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8시 10분, 빨간 벽돌 건물의 한 교실 안.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아저씨와 보글거리는 파마머리를 한 아주머니,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학생과 손질 안된 까치 머리를 한 남학생이 한 곳에 모여 수업을 받고 있다.

"까마귀는 원래 길조였죠?"
선생님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아니요. 흉조요"라고 대답하며 선생님이 모르는 걸 자신들이 안다는 약간의 자랑이 섞인 소란이 시작됐다.
"맞아요. 우리는 지금 까마귀를 흉조로 알고 있죠. 하지만 원래 까마귀는 길조였어요. 옛날 까마귀가 있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미신 때문에 흉조라고 여겨지게 됐지만, 까마귀는 죽을 때까지 부모를 먹여 살리는 영물이죠. 자 그럼 '죽을 때까지 부모를 먹여 살린다' 이것을 반포지효라고 합니다."
까마귀 이야기에서 뚝 떨어진 사자성어. 앞뒤가 안 맞는 설명이 웃음을 자아내지만 칠판 위의 사자성어를 적고있는 사람들에게는 진지한 수업시간의 단면이다.

90학번, 1학년 선생님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많이 했죠? 하지만 조금만 어려워도 수업을 지루해 하시니깐 수업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이런 농담을 많이 해요."
수업 중의 넉살 섞인 뻔뻔함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약간 수줍어하며 이기만 선생님(30. 상록 야학 국어교사·고대부속고등학교 교사)이 꺼낸 첫 말이다. 능숙하게 책을 넘기며 빠듯한 40분 수업을 쉽게 넘어가던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세월이 흐른 만큼 익숙해져서일까?

이 선생님의 야학과의 인연은 9년간의 시간을 갖고 있다. 대학 1학년 새내기 시절, 갑작스런 친구의 공백으로 시작된 야학 교사로서의 생활은 군 입대와 개인적 사정으로 잠시 야학을 떠나 있었던 때를 제외하고 '사람의 정'을 끊을 수 없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힘들죠.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게 좋잖아요."

그간의 세월만큼 이 선생님에게는 야학에서의 시간은 인생의 중요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단순히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 그들에게서 다른 무언가를 배워간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선생님은 자신의 시간들을 남에게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안 받고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희생, 봉사라고 치부해버리는 얄팍한 우리네 나눔의 정신 때문이다.
"남들은 제가 야학에서 가르친다고 하면 저를 굉장히 힘든 일하는 대단한 사람, 뭐 봉사한다는 시각으로 보는데 그러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제나름의 목적을 위해 간 것인데 그런 시선들은 부담스럽죠."

물론 야학에서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일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적, 육체적, 물질적인 이유와는 거리가 있다.
"생활 공간이 달라요. 교실이란 공간을 벗어나면 서로 다른 생활 공간 속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공장에서 해고가 된 사람의 하소연을 하는데 제가 다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또 이것은 노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여기서 9년이라는 시간의 덕이 나온다. 적어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그들의 아픔을 추스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9년을 야학과 인연을 맺고 있는 이 선생님 눈에 비친 야학의 모습은 어떨까.
"이거 정말 슬픈 일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변화가 없는 곳이 야학인 것 같아요. 지난 9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를 못 느끼겠어요. 야학 생활을 하다보면 문제점이 보이죠. 그럼 그것을 고쳐나가기 위해서는 이를 자각하고 있는 교사들, 즉 토대가 쌓여야 하는데 자주 바뀌다보니깐 그러기가 힘들어요. 또 그래서 지쳐서 떠나는 사람들을 보면 아쉽죠."

다시 새내기 선생님으로

야학에서는 9년차 중견의 위치인 이 선생님은 올 초부터 다시 새내기 선생님이 되었다.  이제 야학에서만이 아닌 실제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되었기 때문이다. 천직은 속일 수 없는지 2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아직까지 힘든 줄 모른다. 
"새내기 교사라서 그런가요.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야학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도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물론 담임을 맡게 되면 또 달라질리 모르지만 말이에요"

이 선생님의 눈에는 제법 흥미로운 두 곳의 비교가 보인다. 붕괴되고 있다는 현재 학교 교육의 현실과 야학. 이는 교사 비리니,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이니 하는 것들로 휴교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는 스승의 날에 확연히 드러난다.
"학교는 그날 되면 난리가 나죠. 좀 살벌하다고 할까. 하지만 야학에서는 틀려요. 나이 많은 분들이 '공짜로 가르쳐 준다'로 생각에서인지 양말이나 꽃을 사오시거나 집에서 손수 음식을 해오셔서 나눠먹기도 해요."

하지만 학교에서의 학생들 역시 이 선생님에게는 소중한 제자들이다.
"물론 진지한 야학 수업과는 달리 소란스러움과 말썽들이 있지만 텔레비전에서 보도된 것과 같이 그리 나쁜 애들이 없어요. 나름대로 귀여운 녀석들이죠."

즐거운 교육으로

이 선생님에게 교육이란 누구나 쉽게, 소외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단순히 암기만 하고 시험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즐겁게 배울 수 있다면 그것도 교육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는 이 선생님의 국어 시간이 한시간으로 줄어들었다. 3년 과정을 2년 안에 끝내야 하는 빠듯한 교과 과정으로 과학을 대신해 없어지는 음악 수업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다.
"어떻게 음악을 없앨 수 있겠어요. 다같이 노래를 부리면서 얼마나 즐거워하는 시간인데…."

음악 수업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이 선생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교사의 길이 무엇인지를 본다. 이들의 진지하면서도 흐뭇한 수업광경은 다가올 세기에 만들어야 할 우리 교실의 청사진이다.

김은지 기자<dewedi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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