 안쪽에 위치한 벽면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여한 그림들이 전시돼 있었다. 사람들은 책을 읽거나 세미나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일반적인 도서관과는 조금 다르죠?” 도서관 내부를 안내해주던 조화순(32) 사서가 말했다. 그녀는 ‘여기’가 일반적인 공공 도서관과는 차이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료를 열람하고 대출하는 것을 주 업무로 하는 타 도서관과 달리, ‘여기’는 대한민국 성 평등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단순히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단계를 넘어 시민들과 성 평등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성 평등 자료, ‘여기’로 모여들다
성 평등 도서관 ‘여기’는 서울시와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2015년 7월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에 개관한 국내 최초 젠더 라이브러리다. 이름에 걸맞게 일반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단행본부터 희귀한 민간 활동 자료까지 폭넓은 범위의 성 평등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의 전신인 여성평우회의 기관지 <여성 평우>나 2006년 완간된 대한민국의 대표 페미니즘 저널 <이프> 전집이 대표적이다. 경북여성정책개발원의 <경상북도 농촌여성 사회경제적 역할 변화와 정책과제> 등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여성주의 문건도 포함한다. 

▲시민들의 기증으로 이뤄진 서가.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1인 출판 및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출판된 서적이 가득하다.

‘여기’의 자료는 대부분 단체 및 개인의 기증을 통해 수집된다. 판매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료가 아니어서 구입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1인 출판과 크라우드 펀딩(자금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가 온라인 플랫폼 등을 통해 불특정 다수 대중에게 자금을 모으는 방식 : 네이버 시사상식사전)을 통한 출판이 늘어나면서 독립 간행물의 기증도 증가했다. 청년 언론 ‘고함 20’이 ‘2017 아름다운재단 변화의 시나리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판한 <8998 : 헬조선의 여자들>이 그 예다. 시중에 정식으로 출판되지 않은 자료들이라 소장의 의미가 더욱 뜻 깊다. 

흩어졌던 성 평등 관련 자료를 한 곳에 모은 건 큰 성과였지만, 자료를 본격적으로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여기’가 지닌 시공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동시에 자료의 원형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어야 했다. 해답은 아카이브였다. ‘여기’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아카이브 공간을 만들고 모든 소장 자료를 단체, 사람, 기증, 뉴스로 분류해 기록했다. 직접 ‘여기’에 방문하지 않아도 누구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여기’의 성 평등 관련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아카이브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 사서는 불완전한 성 평등 관련 자료를 시민들과 공유하면서 부족한 부분이 보완되길 기대했다. 성 평등 기록 공간으로서 ‘여기’가 모아야 할 자료는 아직 많다. 아카이브는 도서관의 모든 소장 문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시민들이 아카이브를 통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공유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자료는 도서관을 통해 열람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학 자료의 경우 최근 20~30년 동안의 자료는 많지만, 이전 자료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라 기대는 더욱 크다. “저희가 자료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여러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진짜 의미가 생기지 않나 싶어요.” 

여성주의 미술 관람부터 강남역 추모까지…성 평등 행사의 멀티플렉스 ‘여기’

▲ ‘SeMA 콜렉션 라운지(SeMA Collection Lounge)' 프로젝트를 통해 전시된 윤석남 작가의 <너와> 연작. 올해 8월 31일까지 ’여기‘에서 전시된다.

‘여기’는 성 평등 문화의 공론장 역할도 한다. ‘여기’를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곳에서 열리는 다양한 성 평등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행사의 종류는 전시회부터 토론회까지 다양하다. 'SeMA 콜렉션 라운지(SeMA Collection Lounge): 윤석남'도 그 중 하나다. 작년 9월부터 ‘여기’는 도서관 내부의 갤러리 벽면에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화가 윤석남의 <너와> 연작 10점을 전시하고 있다. ‘SeMA 콜렉션 라운지(SeMA Collection Lounge)’는 서울시립미술관이 공공장소에 작품 대여를 통해 서울시 전역으로 미술관의 영역을 확대하고 관객들과 소통하는 프로그램이다. ‘여기’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소장 작품을 빌려 준 세 번째 장소가 됐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과 민간 여성 단체의 프로그램도 ‘여기’에서 주로 열린다. 이곳의 행사는 대한민국 여성 가족 정책의 싱크탱크에서 개최되는 만큼 실제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제를 주로 다룬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환경연대의 ‘생리컵 사용 경험을 통해 본 월경문화 집담회’나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여성혐오의 시대, 무엇을 할 것인가?’다. 특히 후자는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페미니즘 기본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인 우에노 치즈코가 함께 했던 토론회로 많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밖에도 성 평등과 관련된 다양한 세미나와 워크숍이 ‘여기’에서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는 성매매 근절 사업 토론회가 이곳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여기’가 주체가 돼 기획하는 행사도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 6월부터 ‘여기’는 ‘그림책프로젝트! : 여성이 말하고 그리는 불안의 기억’을 시작했다. 일상적인 여성 안전 문제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을 그림책 제작을 통해 공유하는 프로젝트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여성이 일상에서 느끼는 차별과 불안감을 그림책으로 펴낸 개인 출판물 ‘너도 이런 적 있어?’가 기증된 적이 있어요. 그 책을 보고 ‘여기’에서도 직접 그림책을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조 사서는 글로 표현하기 힘든 불안감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어 그림책의 형식을 택했다고 했다. 현재 (2017년 기준) 그림책의 페이지 구성과 가본(佳本, 인쇄 상태가 좋고 교정이 정밀하게 이뤄진 본. 출판사에서 책을 최종적으로 출판하기 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만든 시제품을 가리킨다. 출처 : 네이버 사전) 제작은 끝난 상태다. 그림책을 정식으로 출판하고 나면 타 도서관에 자료를 공유하는 등의 교류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여기’에서 최근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한국 여성사 해제 작업(가제)’이다. 호주제 폐지 등 대한민국 여성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들을 도서관 소장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할 계획이다. 연구 대상이 되는 자료는 비단 문서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 문화 행사 관련 기념 배지, 비디오카세트 등 ‘여기’에서 수집하고 있는 모든 여성학 관련 자료들을 포함한다. “단순히 자료만 가지고는 맥락을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아요. 내년에 연구자들과 함께 한국 여성사를 분석하고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에요.”

