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코너는 후보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지금의 지도자를 만든 요인이 젊은 시절에 있지 않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취재팀은 1월 중순부터 자료를 찾았습니다. 자서전, 언론보도, 블로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용했지만 이런 내용만으로 기사를 쓰기가 곤란해 2월부터 직접 취재에 나섰습니다. 출마선언식, 토론회, 출판기념회…. 주변 인물도 만났습니다. 배우자, 학교친구, 회사동기, 투쟁동지, 보좌관, 정책자문단을 통해 후보의 면모를 더 파악했습니다. 유명 언론사의 정식기자가 아닌, 학생기자를 위해 많은 분이 시간을 내서 만나거나, 전화와 이메일로 취재에 응했습니다.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당의 후보선출이 막바지로 향하는 중입니다. 경선결과 못지않게 정치 지도자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주요 후보를 모두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만나기 위해 2월 10일 인천으로 향했다. 남구 주안동의 영화관에서 ‘워킹 패런츠와 함께하는 보육·교육 간담회’가 열리는데 자문위원으로 참석한다고 했다.

손 전 대표는 행사시작 시간보다 15분 늦게 도착했다. 싱긋 웃은 채로 “늦어서 미안합니다”라고 연신 사과했다. 그는 듣기만 했다. 사회자가 발언기회를 줘도 참석자에게 질문을 할 뿐,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에야 정책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간담회가 끝나 이야기를 나누려고 다가가자 주최 측이 제지했다. 관계자는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대신 잘 아는 분과 이야기를 해 보라”며 측근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정계은퇴를 선언했을 때, 전남 강진에 같이 내려갔던 윤명국 보좌관(49)이었다.

이틀 뒤에 윤 보좌관과 전화로 얘기했다. 그는 “치열하게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 요즘 민주화 운동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 보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때 자기출세를 위해서 고시공부하고 그랬던 사람들이. 참 재미있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동지들에게 부정당한 학생운동 시절

손 전 대표는 스무 살부터 서른셋까지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전념했다. 그래서 20대 초반, 즉 서울대 문리대에서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인사들을 접촉했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손 전 대표에 대한 이야기를 거절했다는 점이다.

“손학규 선배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바뀌어서 별로 안 좋아한다. 옛날에는 같은 동지였는데 지금 이야기하면 비난이 될 수밖에 없다.” (서중석·68·성균관대 명예교수)
“아는 사이기는 하지만, 내가 칭찬을 해야 할 텐데…. 그냥, 언급하기가 그렇다.” (유인태‧68‧전 민주당 의원)
“전반적으로 정국 전체가 혼돈 상황이라서 개인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철‧68‧전 코레일 사장)

다른 취재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대부분은 손 전 대표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름을 밝힌 ‘동지들’이었다. 그의 20대 시절을 책이나 언론보도로 확인하기로 했다.

손 전 대표는 서울의 경기고를 다녔다. 북악산에 자주 가서 ‘세상을 짊어지겠다’고 자주 다짐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생과 어울리며 사회운동을 배웠고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본격적인 학생운동은 서울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들어가면서 시작했다. 경기중, 경기고, 서울대의 엘리트 코스를 거쳐서인지 모범생 이미지가 강하다. 이에 대해 손 전 대표가 자문위원으로 있는 ‘청년 365’의 조용술 대표(35)는 잘못된 인식이라고 말한다. “남들은 금수저라고 알지만 흙수저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행상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설명했다.

손 전 대표는 대학시절 수업을 거의 듣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 앞 ‘쌍과부집’에서 선배들과 토론을 하고 좌익서적을 읽어가며 의지를 키웠다. 한일회담, 한비 밀수사건, 학원자유화, 6·8 부정선거, 삼선개헌…. 그는 거의 모든 시위에 참여했다.

▲손 전 대표의 정학사실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66년 10월 24일 3면)

대학 2학년 때, 무기정학을 당한다.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은 22일 오후 학생징계위원회를 열고 지난 7일 삼성재벌밀수규탄선언문을 돌려 학원 내 질서를 문란케 했다고 동교정치과2년 손학규 군에게 무기정학”을 내렸다. (동아일보 1966년 10월 24일 3면)

그러던 중 학원자유화운동에 참여해 다시 무기정학을 받아서 학교에 갈 수 없게 됐다. 이 기회에 ‘민중과 함께하는 삶을 살자’는 마음으로 강원 함백의 탄광으로 떠났다. 막장 광부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의 어려움과 삶의 애환을 겪을 수 있었다고 손 전 대표는 회상한다.

