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코너는 후보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지금의 지도자를 만든 요인이 젊은 시절에 있지 않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취재팀은 1월 중순부터 자료를 찾았습니다. 자서전, 언론보도, 블로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용했지만 이런 내용만으로 기사를 쓰기가 곤란해 2월부터 직접 취재에 나섰습니다. 출마선언식, 토론회, 출판기념회…. 주변 인물도 만났습니다. 배우자, 학교친구, 회사동기, 투쟁동지, 보좌관, 정책자문단을 통해 후보의 면모를 더 파악했습니다. 유명 언론사의 정식기자가 아닌, 학생기자를 위해 많은 분이 시간을 내서 만나거나, 전화와 이메일로 취재에 응했습니다.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당의 후보선출이 막바지로 향하는 중입니다. 경선결과 못지않게 정치 지도자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주요 후보를 모두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정치인은 별명을 달고 산다. 이재명 경기 성남시장도 마찬가지다. 흙수저, 사이다, 아웃사이더. 광장에서 피켓을 들던 정치인이 몇 달 만에 대권주자로 올라섰다. 지지율 1%에서 어느덧,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후보가 됐다.

흙수저 이재명

이 시장을 2월 2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야외계단의 청년당 발기인 행사에서 만났다. 요즘 젊은이 사이에서 유행하는 2대 8 가르마의 파마 스타일,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 목 폴라와 캐쥬얼 정장.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어려울 것 같은데요. 지금 너무 사람들이 몰려와서….” 거절하는 와중에도 주변의 셀카 요청으로 말이 계속 끊겼다. 딱 한마디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20대를 표현해달라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절망에서 희망을 향해 도전하던 시기.”

▲ 이재명 시장과 기자가 찍은 사진

이 시장은 학교 대신 공장을 다녔다. 청년기는 말 그대로 절망 그 자체였다. 심정운 성동전력 지사장(55))은 이 시장의 불우했던 시절, 즉 유년기와 청년기를 함께 보내고 검정고시를 같이 준비했던 친구다. 심 지사장과 인터뷰를 하려고 사무실에 매일 세 번 이상 전화했다. 그럴 때마다 직원은 연락을 기다리라고 했다. 3일 뒤, 심 지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 밖에 인터뷰할 사람이 없는 건가요.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해서 2월 9일 저녁에 사무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심 지사장은 35년이 더 됐다며 이 시장과의 추억이 잘 기억에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는 “가난한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던 때였다. (이재명은) 당시 공장에서 맞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시장은 공장에서의 산재로 인해 왼쪽 팔이 굽어졌다.

그의 흙수저 경험은 정책에 반영됐다. 이재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책이 청년배당이다. 성남시에 사는 청년에게 일괄적으로 지급하는 수당. 작년 정치권의 화두였다. 이전엔 어디서도 본 적 없던 정책이었다. 그는 청년배당을 확대한 기본소득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모든 국민에게 연간 130만 원을 지급한다는 계획이다.

이 시장을 돕는 ‘흙수저 후원회’는 ‘열 흙수저 뭉치면 한 금수저 안 부럽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후원회 이름 그대로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등 흙수저의 참여가 눈길을 끈다. 후원액이 3일 만에 5억 원을 넘어 화제가 됐다. 2월 9일 후원회 출범식에서 이 시장은 흙수저, 서민을 유난히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열심히 일하는 국민들 나라입니다. 유명인, 기득권자, 힘센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힘은 없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서민들의 나라입니다. 우리 후원회도 다수의 약자인 국민을 대표하는 그런 분들로 꾸렸습니다.”

중국 베이징에 사는 옥지원 씨(27‧대학원생)는 3만 원을 후원했다. 기자와의 페이스북 인터뷰에서 옥 씨는 “이재명 시장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뭉클했고,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사춘기 때 장애를 겪고 자살시도도 했다는 부분에서 인간적인 면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이다 이재명

이 시장은 2월 16일 관훈클럽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자신감이 가득 찬 표정이었다. 언론인 패널과의 토론에 앞서 참모진이 썼다는 기조발제문을 치우고 즉석에서 연설했다. 어떠한 질문이 나와도 막히지 않았다. MBC의 오정환 취재센터장이 “TV조선을 폐간시키겠다” “박근혜를 끌어 잡아다가 박정희 유해 옆에다가 두자”는 촛불 집회에서의 발언을 문제 삼자 이 시장은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한다. 이것을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시원하게 느꼈다. 이재명 시장이라는 사람이 말하면 액면대로인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촛불광장해서 했던 발언은 SNS를 타고 퍼져나갔다. ‘박근혜 하야 촛불집회, 이재명 끝장연설’은 유튜브 조회 수 100만을 넘었다. 속 시원하다, 말 참 잘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 시장을 칭찬하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사이다라는 별명은 여기서 나왔다.

