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 고잔고등학교 김모 양(17)에게는 교과서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있다. 바로 화장품 파우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꿈꾸지는 않지만 비비크림과 블러셔, 틴트, 아이브로우 등 전문가 수준의 화장품이 파우치를 꽉 채웠다. 백화점 브랜드부터 로드샵 브랜드까지, 다양한 화장품이 김 양의 책가방 속에서 항시 대기 중이다.

청소년에게 화장은 더 이상 학교 밖에서 저지르는 일탈이 아니라 흔한 일상이다. 청소년들도 길거리에서 비싸지 않은 화장품을 쉽게 살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화장법을 알려주는 뷰티 유튜버를 통해 집에서도 쉽게 화장을 배울 수 있다. 가장 구독자수가 많은 뷰티유튜버 '포니'는 245만9431명(2017년 4월 9일 기준)의 구독자를, ‘씬님’은 125만2974명(2017년 4월 9일 기준)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학생 메이크업'이라는 검색어로 유튜브에 검색하면 이들 뷰티 유튜버들이 제작한 5만 7천300개의 동영상이 뜬다. TV에서는 10대 아이돌 가수들이 진한 화장을 하고 나온다. 10대 배우인 김새론, 김소현, 김유정, 이수민 등은 화장품 모델로 활동했다. 이 정도면 화장 부추기는 사회다. 

▲ 서울시 왕십리역에 위치한 한 화장품 가게 벽의 전면이 청소년 배우 김소현(18)의 화장품 광고로 뒤덮여있다.

과거엔 소수만, 지금은 다수가 
과거 학생들에게 화장은 소위 ‘노는 애들’의 전유물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여중생, 여고생에게 화장은 익숙하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 공모 씨(25)는 “학교 분위기마다 다르겠지만 이전에 근무하던 학교와 지금 근무하는 학교를 평균 낸다면 어림잡아 여고생 95%는 화장을 하고 다닌다”고 밝혔다.

화장을 시작하는 연령은 점점 빨라져 초등학생 때로 앞당겨졌다. 서울 노원초등학교 교사 유주희 씨(26)에 따르면 초등학생들은 6학년 1학기부터 틴트나 립글로스를 입술에 바르기 시작하다가 졸업이 가까워지는 6학년 2학기 무렵엔 풀메이크업을 시도한다. 유 씨는 “학생들의 파우치를 본 적이 있는데 메이크업 베이스부터 파운데이션, 눈과 입술 전용 리무버까지 들어있었다”며 “또래 아이돌 가수의 영향 때문인지 대부분 화장에 거부감이 없고 능숙하다”고 말했다. 

관련 정책도 화장품 규제가 불가능하다면 올바른 사용법과 성분을 알려주자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색조 화장품의 사용법을 알리는 책자를 초·중·고등학교에 배포했다. 또한 올해 9월부터 만 13세 이하 초등학생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어린이용 화장품’을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화장 부추기는 사회, 화장 단속하는 학교
청소년들은 화장에 대해 점점 능숙해지지만 아직 많은 학교는 화장에 엄격하다. 10년 넘게 청소년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오고 있는 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서울지부는 지난해 10월~11월에 '서울 지역 여학생 용의 복장 규제 사례’ 128건을 수집했다. 이 중에 화장과 관련된 규제 사례는 59건이었다. 

단속의 양상은 다양했다. “남자 교사가 지나다니며 입술에 화장품을 바른 게 보인다면 손목을 붙잡고 생활지도부로 끌고 가 지우게 했다.”, “입술에 틴트를 바르지 않았는데 입술이 붉다며 벌점을 주었다.”, “등교 때 교문 앞에서 화장한 것이 걸리면 물티슈로 화장을 지우게 하고 화장품을 압수했다.”, “선도부가 반마다 들어와 화장품이 든 파우치를 전량 회수하여 들고 나갔다.”, “색조 화장이 안 된다고 해 색이 없는 오일 틴트를 입술에 발랐는데 압수당했다.” 등의 사례가 아수나로에 접수됐다. 

화장품 단속은 대개 불시에 소지품 검사를 해 화장품을 압수하고 벌점을 부과하는 식이다. 운이 좋으면 넘어가지만 운이 나쁘면 걸린다. 학생들이 단속이 있다고 해서 학교에서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안산 고잔고등학교 김모 양(17)은 단속의 눈을 피하는 ‘도둑 화장’에 익숙해져 있다. 김 양의 화장품은 등굣길 선도부의 화장 단속을 지난 뒤에야 파우치 밖으로 나온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이 양은 열심히 눈썹을 그리고 틴트를 바른다. 행여 교사에게 걸리면 화장을 지워야 하거나 화장품을 압수당할 수 있기에 김 양의 마음은 늘 조마조마하다. 

단속의 기준은 들쑥날쑥하다. 서울 홍익여자고등학교 송모 양(18)은 여드름흉터가 많은 피부가 콤플렉스다. 평소 약국에서 처방받은 여드름흉터 크림을 바르고 컨실러로 가린다. 색조 화장도 아닌데 교사는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은 다 금지라면서 화장품을 압수하고 벌점을 매겼다. 송 양은 “치료용으로 구입한 비싼 제품이었는데 무조건 화장품이라고 뺏어갔다"고 말했다.

