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코너는 후보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지금의 지도자를 만든 요인이 젊은 시절에 있지 않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취재팀은 1월 중순부터 자료를 찾았습니다. 자서전, 언론보도, 블로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용했지만 이런 내용만으로 기사를 쓰기가 곤란해 2월부터 직접 취재에 나섰습니다. 출마선언식, 토론회, 출판기념회…. 주변 인물도 만났습니다. 배우자, 학교친구, 회사동기, 투쟁동지, 보좌관, 정책자문단을 통해 후보의 면모를 더 파악했습니다. 유명 언론사의 정식기자가 아닌, 학생기자를 위해 많은 분이 시간을 내서 만나거나, 전화와 이메일로 취재에 응했습니다.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당의 후보선출이 막바지로 향하는 중입니다. 경선결과 못지않게 정치 지도자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주요 후보를 모두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꿈을 꿀 수 있는, 그런 사회 만들어야 합니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둔 1월 26일, 오전 9시경. 서울역광장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입을 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지만 그는 맨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쉼 없이 말을 걸었다.

열심히 일하고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를 위로했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임에도 생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회를 비판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개혁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귀성객이 악수를 청하자 그는 하회탈 웃음을 지었다. 정의당 상임대표 심상정(58)이었다.

그는 대선 슬로건(노동이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청년들이 갖는 절망의 핵심은 내 인생을 내가 개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누구든, 내가 어느 지역, 어느 대학 출신이든 땀 흘린 만큼 미래를 열어갈 확신을 주는 사회가 노동이 있는 민주주의다.”(한겨레신문 인터뷰, 2월 14일)

심 대표는 노동운동사에 획을 그은 구로동맹파업의 주역이었고, 9년의 시간을 버틴 여성 최장기 수배자였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결성을 주도해 중앙위원장이 됐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쟁의부장‧쟁의국장‧조직국장, 민주금속연맹‧금속산업연맹 사무처장, 전국금속노동조합 사무처장을 거쳤다. 2004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정치인이 되기 전까지, 노동운동 한가운데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언주(현 국민의당) 의원실의 김진태 정무보좌관은 이런 심 대표의 20대 시절을 잘 아는 이다. 기자가 2월 2일 국회의원회관 809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심 대표에게) 노동운동 쪽에 세례를 준 사람은 나”라며 입을 열었다.

하이힐을 신던 여대생
김 보좌관은 대학에 입학한 뒤, <대학문화연구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했다. 후배들을 노동 현장이나 야학에 데려갔는데 2년 아래인 78학번 새내기 심상정이 그중 한 명이었다. 심 대표는 서울 구로공단에서 야학을 하면서 노동자를 처음 만났다. 이듬해 봄,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 인생이 바뀐다.

▲ 대학시절의 심상정 대표

“자신의 두 눈을 팔아서라도 어린 노동자를 살리고, 지키고 싶었던 그 연민의 정을 닮아서 제가 25년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2월 8일 정의당 경선에 앞서 심 대표가 했던 말이다. 겨울방학 한 달을 ‘공활’로 보내며 노동운동에 투신하겠다고 다짐하다가 1980년, 전태일 같은 미싱사로 구로공단에 취업한다.

심 대표의 곁을 2년째 지키는 이석현 홍보총괄 보좌관도 그 시절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잔업까지 하고 나면 밤 10시쯤 되는데, 그때부터 (구로 지역 활동가들과) 스터디를 한대요. 새벽에 유인물 만들어서 등사기로 밀고, 3시간 자고 새벽에 일어나 5시부터 유인물 돌리는 거죠. 각 집마다. 그러다 보면 1시간 뒤에 경찰이 쫙 깔린다고…. 그걸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얘기를 안 하는 거보면 참 신기해요.”

전두환 정권이 ‘노동조합 정화 조치’라는 이름으로 노동계를 탄압하자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이 시작됐다.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등 구로공단 사업장의 노조들이 참여했다. 심 대표는 당시 배후에서 파업을 총괄했다. ‘김혜란’이라는 가명을 썼다. 대우어패럴에 위장 취업한 혐의로 해고돼 수배된 상태. 1계급 특진과 500만 원의 현상금이 걸렸다.

남편 이승배 씨는 노동투사로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한다. “(심상정은 스스로) 삶의 진로에 대해서 어떤 게 올바른 삶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확신이 서면, 전심전력을 다해 열심히 해냈고요.”

심 대표는 노동투사, 진보정치의 ‘심다르크(심상정+잔다르크)’로 불린다. 주요 정당의 대선후보 중 유일한 여성. 어릴 적 장래희망이 스무 가지도 넘었지만 정치인이란 단어는 없었다. 20살 심상정의 꿈은 교육자였다. 아버지가 사다 준 위인전을 읽으며 역사교사를 꿈꿨다. 서울대 역사교육학과에 입학한 이유였다.

