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코너는 후보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려는 시도입니다. 지금의 지도자를 만든 요인이 젊은 시절에 있지 않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취재팀은 1월 중순부터 자료를 찾았습니다. 자서전, 언론보도, 블로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용했지만 이런 내용만으로 기사를 쓰기가 곤란해 2월부터 직접 취재에 나섰습니다. 출마선언식, 토론회, 출판기념회…. 주변 인물도 만났습니다. 배우자, 학교친구, 회사동기, 투쟁동지, 보좌관, 정책자문단을 통해 후보의 면모를 더 파악했습니다. 유명 언론사의 정식기자가 아닌, 학생기자를 위해 많은 분이 시간을 내서 만나거나, 전화와 이메일로 취재에 응했습니다.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당의 후보선출이 막바지로 향하는 중입니다. 경선결과 못지않게 정치 지도자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주요 후보를 모두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기자는 2월 25일, 서울시청 앞의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태극기 집회와 촛불 집회에 참가한 청년들에게 안희정 충남지사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안 지사를 지지하거나 비판했다.

오후 7시, 광화문광장은 촛불의 행렬이었다. 지찬형 씨(28)는 “과거 경력은 상관없다. 지금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반미청년회 활동에 대해 김대왕 씨(32)는 “사람이 어릴 때랑 똑같을 수가 있나. 자라면서 달라진다. 당당하게 밝혔으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집회에 참가하려고 전북 진안에서 올라왔다는 김근영 군(19)은 “성실하고 바른 사람이지만 선의 발언은 유감이었다”고 아쉬워했다.

이에 앞서 오후 2시, 서울광장은 광장은 태극기의 물결이었다. 젊은 연령대가 가끔 보였다. 집회를 위해 부산에서 혼자 올라온 김승홍 씨(27)는 “주사파 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사상이) 아직 남아있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최영호 씨(32) 역시 비슷했다. “전향 의사를 확실히 밝혔으면 모르되, 지금은 (전향했다고) 믿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안 지사는 지지율이 20%를 넘어서며 유력후보가 됐다. 급부상하는 과정에서 과거 경력이나 발언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하다.  당시 그는 어떤 학생이었고, 어떤 활동을 했을까.


인간적인 소통
여택수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부소장(52)은 안 지사의 대학 2년 후배다. 지하 학생운동 조직 ‘G’에서 처음 만나 애국청년단과 반미청년회를 함께 했다. 중앙일보 박신홍 기자가 쓴 <안희정과 이광재>에는 안 지사가 여 부소장을 매우 아꼈다는 내용이 나온다. 둘은 1985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가두시위를 하다가 같이 끌려갔다. 안 지사는 여 부소장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고생했다 택수야!”라고 외치며 와락 껴안았다.

여 부소장을 만나려고 2월 3일, 서울지하철 2호선 합정역에 근처의 연구소로 향했다. 2번 출구로 나와 서교동 사거리에서 왼편으로 돌아 걷다보면 ‘Route9’이라는 카페가 나온다. 겉에서 간판이 보이지는 않지만 3층에 연구소가 있다. 기자가 도착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여 부소장이 바쁜 일정을 마치고 들어왔다. 미소를 지으면서 여 부소장은 1980년대의 대학 풍경과 20대 안희정에 대해 1시간 가까이 이야기했다.

여 부소장이 입학하기 전까지 안 지사는 무서운 선배였다. 1983년, 만 17세의 나이에 대학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들어간 지하서클에서 그는 누구보다 헌신했다. 2학년이 된 뒤에도 혁명을 향한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후배들이 자신처럼 혁명투사로 태어나도록 몰아세웠다. 안 지사의 저서 <담금질>에는 “왜 이 정도밖에 못해? 그 정도 희생도 못해?”라며 후배들을 다그치는 내용이 나온다. 방학이 지나자 후배들이 모습을 감췄다. 이때 안 지사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만 옳다는 생각, 완고함, 자만심을 버려야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지사는 3학년이 되자 85학번에게 친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같이 등산하고, MT 가고, 후배들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여 부소장은 자취방에서의 안 지사 모습을 들려줬다. “세미나 하고 나면 자기(안희정)가 계란 요리 해주고 했어요. 요리에 소질이 있고,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나도 파 썰기를 그때 안 지사한테 배웠어. (웃음)”

요즘의 안 지사는 어떨까. 기자는 2월 27일 충남 홍성의 충남도청을 찾아갔다. 안 지사와 매일 마주치는 입구의 직원들은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매일 반갑게 인사해준다. 바뀐 점이 있으면 늘 알아본다. 항상 똑같은 사람이다.”(이가영·33·지하 1층 근무) “뉴스로만 볼 때는 무척 어려워보였는데, 직접 만나니 인간미가 느껴졌다.”(김형주·32·지상 1층 근무) “안내데스크 직원이 모두 6명인데 사람이 바뀌면 다 안다. 도청에서 만나게 되는 어린이들에게 인사도 잘 해주는 모습이 삼촌 같다.” (정지혜·33·지상 1층 근무)

여 부소장의 표현을 빌리면 ‘피도 눈물도 없는 혁명가’에서 다정하고 인간미 넘치는 안 지사로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혁명가로서의 경력은 지금 안 지사의 발목을 잡고 있다.

