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와 마포구는 지난 대선 때 서울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55% 넘는 지지를 보낸 유이(唯二)한 곳이다. 관악구는 선거마다 강남3구(강남, 서초, 송파)와 대조적인 결과가 나와 ‘관악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기도 했다. 두 지역의 주민들은 현 정국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지도자를 원할까. 2월 둘째 주부터 셋째 주까지 기자가 관악구와 마포구를 다니며 각각 십여 명을 취재하고 게시에 동의한 이들의 목소리를 실었다.

“경기가 정말 안 좋고, 장사도 안 되고 사는 게 최악이라고들 해요.” 지난 15일 늦은 일곱 시, 서울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출구 앞에서 과일 노점상을 하는 김정희 씨(63)를 만났다. 근처 상인들과 이야기할 때면 한탄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나라 꼴’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외국인에게 보여주기에도 나라가 창피하다고 했다. 다음 리더의 조건을 묻는 질문에 “진짜 정직하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분이 대통령이 되어 주시라”고 했다.

같은 시각 옆 포장마차에서 취업준비생 송모 씨(29)가 어묵꼬치를 먹고 있었다. 한국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복지 확대와 빈부격차 해소’를 꼽은 그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기본소득’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분당 사는 친한 동생이 청년수당 받는 걸 보고 나도 성남에 살고 싶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복지를 이야기하면 무작정 포퓰리즘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월세 40만 원짜리 원룸에 사는 그는 “이번에도 취직이 안 되면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관악구는 서울에서 주거비가 적게 드는 축에 속해 빈곤층을 중심으로 1인 가구가 많다. 관악구의 청년과 노인은 절반 정도가 빈곤층으로 분류된다.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와 서울통계포털 ‘서울통계’에 따르면 관악구의 청년1인가구 주거빈곤율은 51.3%이고(서울평균 36.3%) 관악구 노인의 56.46%는 기초생활수급권자이거나 저소득 노인으로 분류된다(서울평균 25.49%).

▲언덕에서 내려다 본 서울 관악구 판자촌

그럼에도 관악구는 ‘용 나는 개천’의 상징이기도 하다. 로스쿨 도입(2009년)과 외무고시 폐지(2013년) 이후 고시촌에 사는 인구가 많이 줄었지만, 관악구 신림동에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감내하는 청년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16일 늦은 8시, 관악구의 구립 도서관에서 만난 김민지 씨(28)는 최근 중등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해 평소 좋아하던 책을 읽는 중이었다. 그는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 열한 시간씩 공부를 했다. 당시 하루는 고시식당에서 3500원짜리 식사를 하며 TV를 봤는데, 정유라 씨가 삼성의 지원을 받으며 유럽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화가 나서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누구는 매일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울고, 생활비 때문에 골머리 썩는데'하는 마음에 박탈감이 들어 수험기간에는 되도록 뉴스를 보지 않기로 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차기 정부에서 민주당을 지지하겠냐는 물음에 김 씨는 다소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작년 12월 더불어민주당 유은혜 의원이 발의한 ‘교육공무직법’이 통과될까 봐 다소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해당 법안은 학교 내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 내용을 담았지만 무기계약직 교사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법안이라고 소문이 났다. 임용고시 준비생 사이에서 강한 반대 여론이 일었다. 김 씨는 “아무래도 한정된 교육 예산 내에서는 정규직 교사채용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 씨 본인은 전라북도 익산 출신으로 전통적인 야당 지지층이라고 하면서도, “교육공무직법이 통과될까 봐 이번만큼은 민주당 지지를 유보하게 됐다” 고 했다.

지난 8일 저녁 서울대 도서관에서 만났던 최모 씨(29)는 정당보다 후보 개인의 역량을 중시했다. 국립외교원 입교시험을 준비한다는 그는 손학규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과 유승민 의원에게 관심이 있다고 했다. “다음 대통령은 적어도 자신이 생각해온 바를 말로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두 사람이 미디어에 나와서 한 말과 글을 살펴보니 상당히 깊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관악에서 인터뷰에 응해 준 청년들은 정치인과 정책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았다.