대부분 교사도 단속이 귀찮고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대전의 한 중학교 교사 유모 씨(27)는 “화장품 단속 때문에 365일 학교가 시끄러워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유씨는 단속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화장과 화장품 소지를 아무리 금지해도 화장하고 다니는 학생들은 늘 있기 때문이다. 유씨는 “주로 연차가 높은 교사들이 엄격히 단속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서, 젊은 교사인 나는 다른 생각이 있어도 표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화장 단속은 대부분 교칙이나 학급 내 규율에 근거해 이루어지고 있다. 경기도 부천 소사초등학교 6학년 담임교사 송모 씨(30)는 “화장에 관한 교칙은 따로 없지만 수업 중 화장을 고치거나 친구의 화장품을 마음대로 써 다툼이 발생하는 등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내가 담임을 맡은 반에 한해 화장을 금지했다”며 “초등학생의 화장이 위험하다는 영상을 보여준 후 학급회의를 거쳐 결정한 것”이라 밝혔다. 

학생인권조례 있지만 실효성은 글쎄 
학교의 화장 단속이 학생 인권조례와 어긋나는 게 아니냐는 논란도 있다. 서울특별시, 경기도, 전라북도, 광주광역시 등의 학생인권조례에는 관련 조항이 있다. 2013년 제정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4절 12조 ‘개성을 실현할 권리’에 따르면 학생은 복장, 두발 등 용모에 있어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가진다. 13조 ‘사생활의 자유’에 따르면 학생은 소지품과 사적 기록물, 사적 공간 등 사생활의 자유 및 감시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서울여자고등학교 오연준 양(18)은 “학생인권조례도 있는데 화장 단속하는 것은 문제 아니냐는 내용의 대자보가 학교에 두 번이나 붙여졌다”고 밝혔다.

학생인권조례는 현실에서 힘이 약하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특별시교육청 민주시민교육과 인권조사관은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보장하고 있는 개성을 실현할 권리에 화장이 명시적으로 포함되지는 않아 화장 단속이 해당 권리를 침해한다고 보기에 모호한 부분이 있는 것이 현실”이라 밝혔다. 홍순균 서울특별시교육청 학생자치팀 장학사는 “조례보다 상위법인 시행령에 학교규칙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학교규칙으로 정해진 것이 더 효력 있다”고 말했다. 초ㆍ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1항은 규정 7번은 ‘학생 포상, 징계, 징계 외의 지도방법, 두발·복장 등 용모, 교육목적상 필요한 소지품 검사,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의 사용 및 학교 내 교육·연구활동 보호와 질서 유지에 관한 사항 등 학생의 학교생활에 관한 사항’을 학교규칙(이하 교칙)에 기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조례보다 상위법인 시행령에 따라 만들어진 교칙에서 화장을 금지하면 인권조례와 상관없이 단속이 가능하다. 시행령과 조례 간 충돌이 일어나는 셈이다. 

물론 교칙이 한 번 만들어졌다고 영원한 것은 아니다. 학부모, 교원, 학생의 의견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ㆍ중등교육법 시행령 제9조 4항에는 ‘학교의 장은 제1항 제7호부터 제9호까지의 사항에 관하여 학칙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때에는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미리 학생, 학부모, 교원의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반영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교칙에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려 ‘노력’했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교칙을 개정하는 자리를 정기적으로 마련하는 학교도 적을뿐더러, 그런 자리가 마련돼도 형식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잔고 김모 양(17)은 “‘학생대토론회’라고 학생이 참여해 학칙에 대해 건의하는 자리에서 화장 단속의 기준이 모호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 없이 콤플렉스를 가리기 위해 화장하는 것을 왜 잡느냐는 불만이 많이 나왔다”며 “교사들은 그런 건 나중에 얘기하라며 건의사항을 무시하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 화장품 로드샵에서 직접 화장품을 발라보고 고르는 청소년들


어른이 아닌 청소년의 시선으로 만들어가는 화장 규칙
학생들이 학생인권조례를 가지고 토론한 후 그 결과를 통해 학칙과 학교 문화를 직접 바꿔나가는 긍정적인 사례도 있다. 서울 금옥여자고등학교에는 ‘금옥인권위원회’라는 이름의 동아리가 있다. 동아리에 소속된 35명의 학생은 차별금지와 의사표현의 자유, 학습에 관한 권리 등 조례 속 정신을 녹여낸 6개의 소위원회에서 활동한다. 서울 삼각산고등학교는 학교 단위의 교칙을 폐지하고 학년•학급별로 직접 만든 규칙을 통해 화장 등 용모를 규정한다. 최윤진 중앙대학교 청소년학과 교수는 “일차적으로는 화장을 보장해주되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피해줄 만한 요소는 학생들이 스스로 규제할 수 있도록 함께 규칙을 만들어가야 하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배우는 기회이기도 할 것”이라 조언했다.

청소년의 화장에 대한 시선은 청소년의 정치 참여에 대한 시선과도 비슷하다. 청소년 때까지는 정치에 무관심할 것을 요구받다가, 만 19세가 되고 투표권이 생기면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은 무식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10대 여학생은 학교에서 화장하지 않을 것을 요구받다가, 20세가 되는 순간 여성의 ‘쌩얼’은 민폐라는 얘기까지 듣게 된다. 서울 홍익여고 송모 양(18)은 “차라리 여성 모두 민낯으로 다닐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는 얘기를 친구들과 자주 나눈다. 다 화장하고 다니는데 어떻게 나만 화장하지 않고 다닐 수 있냐”고 말했다. 청소년 인권행동 아수나로의 활동가 난다는 "여성 청소년들이 무조건 화장하지 말라는 학교의 규칙과 화장을 부추기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혼란을 겪는 것은 사실"이라며 "여성 청소년도 의견을 낼 수 있는 주체로서 교칙을 함께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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