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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신문은 '난쟁이 넘기기' 황정미 세계일보 편집국장 인터뷰
문예슬 기자 | 승인 2017.05.25 00:00

종로에 위치한 신문로는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흐드러진 봄꽃과 함께 19대 대통령 선거 벽보가 외벽 돌담을 감싸고 있었다. 편집국이 위치한 3층으로 향했다. 지난 달 28일, 스토리 오브 서울은 황정미 편집국장을 만나기 위해 세계일보 국장실을 찾았다.

기자로 보이는 두 사람이 헐레벌떡 들어와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손을 집어 넣었다. 엘리베이터가 편집국으로 향하는 동안 그들은 땀을 닦고 숨을 고르다,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몸을 비틀어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곧 세계일보 편집국의 풍경이 펼쳐졌다. 오후 3시. 마감을 앞둔 편집국은 종종걸음,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낮게 웅성대는 소리로 후덥지근했다.

편집국을 가로질러 도착한 국장실은 작고 따뜻했다. “그렇지 않아도 메일만 주고 받기 아쉬웠는데, 만나서 반가워요.” 황정미 국장이 하던 일을 멈추고 환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탁자에 놓인 난초에는 꽃이 피었고, 잎에 달린 모형 나비는 하늘댔다. 

▲ 4월 28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세계일보사 3층 편집국장실에서 황정미 국장이
스토리 오브 서울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지숙 기자)

"오늘 트럼프가 여러 발언을 해 놔서, 그것 때문에 좀 바쁘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울렸다. “슬로건, 홍준표, 사전투표”. 황정미 국장이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외교안보부를 따로 둘 정도로 외교 이슈에 강하다는 세계일보의 면모가 실감났다. 1989년 발행된 세계일보 창간호에는 오스트리아, 체코, 바레인 등 전세계에 파견된 특파원 10명이 소개돼 있다 .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후배들은 덜 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한 발짝이라도 먼저 나간 사람 입장에서 공유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 시간을 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리고 나도 후배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어요.” 황정미 국장은 이미 한 차례 서면 인터뷰에 응하고도 한 번 더 시간을 내 스토리 오브 서울을 초대했다.

'3김'밖에 모르던 기자 초년생이 '정치 전문 기자'가 될 때까지

1989년, 세계일보가 창간됐다. 황정미 기자는 공채 2기로 입사했으니 세계일보와 함께 기자로 성장한 셈이다. 그는 사회부에 있었던 첫 5년을 제외하고는 기자 생활 대부분을 정치부 기자로 지냈다. 1990년대만 해도 여기자가 정치부에 배정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처음에는 사회부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하루는 선배가 아는 정치인 이름을 다 대 보라고 하더라고요.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딱 세 명을 대니까 선배가 기가 찬 표정을 지었죠. 그래도 어떻게 정치부로 갔네요.”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1996년 당시 여당이었던 국민회의를 시작으로 1999년에는 청와대를 출입했다. 2005년에는 정치 부장이 됐다. 2013년에 편집국장에 오르고 ‘정윤회 문건’ 특종을 지휘했다. 2015년 논설위원을 지낸 뒤 2016년 12월부터 두 번째 편집국장 임기를 시작했다. 

편집 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지금도 그가 쓰는 칼럼의 상당수는 정치를 주제로 한다. 논설위원이었던 2015년부터 2년 간 쓴 칼럼만 봐도 그렇다. 총 43개 중 정치를 다룬 것이 23개로, 절반을 차지한다. 청와대, 대통령, 국회, 정당, 정치인, 여의도 정치 등을 열쇠말로 삼은 글들을 센 것이다.

그의 칼럼은 단순히 정치인의 말을 인용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치인의 이력과 과거 발언, 성격까지도 담아낸다. 

"이들과 비슷한 시기 정치를 시작한 남 지사나 유 의원은 나름 정치적 진화를 거쳤다. 남 지사의 연정은 오랜 독일 연구 모임의 산물이다. 미국 경제학 박사 유 의원은 2008년 박근혜 대통령 경선후보의 '줄푸세' 공약을 만든 자유주의자였지만 공정한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유승민, 남경필 그리고 야당의 '86세대'', 2015.08.06

"대통령을 이길 수는 없지 않느냐"는 김무성 대표의 말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승부사 기질이 강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 밑에서 정치를 배운 사람이다. YS는 "현직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을 만들 수는 없어도 못하게 할 수는 있다"는 걸 몸소 실천한 대통령이다." 
- '빨간 옷을 입은 철의 여인', 2015.07.01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취재원을 활용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정치부를 오래 출입한 기자의 관록이 묻어난다. 취재 기자일 때 당장 기사화하지 못했던 내용들을 논설위원이 된 뒤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인터뷰하기가 좀 까다롭다. 외교안보 현안에 대한 코멘트를 따려면 자기 발언이 어느 정도로 취급되는지부터 묻는다." 
-문재인과 북핵 리더십, 2016.10.18