무기정학이 해제돼 학교에 돌아가면서 동지들을 만났다. 법대의 조영래, 상대의 김근태, 문리대 손학규. ‘서울대 삼총사’였다. 조용술 대표는 “손 대표님이 거기에서 행동, 조직 쪽을 맡았고, 김근태 씨는 전략을 맡았고, 조영래 변호사는 연설문을 맡았다”고 말했다.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사회운동가

손 전 대표는 대학을 마치고 군에 다녀왔다. 동년배들은 취업이나 고시를 준비했고, 후배들은 학생운동에 매진했다. 손 전 대표는 박형규 목사의 권유로 빈민운동을 시작했다. 김성수 대한성공회 대주교(86)는 “그렇게 좋은 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빈민, 장애인 이런 데 관심을 안 갖는 줄 알았다. 하지만 손학규를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그는 늘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당시 그는 서울 청계천의 판자촌에서 생활했다. 김 주교에 따르면 “저렇게 훌륭한 사람이 왜 이렇게 늦게 왔을까”라는 이야기가 운동권에서 자주 나왔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형규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 빈민운동의 주축들이 ‘남산부활절연합예배 사건’으로 구속됐다. 손 전 대표도 같이 붙잡혀 1심에서 징역 1년을,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석방된 지 얼마 안 돼 다시 도망가야 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김관석, 박형규 목사가 1975년 ‘선교자금횡령 사건’으로 구속당하면서다. 손 전 대표는 KNCC의 총무였다. 윤명국 보좌관은 “수녀가 있는 수도원, 지인의 공장, 강원 원주의 농장 등 숨지 않았던 곳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도피생활은 2년간 계속됐다. 현상금은 200만 원까지 올라갔다. 서울의 집 한 채 값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붙잡히면서 수배생활이 끝났다. 무혐의로 풀려난 뒤에는 KNCC의 간사로 일했다.

손 전 대표는 1979년 부마항쟁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에 들렀다가 체포됐다. 보안대로 연행되어 48시간을 고문당했다. 그는 나흘 뒤에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알았다. 윤명국 보좌관은 “대표님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워낙 심해서 10.26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서울의 봄’을 멀리하고 손 전 대표는 유학길에 오른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다. 서강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김영삼 대통령의 러브콜을 받아 정계에 입문한다. 1993년 경기 광명의 보궐선거로 제14대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15대·16대·18대 국회의원,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를 역임했다.

▲손 전 대표가 2016년 10월 20, 국회의사당 기자회견실에서 정계복귀를 선언하는 모습 (출처: 손학규 홈페이지).


그 뒤의 이야기

손 전 대표는 자신의 20대 시절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했다. 2월 25일 ‘2017민주평화포럼 초청 토론회’가 열렸다. 사회자가 약력을 소개했다. 손 대표는 “중요한 내용이 빠졌다. 나는 20살 때부터 교회, 빈민, 노동운동을 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인물이다”라고 말했다.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사회운동에 전념했던 청년 시절의 긍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옛날의 동지들은 지금의 그를 부정했다. 좋은 말을 할 수 없다고 대부분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손 대표의 지도를 받아 학생운동을 했던 박우섭 인천 서구청장(61)은 기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손 선배가 국회의원 출마할 적에 (김영삼 전 대통령 계열의) 민주자유당에서 출마했다. 이철, 유인태 선배 같은 인사들은 DJ(김대중 전 대통령) 측이었다. 운동권 내부에서는 DJ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 비판적 지지층이 많았다. 그런 차이가 있어서 아마 서운함을 느낄 것이다.”

민주평화포럼 토론회에서도 “두 번의 탈당 때문에 양쪽 진영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손 전 대표는 단호하게 얘기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한결 같았다. 같은 소신으로 움직였다.… 나는 권력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한나라당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서는 소신을 버려야 했다. 그냥 남아있던 노동권 인사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나는 시베리아로 나간 거다.”

취재원들이 묻지 않아도 그에 대해 먼저 꺼낸 이야기가 있다. 인품과 일관성에 대한 내용이다.

“사람대접을 해주는 사람이다. 모시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볼 정도로 편하게 해준다.” (윤명국 보좌관)
“복지부 장관을 할 적에, 발달장애를 앓는 사람을 위한 근로 시설을 세우고 싶은데 도움을 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아, 그렇게 합시다’해서 ‘우리마을’을 설립했다. 말뿐인 사람이 많은데 높은 자리에서도 진정성을 잃지 않았다.” (김성수 대주교)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논리정연한 사람이었다. 빈민운동으로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늘 정이 넘치는 분이었다.” (박우섭 인천 서구청장)

손 대표는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시베리아에 간다는 표현을 썼다. 대통령이 되려면 몇 개의 산을 더 넘어야 한다. 1%가 안 되는 지지율을 극복하고 대권을 거머쥘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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