▲동아일보 1988년 3월 21일 10면(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혁명가, 그리고 변화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는 1988년 3월 반미청년회 소속 대학생들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동아일보에 실린 구속자 명단에는 장원섭, 이철우, 양홍관과 함께 ‘안희정(23·고려대철학4 휴학)’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반미청년회는 어떤 단체였을까. 여 부소장은 여러 학교가 연합해 만든 비밀 학생운동조직이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사회를 ‘미국의 반(半)식민지’라고 봤다. 광주항쟁도 미국의 허락 없이는 발생하지 않았을 거란 얘기가 있었다. 결국 미국으로부터 자주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념을 담아 조직 이름을 ‘미국에 반대하는 청년들’이라는 뜻으로 반미청년회라고 지었다.”

청년들은 미국으로부터 자주권을 되찾고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고 사회주의 혁명을 택했다. 안 지사 역시 혁명을 꿈꿨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신이 믿었던 혁명의 가치가 구속 직후에는 무너졌다는 사실도 분명히 말했다. 저서 <안희정의 함께, 혁명>에는 경찰들이 “미국을 몰아내면, 그럼 미국의 세계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어떤 건데?”, “네가 말하는 민족자주경제를 건설한다는 게 대체 뭔데?”라고 물어도 안 지사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던 내용이 나온다.

“내가 갖고 있던 혁명의 이데올로기에는 구체적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자인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도, 미국과 잡았던 손을 끊고 자립경제로 간다는 것도 답이 될 수 없었다.” (안희정의 함께 혁명, 28쪽).

안 지사는 혁명을 포기했다. 제도권 정치에 몸을 잠시 담갔다가 출판사 영업부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만 28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나 지방자치실무연구소 활동을 시작했다. 혁명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와 지방자치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계기였다.

과거 활동에 대한 비판은 관훈클럽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빠지지 않았다. 2월 22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의 한국프레스센터 10층. 안 지사는 이날 반미청년회 활동에 관해 네 차례의 질문을 받았다.

처음에는 “지나친 이념 공격 아니냐. 충남의 재향군인회 등 보수 단체들이 제품 보증을 하고 있는 후보라고 말하고 싶다”고 여유 있게 답변했다. (이에 대해 이광표 대전·충남 재향군인회 안보부장은 “재향군인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 특정 정치인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다른 질문자가 전향이라는 식으로 명확하게 밝힐 수 없느냐”고 묻자 불쾌한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 “당시 풍미했던 사상을 섭렵했을 뿐이다. 책을 읽었다고 두드려 패는 게 인권유린 아닌가? 그 청년을 두둔해줘야지, 너 전향서 써야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갈고 닦은 연설능력
안 지사는 1월 22일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소극장에서였다. 그는 양복정장이 아니라 폴라티를 입고 5시간동안 즉석에서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정치철학과 국정운영 방향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안희정 지사의 대선출마 선언장 (출처: 안 지사 블로그)

그가 처음부터 연설을 잘했던 건 아니다. 여 부소장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안 지사가 ‘대형사고’를 쳤다고 했다. 학생운동권 지도부가 학생 5000여 명을 고려대 대운동장에 모아놓고 토론을 시작했다. “안 지사가 상황을 정리한다고 올라갔는데, 한 마디로 주눅이 들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뭔 말 인지도 모를 말을 하다가 결국 ‘청와대를 엎어버립시다! 우리 청와대로 진격합시다!’ 두 마디 외치고 내려왔어요. 아, 저 선배가 왜 저러지 싶었죠. (웃음)”

이 일화 때문에 여 부소장은 안 지사가 정치를 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고 말했다. 소규모 학생들 앞에서의 토론은 정말 잘하지만 대중연설은 지독하게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요즘의 안 지사는 연설을 잘하는 편이지만 모두가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충남도청 기자실에서 만난 A 기자는 안 지사가 말을 잘하지만 알맹이는 없다고 평가했다. “1시간을 대본도 없이 막힘없이 말할 줄 알지만, 다 듣고 나도 ‘야마(핵심을 뜻하는 기자 은어)’를 모르겠어요.” 다른 매체의 B 기자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철학자 같다는 표현을 썼다. “안 지사의 말은 경제문제 등 모든 게 민주주의로 귀결되지만, 민주주의만이 해결책이 될 순 없다.”

안 지사의 지난 시절과 요즘 모습을 찾다가 마지막으로 대전 중구의 남대전고에 갔다. 그는 이 학교 1학년 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당했고,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다. 미성할인마트 옆의 골목으로 들어가 걷다보면 언덕 위로, 교정이 나타난다. 시내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안 지사는 여기서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당시는 사회주의 혁명을 꿈꿨고, 이제는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 실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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