“맑고 투명한 사람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정책을 잘 추진해갈 수 있는 사람” 퇴근 후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집에 가던 중이라는 직장인 김모 씨(53)는 다음 대통령의 조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직장인으로서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의 ‘칼퇴근법’을 어떻게 평가하냐고 묻자 “정책을 보면 회사 한 번도 안 다녀본 사람이 만든 티가 난다”고 답했다. 보수정권 10년이 지났으니 이번에는 진보 후보가 당선되어야 할 것 같다면서도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문재인 후보조차 정책적으로 모호한 부분이 많아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현 정권에 대한 분노는 공통분모였다. 16일 밤 10시 들렀던 관악구 신림동의 바(bar)에선 양복 입은 직장인 10여 명이 퇴근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텐더 유현정 씨(27)는 손님들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할 기회가 많다.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손님들이 최순실 씨와 우병우 전 대통령 민정수석 이야기를 하며 화내는 모습을 봤다. 손님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뉴스에 관심을 둔다는 그는 “국회 청문회를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게 봤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기가 찬다”고 했다.

그렇다면 마포구의 민심은 어떨까. 17일 오후 2시쯤 지하철 2호선 이대역 근처의 미용실을 방문했다. 이발을 하는 동안 TV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미용실 주인 조모 씨(45)는 귀로 뉴스를 들으며 혀를 찼다. 탄핵심판이 지연되는 듯해서 답답하다고 했다. 그는 인터넷으로 뉴스를 많이 보고 가끔은 댓글을 단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베스트 댓글을 보면 항상 내 생각과 똑같다. 그런데도 민심을 어떻게 그렇게들 모를까.” 다음 대통령에 대해 묻자 “좀 젊은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 안희정 같은”이라고 했다.

마포구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젊음’이다. 서강대와 홍대 그리고 가까운 신촌에는 연세대와 이화여대가 있어 대학생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서울지하철 2호선의 홍대입구역, 합정역, 상수역 그리고 망원역은 ‘젊은 상권’으로 불린다. 상암동에는 방송국 단지가, 합정동에는 YG엔터테인먼트와 스타제국의 사옥을 비롯한 연예기획사가 들어섰다. 이렇게 형성된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마포구의 진보 성향으로 이어졌다. 17일 저녁 7시, 마포구 염리동에서 만난 직장인 김태희 씨(28)는 마포의 진보 성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마포에 젊은이들이 모여들다 보니 그들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활성화됐다. 집 앞에만 해도 마을공동체가 있는데, 매주 벼룩시장을 열고 지난 4월엔 세월호 참사 추모회를 하기도 했다. 출근할 때마다 건물 외벽 게시판이나 플랜카드에서 진보적인 메시지를 많이 본다”고 했다.

홍대입구로 자리를 옮겨 길에서 전진 씨(29)를 만날 수 있었다. 늦은 나이에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는 우리 사회가 <프로듀스 101>보다는 <언니들의 슬램덩크> 같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언니쓰(KBS 예능 프로그램 <언니들의 슬램덩크>에서 결성한 프로젝트 걸그룹)를 보면 못생긴 사람도, 음치도 현직 걸그룹 멤버들과 한 팀에서 협력하며 좋은 무대를 만들어낸다. 미디어도, 정치도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최순실을 욕하기보다 최순실을 낳은 괴물 같은 사회를 탓해야 한다는 말이 귀에 남았다.

그는 다음 5년의 시대정신을 ‘환대와 상생’이라고 표현했다. 모두가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고 반갑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대선주자 중에서는 청년 문제를 잘 실감하는 것 같아 심상정 후보에게 끌린다고 했다.

취재 중 만난 대다수의 주민들은 이번만큼은 사람과 정책을 보고 투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지난달 8일 관악구 신림동에서 만난 서모 씨(30)는 “우리 집이 야당 성향이었지만 부동산 임대업을 하기 때문에 지난 총선 때 사시존치를 주장하는 새누리당 후보를 뽑았다. 이번 대선도 후보의 정책을 보겠다”고 했다. 지난달 9일 마포구 서교동에서 만난 간호사 유모 씨(26)는 “지난번에 문재인 후보를 찍었다고 해서 이번에도 문 후보를 찍지는 않을 거다. 아직도 지지하는 후보가 없다”고 했다. 같은 날 홍대입구에서 만난 20대 대학생 임모 씨(25)도 “누구를 정해서 투표하기보다 국민에게 신뢰감을 주고 깨끗한 사람을 뽑고 싶다”고 차기 대통령의 자질에 관해 이야기했다. 다가올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한다면 색깔론이나 상대후보 비방 같은 이전의 방식과는 다른 접근이 요구되는 이유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