""무슨 말인지 일차 터득이 안됩네다." 2006년 6월 13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취재 당시 인민문화궁전 만찬 때 동석한 인민배우의 말이다. 남한에서도 방영된 영화 '임꺽정'의 주인공인 최창수씨는 첫 남북 정상 만남에 대한 평양 주민들의 반응, 남측 일행단에 관한 이런 저런 질문에 도통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남북, 두 개의 시간, 2015.08.09

하지만 그가 가장 아끼는 기사는 거물 정치인이나 정치 전문가를 다룬 기사가 아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쓴 ‘유권자가 바뀐다’ 시리즈로, 일반 시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기사다. 그는 그 중에서도 “남편 따라 찍는다고… 천만에”를 꼽았다. 이 기사는 여성 유권자는 남편이 정하는 후보를 따라 선택한다는 당시의 고정관념을 깼다. 같은 시기 다른 언론사의 대선 기획 기사가 대부분 후보 개인과 캠프, 책과 이념 분석을 주제로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2007년 '정치 전문 기자'로 활약할 때 이 기사를 직접 기획했다. 정치 전문 기자는 하나의 직함으로, 정치부 내 평기자나 정치부장과는 역할이 달랐다. 평기자처럼 매일의 현안을 따라 잡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기획, 취재했다. 출입처도 따로 없었다. 덕분에 호흡이 긴 기사나 인터뷰 기사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정치인이 던지는 메시지만 보고 쓰면 ‘스핀닥터’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기사들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유권자 입장에서 생각해야 해요. 태극기 집회의 경우에도 그래요.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보지 않고 정치적 득실의 개념으로만 접근하면 놓치는 부분이 있는 거죠." 그는 정치 기사의 주인공은 정치인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중앙 일간지 여성 편집국장 3명… 그러나 "양질전환은 5년 내 불가능"

‘여기자 최초’. 그를 수식하는 말 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그는 청와대를 출입한 최초의 여기자이자 중앙 일간지 최초의 여성 정치부장이다. 몇 안 되는 여성 편집국장이기도 하다. 현재 10개 중앙 일간지 중 세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세 곳의 편집국장이 여성이다. 이 중 편집국장을 두 번 이상 지낸 것은 황정미 국장이 최초다. 

이는 여성 언론인의 저변이 확대됐다는 의미일까. 그는 2005년 관훈클럽의 <성 인지적 시각과 언론 보도>에서 언론이 여성 문제를 다룰 때의 질은 낮지만, 다행히 양이 많아지고 있어 언젠가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10년이 더 지난 지금, 그가 예견한 ‘양질전환’은 일어났을까.

“아직 멀었죠.” 황정미 국장은 단언했다. 

"분명히 지금 입사하는 기자들 수를 보면 남녀 비율이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차장, 부장, 국장급으로 올라가면 여기자들의 수는 절대적으로 적습니다. 회사와 조직의 문화를 바꿀 정도의 양질전환이 이뤄지려면 턱도 없는 수치죠."

-이유가 뭘까요?

"아직 중간관리자를 많이 배출할 정도로 여기자들의 연차가 오래되지 않았고, 대개 육아와 회사 업무를 병행해야 하는 여기자들에 대한 경영진의 배려가 충분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자 개개인 역량에 대한 평가가 낮을 수도 있고요." 

그는 2005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남성 중심 문화가 변화하고 있어 사물을 차분하고 깊이 있게 바라보는 여성적 특성이 더 요구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여기자 황정미'가 아닌 '황정미 기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90년대만 해도 정치부, 사회부 등 스트레이트 부서에 여기자들이 많지 않을 때였어요. 그러다 보니 '여기자'가 출입한다는 것 자체가 화제가 되고 그런 잣대로 기자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풍토가 많았죠. 그 희소성이 취재원들에게 쉽게 기억되고 수용된다는 측면에서 장점도 없지 않지만, 기자 개인의 역량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기자 황정미'로 평가받고 싶다는 뜻이 강했던 거죠."

-차분함, 꼼꼼함, 부드러움이 정말 여기자만의 장점일까요.

"여기자의 자질이라는 건 없습니다. 기자로서의 자질이 우선입니다. 세상 온갖 것에 대한 호기심과 비판 정신, 그걸 물고 늘어지는 근성, 자신의 관점을 키워 나가는 지력이 기본이죠. 다만 사안을 꼼꼼하게 바라보고 종합적으로 분석, 조망하는 능력이 여후배들에게 돋보이기는 합니다. 그런 것을 강점으로 키울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여당인 국민회의를 출입했던 1990년대는 '사우나 취재', '룸살롱 취재' 등 폐쇄적인 취재 관행이 당연시 됐던 때다. 그는 남성 중심적 관행에 정면 도전하는 방식을 택했다.

"사우나는 못 갔어도 룸살롱은 많이 따라 갔어야 했죠." 지난 달 22일 장충동 메디아티 스튜디오에서 열린 ‘Glass Zoo:Women In Journalism’ 행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참석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보를 얻기 위해 계속 룸살롱을 가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자리에 있을 때 '아, 저 기자는 이런 데까지 와서 (취재원과) 스킨십을 가지는 데 거부감이 없구나'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나쁘지 않아요"

그는 "다행히 지금은 비밀스런 장소보다는 공개적인 회의에서 결정되고 논의되는 것들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며 "점점 많은 여기자들이 정치 분야에서 활동하는 데는 그런 흐름의 영향도 있다"고 덧붙였다.