▲ 강남역 살인 사건을 추모하는 공간.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내용의 포스트잇과 추모 물품이 모여 있다.

‘여기’의 기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뤄지고 있다. 도서관 책장 사이로 깊숙이 들어가면 수많은 포스트잇이 빼곡한 벽면이 있다. 2016년 강남역에서 일어난 여성 살해 사건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추모의 포스트잇은 꾸준히 추가되고 있다. “다른 곳에 포스트잇을 맡길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창고에 방치될 가능성이 커서 저희가 보관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3만5,350건의 강남역 추모 포스트잇을 아카이브에 문서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비극적인 사건을 추모하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 속에서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한 ‘여기’의 노력이다. 

진입 장벽, 편견 등 아직까지 갈 길 멀어… 대한민국 성 평등을 향한 ‘여기’의 꿈 
이처럼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성 평등 도서관으로서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여기’지만, 고민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중 하나는 도서관의 진입 장벽에 대한 것이다. “성 평등에 대한 전문적인 자료를 소장하는 곳이라 아직까지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요”라고 조 사서는 말한다. 개관 초기에는 도서관을 홍보하고 위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 상영회, 손작업 워크숍 등 타 공공 도서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도서관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됐다고 한다. 도서관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것은 공공 도서관으로서의 역할 이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성 평등 기록의 보존과 공유’가 아닌 ‘시민의 접근성 향상과 문화 향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소리다. 전문 도서관 및 정책 도서관을 표방하는 ‘여기’의 설립 목표와 정반대라 고민은 더욱 컸다. 

이 밖에도 ‘여기’를 일반적인 공공 도서관처럼 운영할 수 없는 이유는 다양하다. 소장 자료의 특성 문제도 한몫한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서적이 대부분인 일반 도서관과 달리 ‘여기’의 자료는 대부분 ‘여기’에서만 소장하고 있는 자료다. 따라서 원본 자료가 한 번 훼손되면 다시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주요 이용자들이 ‘여기’가 지금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를 바라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여기’ 설립을 기획할 때 받았던 자문 중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이 도서관은 다른 공공 도서관과는 다른 길을 갔으면 좋겠다”였다. 일반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은 많지만, 교수나 정책 전문가 등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서관은 드물기 때문이다. 

편견 문제도 남아 있다. “남성분들의 절반 정도가 출입이 가능한 지 여쭤보세요”라는 그녀의 말에도 알 수 있듯이, 성 평등이 여성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인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강남역 추모 공간은 본래 ‘여기’가 위치한 건물인 서울여성플라자의 1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간 베스트 저장소’ 회원들이 인증 사진을 찍고 돌아가는 일이 생기자 사고 방지 차원에서 ‘여기’ 안으로 옮겼다. 일부 ‘일베’ 회원들이 강남역 사건을 조롱하는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추모 포스트잇을 불에 태운 후 인증사진을 올려 논란이 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안하긴 해요.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저희 쪽에서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길까봐....” 조 사서는 아직까지도 추모 공간에 욕설이 적힌 메모를 남기고 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평등 도서관으로서 ‘여기’가 나아가는 발걸음은 희망차다. “저희 도서관책장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요. 성 평등의 역사를 차곡차곡 쌓아나간다는 뜻이에요”라고 조 사서는 말했다. 그녀는 ‘여기’에 가면 성 평등에 대한 모든 자료가 있다는 말을 듣는 게 꿈이라고 했다. “성 평등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면 좋겠어요. 성 평등이 궁금하면 사람들이 ‘여기’에 올 수 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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