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의 촛불집회가 작년 10월 29일 이후 계속됐다. 주최 측 추산으로 지금까지 연인원 1500만 명 이상 모였는데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등장했다. 이런 ‘교복부대’는 미국산 쇠고기 수업을 반대하던 2008년의 촛불집회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나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취재팀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후 있었던 4차 촛불집회(지난해 11월 19일)부터 2017년 2월 말까지 거의 매주 광화문 광장을 찾았다. 10대 청소년들은 취재팀의 인터뷰에 적극 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기사에 표기된 청소년들의 소속과 나이는 작년 기준.
청소년들에게 ‘최순실 게이트’는?
광장에서 만난 30여 명의 학생들은 정경유착과 비리가 가득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무시된 대한민국에 실망감을 나타냈다. 광주 금호고 박건웅 군(18)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신문을 읽기가 두려웠다. 세월호 참사와 국정교과서 논란으로 이미 국가에 대한 실망감이 컸는데 최순실 게이트가 종지부를 찍었다”고 말했다.
윤인용 군(19)은 자신이 다니는 경기 성남 분당대진고의 교실에 학생들이 촛불집회에서 들었던 ‘박근혜 하야’라는 내용의 피켓이 쌓여 있다고 전했다. 친구들의 SNS에는 촛불집회 인증 사진이 계속 올라온다고 한다.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회의적이던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교사들의 영향이 미치기도 했다. 박건웅 군은 “역사 교사가 현 사태를 지속적으로 설명하고 촛불집회 영상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정유라 씨의 이화여대 입학비리는 치열한 입시경쟁 속에 있는 고등학교 3학년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했다. 서울 양재고 박정우 군(19)은 “우리가 광장으로 나간 이유는 불합리함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고 얘기했다. 매일 새벽까지 자율학습을 하면서 지내는데 정 씨가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는 뜻이다.
전남 순천여고 이한슬 양(19)은 “앞으로 이런 어이없는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청소년들의 관심이 필요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전남 순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뜨거운 역사의 현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촛불을 들고, 학생 신분이어도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이들은 교과서에서 배운 이상과는 다른 현실을 한탄했다. 경기 고양 신일비즈니스고 김진철 군(18)은 “네가 뭘 아느냐고 묻는 어른들에게 역사를 되새겨 보라고 말하고 싶다. 3·1운동, 4·19혁명, 6월 항쟁 등 역사의 주체는 학생들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들에게 촛불은 민주주의의 시작이자 희망이었다. 대전 용산고 이수연 양(19)은 “자유발언을 하러 연단 위에 올라섰을 때, 촛불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이로운 광경이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청소년들이 바라보는 대선 정국(政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학생들은 2017년 대선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다. 이들의 의견이 대선에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인터뷰에 응한 청소년 중에선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서울 용산고 이수연 양(19)은 “좋은 인성과 더불어 뚜렷한 정치적 이념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평가했다. 경북 영주의 선영여고 김려온 양(18)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서라도 여당 후보는 뽑기 싫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까지 우리 지역에서는 1번이 아닌 후보가 당선된 적이 없다. 이번 대선에서는 진정으로 민생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는 문재인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을 지지하는 청소년도 꽤 있었다. 그의 복지정책에서 좋은 인상을 받은 듯 했다. 성남 분당고 박지호 군(19)은 “이 시장은 국가에 빚지지 않고 성남시에서 청년배당이나 복지 정책을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대통령이 돼서도 좋은 정책을 많이 펼칠 것 같다”고 말했다. 이한슬 양(19)은 “이 시장이 다소 공격적이어서 우려되기도 하지만 다른 후보와 비교했을 때 가장 바람직한 대선 후보”라고 말했다.
취재팀이 청소년들과 인터뷰했던 시점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불출마 선언을 하기 전이었다. 그에 대해 물었을 때, 성남 분당대진고 윤인용 군(19)은 “소속 정당이 없고 한국에서의 정치경력도 없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다면 정치권에 혼란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명덕고 송영창 군(19)은 “어렸을 때는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다. 관련 프로그램과 위인전을 모두 읽어봤을 정도”라면서도 “UN 사무총장으로서의 행보는 기대에 못 미쳐 실망했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의견 표출 창구 ‘대한민국청소년의회’
촛불집회에는 대한민국청소년의회(이하 대청의)에 소속된 청소년이 다수 참여했다. 대청의는 2003년 출범해서 2010년 독립 법인화된 단체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국사회교과모임, 정의교육시민연합, 흥사단 교육운동본부가 함께 만들었다. 2010년엔 관련 단체들로부터 독립해 청소년들이 자체적으로 활동하는 중이다. 의장 1명, 부의장 2명, 서기, 수석대변인까지 5명의 의장단과 일반 청소년 의원 다수가 대청의의 구성원이다. 의장단이 주로 활동한다. 이들은 사회를 향해 청소년의 목소리를 내고, 이런 의견이 정책에 실질적으로 반영하도록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대청의는 촛불집회 당시 ‘하야’라는 단어의 뜻을 알리는 포스터를 만들어 캠페인을 벌였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사용하는 청소년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정치적 중립의 원칙에 따라 단체 차원에서 촛불집회에 특정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 개별적으로 알아서 참여토록 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촛불집회에 참여한 서울 명덕고 송영창 군(19)은 대청의 학생권익위원회에서 3년 동안 활동했다. 그는 “청소년이 왜 정치에 참여하느냐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며 “청소년이 주눅 들지 않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기성세대의 잘못을 고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대청의 8대 의장인 경기 토평고 한병현 군(18)도 3차 촛불집회에 처음 참여했다. 평소 국가에 대한 신뢰가 남달랐던 그에게 이번 최순실 게이트는 충격이었다. 한 군은 “현재의 정치상황은 의장인 내가 단체의 역할과 운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됐다. 이번 시위를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대청의 8대 부의장인 경기 청심국제고 윤서원 양(19)은 동년배의 친구들이 연단에서 자유 발언하는 영상을 보고 촛불집회 참여를 결심했다. 윤 양은 “시험기간인데도 마사고에 다니는 친구와 함께 집회에 나갔다. 시민의견이 광장에서 한꺼번에 표출되는 광경을 볼 수 있어서 인상 깊었다”고 했다.
전문가들 “일회성 이벤트로 그쳐선 안 돼···광장의 목소리 제도화 필요”
전문가들은 촛불집회에 교복부대의 참여가 활발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이명진 고려대 교수(사회학과)는 정치를 향한 청소년의 관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도 청소년의 참여가 활발했다. 십년 전 이야기지만 기사를 찾아보면 이들의 인터뷰 내용이 놀라울 만큼 똑같다.” 촛불집회가 일회성 이벤트처럼 끝나 변화를 이뤄내지 못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 교수는 민주주의 발전과 시민사회 문제 해결의 열쇠는 ‘지속성’이라고 강조했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과)는 광장의 이야기가 현실 정치에 직접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게이트는 최순실 딸의 입시 비리 문제로 청소년들의 관심을 고조시킨 측면이 있다. 학생들이 촛불집회에서 보여준 높은 열망이 정당, 의회, 정치에 그대로 반영돼야 하는데 지금까진 그러지 못했다.” 윤 교수는 청소년이 원했던 방향과 다르게 정치가 흘러갈 경우 정치를 폄하하고 포기하는 젊은 층이 많아질 거라고 내다봤다. 그럼에도 청소년이 더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