황정미 국장은 2010년 기독교 매체 <뉴스미션>과의 인터뷰에서 여성이라는 자신의 성(性)이 난쟁이를 넘기는 것과 같다고 얘기했다. ‘난쟁이 넘기기’는 미국의 저널리스트 톰 플레이트가 지면 제작 중에 느낀 경험을 설명하는 말이다. 시도하고 싶은 파격적인 선택을 후회 없이 해보자는 뜻이 담겼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넘긴다고 넘겨지는 것은 아닐 테니, 평생의 화두로 남겨 두었단다.

"탐사보도에 강한 신문, 세계일보 브랜드를 자부합니다"

대신 지금 그는 매일 소소한 '난쟁이 넘기기'를 하고 있다. 그가 만드는 세계일보의 지면에 대한 고민이다. 세계일보가 어떤 콘텐츠로 다른 신문과 차별화 할 것인가, 좀 더 과감한 기획을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너무 무난한 선택이 아니었나 후회한다. 

그는 세계일보가 새로운 도전에 과감할 수 있는 이유로 기자의 재량권을 존중하는 편집국의 분위기를 꼽는다. “후배들한테 늘 말해요. 너희가 하기 나름이다, 너희의 아이디어에 편견 없이 한번 해봐라. 세계일보의 탐사보도팀이 강한 것도 이런 분위기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세계일보는 2001년 특별기획취재 팀을 신설했다. 탐사보도라는 개념조차 희박할 때였다. 과감하게 1면에 기획취재를 실어 ‘세계일보가 신문의 1면을 바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황정미 국장은 2004년에 특별기획팀장을 맡았다.

▲ 세계일보는 2003년에 탐사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특별기획취재팀을 신설해 “신문의 1면을 바꿨다”는
평을 들었다. 사진은 2007년 2월 5일자 세계일보 1면 상단의 기사 <한국 대외 협상력 리포트>는 그 달에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기획보도 부문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편집국은 특별기획취재팀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아이템 선정부터 출고까지, 편집국장조차 알 수 없다. 지면 배치 정도를 조율할 뿐이다. “제가 먼저 묻지도 않지만, 특별기획팀에서도 얘기를 안 해줘요. 제가 특별기획취재팀의 팀장에 있었던 2004년부터 편집국으로부터 그렇게 배려를 받았으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문화가 확실히 정착한 셈이죠” 팀을 구성할 때도 마찬가지다. 특별기획팀장이 팀워크와 참여 의지를 고려해 자율적으로 팀을 꾸린다. 

2014년 정윤회 문건 특종은 ‘정치통’ 황정미 국장과 편집권의 보호를 강조하는 세계일보의 장점이 힘을 발휘한 사례였다. 그는 당시 첫 번째 편집국장 임기 중이었다. 

-조한규 당시 세계일보 사장은 문건에 대한 보고를 받은 2014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문건을 아예 보지 못했다고 술회했습니다. 회사의 명운이 달린 문건이었는데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희 기자들이 확보한 문건은 취재 및 보도를 위해서만 활용돼야 합니다. 문건의 내용은 기사 작성을 위해서만 사용돼야 하고 그 취재원 또한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장은 보고 라인에 있는 임원이었는데도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사전 또는 사후에 유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요. 보안상 문제도 있어요. 당시 문건에 적시된 소위 '문고리 3인방'은 정권 실세로 알려져 있는데, 정권 초기에 이런 비선 실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가 나가는 것을 사전에 알게 될 경우 유무형의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보안의 필요성과 함께 보도의 취지가 왜곡될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려는 뜻도 있었다.

"비선실세의 국정 개입 의혹을 폭로하고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화하자는 의도가 보도의 취지인 만큼, '정권 흔들기 아니냐'는 정치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사장을 포함한 임원에도 문건을 공유하지 않은 겁니다."

그는 세계일보가 한국 사회의 ‘건강한 소금’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며, ‘탐사보도에 강한 신문 세계일보’ 브랜드를 자부한다고 강조했다.

후배 기자들에게… “자기 동기부여와 생각하는 근육이 중요합니다”

그는 대화 중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다.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기자의 요청에 “준비가 안 돼서 당황스러운데”라면서도 웃으며 재킷을 챙겨 입고 포즈를 취해 주었다. 한 발짝 먼저 언론인의 길을 걸은 그는 미래 언론인들에게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을까. 

“확실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자기 페이스, 속도대로 기자 생활을 할 수 있어요. 그런 동기부여가 확실하다면 기자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사회에 대한 호기심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글로 표현하는 능력도 중요합니다. 지력, 생각하는 근육을 단단히 하는 건 초년 기자부터 마지막까지 필요한 일입니다. 자기 동기부여와 생각하는 근육량을 키우는 일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인터뷰를 마친 뒤에 그는 문 밖까지 기자를 배웅했다. “명함이 나오면, 갖고 다시 찾아오세요.” 그는 기자가 발길을 돌릴 때까지 손을 흔들다 다시 국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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