이 시장은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4살이었다. 사이다 기질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정기승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려 했다. 사법연수생들이 ‘사법부 독립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최원식 국민의당 의원은 초안을 이 시장이 썼다고 페이스북에서 소개했다.

“노태우정권이 수립된 후 보수적인 정기승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임명하려고 할 때 저와 이재명 시장 등 노동법연구회 회원들은 늦은 밤 사법연수원 부근 여관에 모여 이를 반대하는 사법연수생서명을 하기로 하고, 밤새 서명문안을 토론하였습니다. 그 때 서명문 초안을 이재명시장이 작성하였는데 워낙 잘 써서 저희들이 거의 수정하지 않고 서명에 사용하였습니다.” (2017년 2월 1일)

▲ 이재명 시장이 초안을 작성한 서명문 내용이 실린 88년 7월 2일자 한겨레 기사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사법연수생들이 법조계 문제와 관련해 성명서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다음날인 1988년 7월 2일 정기승 대법관 내정자의 국회 인준이 부결됐다.

아웃사이더 이재명

이 시장은 2016년 6월 18일 “반골 기질 가득한 비주류 아웃사이더가 머리가 되긴 어려우니 꼬리라도 잡아 몸통을 흔들어야지요”라는 글을 2016년 6월 18일 페이스북에 남겼다. 저서 이름 역시 <오직 민주주의, 꼬리를 잡아 몸통을 흔들다>이다.

아웃사이더는 주변인, 변방인, 바깥사람을 말한다. 실제로 그의 정치경력은 다른 대선주자의 길과 다르다. 청와대에서 일한 경험, 국회에서 일한 경험이 없다. 그의 이름이 정치권에 등장한 시점은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되면서부터다.

더불어민주당의 유승희 의원은 최근 이재명 캠프에 합류했다. 서울 성북구갑이 지역구인, 최고위원 출신의 3선 의원. 그는 3월 3일 의원실에서 기자를 만났을 때 아웃사이더가 정치권에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학생운동하고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은 당시에 다 아웃사이더였다. 이런 사람들이 제도정치권으로 들어와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만들지 않았느냐.”

아웃사이더 이미지는 서민들이 그에게서 참신함을 느끼는 요인이다. 익명을 요청한 20대 프리랜서 여성 허 모씨는 이 시장의 캠프 봉사단에 들어간 지 1주일이 됐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뿌리부터 잘못된 것을 바꿔야하는데 사실 만약 다른 후보 중에 대통령이 되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이영진 성남 문화진흥국장(55)은 대학시절의 이 시장을 아웃사이더로 기억했다. “나는 2학년 돼서 (학생운동을) 조직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내가 첫 번째로 데리고 오려던 친구가 이재명이었다. 똑똑했고 노동자 출신이고, 반골의 기질이 있어보였다. 느낌이 그랬다. 쭉 찢어진 눈에 그러고 있으니까.” 그러나 청년 이재명은 변호사가 되어서 뜻을 이루겠다며 다른 길을 택했다.

이 시장은 28살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성남시와 이천시를 중심으로 노동운동과 시국사건의 변호를 도맡으며 노동상담소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에서 활동했다. 이영진 국장은 사무장으로서 함께 일했던 당시를 기자에게 이렇게 전했다.

“변호사가 20, 30명밖에 안 되는 (지역)사회에서는 왕따가 되는 거다. 매번 법정에 가게 되면 변호사 대기실이 있다. (선배들을) 매일 본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선배님 선배님하면 좋은데…. 이재명 변호사가 법정에 나타나면 전경들 깔리고 그랬다. 형사사건은 못 맡았다. 왜냐면 이재명한테 가면 판사들한테 찍혀서 형량 더 나올까봐 무섭다고 했다.”

이 시장은 사법연수원 동기 몇몇과 공부모임을 하면서, 판검사가 아니라 지역으로 내려가서 변호사 활동을 하자고 결의했다고 자서전(이재명의 굽은 팔)에서 밝혔다. ‘변호사는 굶지 않는다’는 믿음을 준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이 여기에 한몫했다고 한다. 그와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최원식 국민의당 국회의원은 페이스북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저희들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서 서민과 노동자들을 도와주는 지역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저와 문병호 최고위원은 부평에, 이재명시장은 성남에, 정성호의원은 의정부에 변호사를 개업하였고 민변에도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세칭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2017년 2월 1일)
 
사법연수원을 나온 지역변호사는 지역살림을 책임지는 시장이 됐고, 이제 국가를 운영하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자신의 표현처럼 ‘반골기질 가득한 비주류 아웃사이더’의 도전이 어디까지 계속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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