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교수 최선열

옷로비 의혹사건은 이제 "소프 오페라의 여인들(DEW 7월호 아침이슬 컬럼 참조)"에서 대통령의 남자들(워터케이트 사건을 탐사보도한 워싱턴 포스트지의 칼 번스틴과  로버트 우드워드 기자가 쓴 책의 제목이 "대통령의 사람들"이었음)"로 프레임이 바뀌었다. 국제적인 로비스트와 대통령의 법무비서관이 새로운 등장인물로 부각되고, 대통령에게만 보고되는 국가기밀 "최종보고서"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니 이제 본격적인 소프 오페라가 전개되는 듯하다.

처음부터 이 사건을 철없는 고위 공직자 부인들의 무분별한 쇼핑행각으로 몰고 갔던 언론은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호피무늬 반코트를 입었느니 걸쳤느니, 언제 어디에서 만났느니 안 만났느니 하는 시비로 시간을 낭비했던 국회의원들도 부끄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결국 그 여인들은 국회 청문회를 데뷔무대로, 누군가가 집필한 대본에 맞추어 능청스럽게 연기대결을 벌인 셈이 아닌가. 이제 늦게나마 특검팀에 의해 그 여인들 뒤에 "대통령의 남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사건의 축소니, 조작이니, 은폐니, 기밀문서의 유출이니 하는 사뭇 심각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보니 진실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학연, 지연으로 얽히고 설킨 권력 핵심부의 남자들이 저질러 온 서로 봐주기, 공사구별 안 하기, 기밀 빼내기, 적당히 둘러대기, 뻔뻔스럽게 거짓말하기 등의 관행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물고기가 자신이 물에 젖어 있음을 모르는 것처럼 그러한 관행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기 힘들 것이다. 이번 기회에 엄중한 처벌과 권력구조의 개편을 통해 이러한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떠올린다. 1972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이 유명한 사건은, 그 출발은 옷로비 사건과 크게 달랐으나 전개과정에서 대통령 측근들의 권력남용, 사건의 은폐조작, 위증 등이 국회청문회, 특검팀 등에 의해 밝혀지는 등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필자가 미국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 그 사건이 일어났는데,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워낙 컸기 때문에 수업 중에서나 수업 밖에서 교수들과 미국 친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귀중한 교육이 되었다.

사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번스틴과 우드워드의 집요한 추적 보도가 없었다면 그저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불법 침입, 도난사건 뉴스로 짧은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이 사건을 "Watergate break-in"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워터게이트 주상복합건물 내에 입주해있던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 본부 사무실에 5명의 도둑들이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문건을 훔치려고 들어갔다가 잡힌 사건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도난사건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확대된 것은 그 침입자들이 닉슨 대통령의 재당선 추진위원회와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닉슨 대통령의 재당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국세청(IRS), 국가정보원(CIA), 경찰청(FBI), 비밀경호원(Secret Service)과 같은 국가기관이 총동원된 가운데 도청, 세무사찰, 야당 사무실 잠입 등 술책을 써왔다는 사실들이 점차 드러나게 되고 특별검사에 위해 대통령의 측근들이 이러한 조직적이고 불법적인 재선전략에 깊숙이 개입되었다는 사실들이 밝혀졌다. 국회청문회와 특별검사를 통해 대통령 주변사람들의 부패와 권력남용 등이 낱낱이 밝혀지게 되고, 결국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닉슨이 끝까지 공개를 거부했던 그의 집무실내 전화 통화와 대화 내용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제출하게 된다. 이 녹음테이프를 통해 닉슨이 백악관의 조직적인 은폐 기도를 알았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실까지도 드러나게 되었다. 은폐 조작에 개입한 사실을 줄곧 부정해왔던 닉슨 대통령은 권력남용과 법질서 파괴, 위증에 대한 책임을 지고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물론 닉슨 대통령은 야당인 민주당사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서류를 훔쳐올 것을 구상하지도 직접 명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의 측근들이 대통령의 재임을 위해 충성을 바치다가 권력을 남용하게 된 것이고 사건이 비화되자 은폐 조작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 언론은 백악관의 은폐 조작 기도를 대통령이 언제 알게 되었는지, 알았다면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를 끈질기게 추적했다. 문제는 대통령의 거짓말이었다. 미국인들은 권력자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오래 전 남의 나라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었지만 권력에 대한 집착과 남용, 국민에 대한 기만 등 권력의 취약성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대통령의 사람들이 대통령을 위한다고 벌인 일들이 끝내 대통령을 물러나도록 만든 것이다. 공정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통해 오랜 기간 동안 민주주의 기틀을 다진 미국에서도 대통령의 사람들의 권력 남용과 기만이 이런 비극을 불러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 토대가 약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기본원칙과 절차를 무시했을 때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워터게이트 사건은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냥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도 전리품처럼 싸워서 얻어지는 것도 아닌 모두가 계속 지켜야 하는 원칙과 절차임을 알 수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민주, 공화 양당 중심의 정당제도와 선거 등 정치 과정에 대한 미국인들의 심각한 불신과 정치 자체에 대한 냉소주의는 위험 수위에까지 올랐었다. 자신들이 이룩한 번영과 민주적 정치제도에 대한 자부심으로 세계인들을 위한 민주주의의 전도사를 자처했던 미국인들에게 워터게이트 사건은 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준 충격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아직 전개과정에 있긴 하지만 이번 사건은 우리 국민들에게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민주투사 경력"의 대통령이 이끄는 도덕성을 강조하는 정권에 대한 국민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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