여대생 심상정은 멋쟁이였다. 허리까지 오는 생머리, 7㎝가 넘는 하이힐에 미니스커트. 꾸미기 좋아하고, 마음껏 연애하고, 책을 읽고, 여행 다니길 바랐다. 학생운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쫓아가면 죄다 운동권이었다. 시위대를 따라다녔다. 생머리, 하이힐,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에게 잘 보여야 했으니까. 김진태 보좌관은 당시를 생생히 기억한다.

“(1978년) 1학기 때 6월 즈음에 광화문 가두시위가 기획이 됐어. 후배들 데리고 갔는데, 경찰들이 많이 깔려있었을 거 아냐. 거기에서 시위다운 시위도 못해보고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도망 다녔는데, 하이힐 신고 도망 다니기가 쉽지 않잖아. 그 후부터 운동화를 신고 다니기 시작하더라고. (웃음)”

시위하던 모습이 사진 채증에 걸려 학생처에 불려갔다. 학생처장이 사진과 실제 모습을 번갈아보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네, 혹시 운동권 애인 뒀나?”라고 말한 일화는 심상정의 자서전 <당당한 아름다움>에 나온다. 여대생 심상정은 이때부터 달라졌다. 긴 생머리가 커트 머리로, 미니스커트가 청바지로, 하이힐이 운동화로. 운동권 여학생의 ‘표준 패션’이었다.

▲ 민주노총 금속노조 사무처장 시절, 노동자대회를 끝내고(1996년 11월 10일)

용광로 같던 봄날
운동화로 갈아 신으면서 투사의 면모를 보였다.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3학년 사이에서 여학생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심 대표는 운동권의 가부장적 현실에 분노했다. 남학생들과의 마찰이 잦아졌다.

“농촌활동 가서 밤에 토론하면 많이 싸웠지. 밤새. 남자들이 약간 겁내했어. 대(가) 센 여자니까! 여장부지. 난 여자지만 너보다 더 잘할 수 있다, 이런 게 항상 깔려있었으니까.” 김진태 보좌관의 말이다.

심 대표는 1980년 서울대 최초의 총여학생회와 여학생 학회 <디딤돌>을 만들었다. 여성의 주체의식 강화와 노동운동가 육성이 목적이었다. 이곳에서 후배를 규합해 구로공단 같은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김진태 보좌관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거쳐 간 최고의 투사”였다고 심 대표의 20대를 표현했다.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 싶어 1월 23일부터 황종섭 대표비서실 차장, 이석현 보좌관 등 정의당 관계자들에게 연락하거나 찾아갔다. 심 대표 스스로 자신의 20대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2월 15일, 이 보좌관이 심 대표의 말을 대신 전해왔다. “심상정의 20대는 한마디로 용광로다. 후회 없이 뜨거웠던 봄날의 시간.”

정의당 교육연수원의 강상구 부원장은 “확인해야 될 게 있으면 새벽 두 시, 세 시에도 전화해요. 제가 보기엔 거의 24시간 일만 생각하고 살 걸요. 이게 중요한 장점이자 단점이죠”라고 말했다. 그는 2월 16일 끝난 정의당 경선에서 심 대표의 경쟁자였다. 다른 이들의 생각도 마찬가지.

“휴식이라는 게 없었어요.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은 우리 사회에서 항상 소수였으니까, 해야 할 과제는 어마어마하게 산적해 있고…. 그러다 보니까 당시에도 일에 집중하면서 (결혼을) 고민할 때 선뜻 답이 잘 안 섰던 게 아닌가 싶어요.”(남편 이승배 씨)

“대표님이 말씀하시는 게, 엄청난 명분이나 투철한 이념으로 해온 게 아니라는 거예요. 본인은 너무 재밌게, 신나게 했다는 거죠. 그저 여공들이랑 같이 있는 게 좋았고, 그래서 계속 일을 했고. 그렇게 하나하나 바꿔나갈 때마다 굉장히 즐거웠대요.”(이석현 보좌관).

이러한 모습에 대해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도 평소 심 대표를 “진정성 있는 정치인”이라 말한다고 유 의원실의 허신열 보좌관이 기자에게 전했다.

서울역 귀성인사 이후, 심 대표를 두 번 봤다. 김진태 보좌관을 만난 2일과 이석현 보좌관을 만난 13일, 국회의원회관 516호 의원실에서였다. 심 대표는 형광펜이 잔뜩 칠해진 서류더미를 쳐다보다가 김진태 보좌관이 들어서자 바로 달려가 손을 꼭 잡았다. “곧 봐요”라는 한 마디에 선배를 향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