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 뛰어난 남자는 아니었지만, 사랑했다. 때문에 남자친구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싶었다. 심지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촬영하자는 부탁까지도 들어줬다. 그를 믿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와 5년을 만났다.
그를 여전히 사랑하긴 했지만, 더 이상 그와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생활력 없는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 같았다. 그래서 헤어졌다.
그 때부터 새로운 악몽이 시작됐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5년 동안 나와 만나며 모아둔 사진과 영상을 함께 편집해 인터넷에 유포했기 때문이다. ‘내가 없으면 죽는다’던 그는 내게 “너도 한 번 죽어봐라”고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디지털 기록 삭제 서비스 업체인 산타크루즈컴퍼니 김호진 대표로부터 전해들은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 A씨의 사연이다. 리벤지 포르노는 헤어진 연인 중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앙심을 품고 교제 당시 찍었던 노출 사진이나 성행위 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하는 음란물을 의미한다.

▲ 리벤지 포르노 삭제 작업을 하고 있는 김호진 산타크루즈컴퍼니 대표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는 한두 명에 그치는 소수가 아니었다. 산타크루즈컴퍼니 김호진 대표는 “한 달에 100여 건 정도 개인의 성행위 영상이나 노출 사진 삭제 의뢰가 들어오는데, 그 중 30건 정도가 리벤지 포르노”라며 “리벤지 포르노의 95% 이상이 가해자가 남성이고,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라고 했다. 피해자도 계속해서 증가 추세다. 김호진 대표는 “2013년부터 리벤지 포르노 삭제 의뢰가 들어왔고, 90여 건 정도였다”며 “이후 매년 삭제 의뢰 건수가 100여건 이상 씩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저기 퍼져있는 리벤지 포르노···심한 경우 피해자 자살까지

▲ P2P사이트(좌)와 유흥업소 홍보사이트에 게시된 리벤지 포르노로 의심되는 영상 목록

실제로 리벤지 포르노로 의심되는 영상은 인터넷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구글 검색 결과, 30여 개 P2P 사이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각종 유흥업소 홍보사이트 등을 둘러봤더니 리벤지 포르노로 의심되는 영상 수백 개를 찾을 수 있었다. 영상을 찾는데 어려움도 없었다. 리벤지 포르노를 연상시키는 단어 몇 개를 입력하자 몇 초 만에 화면 가득 영상들이 등장했다. 해당 영상엔 여성의 얼굴이 노출됐으며 여성의 이름, 학교나 직장 등이 적시돼 있었다. 심지어 헤어진 여자친구의 신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해 여자친구의 성형 전·후 사진을 영상 안에 편집해 넣은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피해자의 신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리벤지 포르노 성격 탓에 피해자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심한 경우엔 자살로까지 이어졌다. 김호진 대표는 “피해자의 얘기를 듣다보면 나도 고통스러워진다”며 “피해자가 대인기피증이나 우울증을 앓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자살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관련 통계 파악도 못하고 있는 경찰·방심위
상황이 이런데도 경찰은 리벤지 포르노 실태와 피해에 대해 제대로 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기자가 경찰청 사이버안전국 사이버수사과, 생활안전국 성폭력대책과, 수사국 형사과에 리벤지 포르노 실태에 관해 문의를 했지만, 어느 한 곳도 속 시원히 대답을 해주는 곳이 없었다. 사이버수사과 관계자는 “음란물 유통에 관한 수사를 담당하는 것은 맞지만, 리벤지 포르노와 관련해 따로 통계를 집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경찰이 관련 통계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리벤지 포르노 수사를 어느 한 부서가 담당하지 않고, 사안마다 사이버수사과·성폭력대책과·형사과·여성청소년과 등 각 과에서 개별적으로 사건을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개별적으로 처리하다보니 종합적인 통계 취합이 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형사과 관계자는 “경찰에 신고가 되면 경찰의 어느 부서에서건 수사는 한다”며 “다만 사안에 따라 수사를 하는 부서는 성폭력대책과일 수도 형사과일 수도 사이버수사과일 수도 있다”고 했다. 

리벤지 포르노 실태에 관해 제대로 된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도 마찬가지였다. 김삼화 국민의당 의원이 방심위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개인 성행위 영상 관련 신고 접수 및 처리현황’ 자료를 보면, 2012년부터 2016년 8월까지 방심위에 접수된 개인 성행위 영상 신고 건수는 1만8809건에 이른다. 하지만 이 통계엔 리벤지 포르노뿐만 아니라 각종 음란물이 포함돼있다. 방심위 권리침해대응팀 관계자는 “해당 통계는 본인이나 제 3자가 개인의 초상권이 침해된 것으로 보이는 영상을 신고한 건수”라며 “여기엔 개인의 셀카 등도 포함되며 헤어진 연인 간 리벤지 포르노만을 따로 집계하고 있진 않다”고 했다.


막대한 비용 내며 사설업체에 기대야 하는 피해자
방심위가 실태 파악만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신속성도 떨어진다. 현재 리벤지 포르노 영상의 피해자가 국가의 도움을 받아 해당 영상을 지우기 위해선 방심위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방심위에서는 해당 사안을 심의하는 데만 2~3주가 걸린다. 방심위 권리침해대응팀 관계자는 “합의제 심의 기구에서는 불법이다 아니다를 판단하는 심의기간이 기본적으로 들어간다”며 “이 기간은 사안마다 다르지만 최소 2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온라인 특성상 빠르게 영상을 삭제해야 피해자의 피해가 최소화되는데, 현재는 그렇지 못한 실정인 것이다.

때문에 절박한 심정의 피해자들은 한 달에 2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가는 사설 업체의 도움을 받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디지털 기록 삭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15개 정도로 산타크루즈컴퍼니와 맥신코리아가 가장 크다. 영상 삭제를 위한 평균 비용은 비슷했다. 산타크루즈컴퍼니 김호진 대표는 “피해자 대부분이 경찰이나 방심위에 도움을 요청해도 경찰과 방심위에선 영상을 삭제해주지 않기 때문에 사설업체를 찾는다”며 “인터넷 상에서 완전한 삭제를 위해선 보통 6개월 이상의 모니터링과 삭제 작업이 필요하지만, 비용 부담으로 한두 달 서비스를 받다 중단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법안 발의 움직임···그러나 피해자 보호는 여전히 갈 길 멀어
리벤지 포르노 피해를 막기 위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일명 리벤지 포르노 처벌법)’ 등 관련 법안이 지난해 9월 발의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심사를 받고 있다. 해당 법안은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죄’의 벌금형을 대폭 향상하는 등 가해자 처벌이 중점인 개정안이다. 

하지만 언제 법안이 통과 될지는 미지수다. 쟁점 법안이 아니란 이유로 법안 심사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법을 대표 발의한 진선미 더불어민주당(서울 강동갑) 의원실 관계자는 “음지에서 불법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리벤지 포르노를 효과적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개정안은 꼭 통과돼야 할 것”이라며 “방심위 절차를 보다 간소하게 해 신속성을 높이거나, 사설업체와 연계해 피해자에게 삭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의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안 발의도 논의 중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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