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운전 기사 수가 꾸준히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풍속도가 나타나고 있다. ‘콜(호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각종 도구가 등장하는가 하면, 대리 기사들을 주요 소비자층으로 삼는 교통수단까지 생겨나고 있다. ‘최후의 노동’인 대리운전이 최근 들어 증가하는 이면에는 중장년층의 자영업 붕괴와 청년층의 실업난이 자리한다.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떨어진 지난달 12일 밤 12시. 일산에서 만난 대리 기사 조영락 씨(46)는 한 시간 째 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보여 준 스마트폰 화면에는 근처의 다른 대리운전 기사들을 표시하는 빨간 점들이 마치 포도송이처럼 빽빽했다. 같은 날 강남에서 만난 대리 기사 김진수 씨(51)는 “좀 더 많은 콜을 받기 위해 핸드폰을 두세대 씩 가지고 다니는 기사도 많다”고 말했다.

▲어플로 본 12일 일산 라페스타 근처의 대리운전 기사 현황. 빨간 점이 대리 기사를 의미한다.

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동 킥보드도 등장했다. 지난달 16일 강남에서 만난 대리운전 기사 김진선 씨(30)는 킥보드를 타고 강남 교보문고 사거리를 뱅뱅 돌고 있었다. 김 씨는 “콜이 뜨면 다른 기사들보다 빨리 도착하기 위해 1년 전 100만 원을 들여 킥보드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전동킥보드 업체 측은 “최근 들어오는 주문의 20건 중 1건 정도는 대리운전 기사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리운전 기사가 주 고객층인 교통수단도 생겨났다. 밤늦게까지 다니는 광역 버스나 심야 버스는 대리운전 기사로 가득 찬 지 오래다. 이들은 아예 버스에 탑승한 채 거점을 따라 이동하며 콜을 잡기도 한다. 지난달 16일 새벽 강남에서 종로로 향하는 N37번 심야버스에는 35명의 승객 중 15명이 ‘콜 대기 중’이라는 문구가 쓰인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신논현역 1번 출구는 아예 대리운전 기사의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변했다. 승합차나 소형 버스가 임의로 노선을 정해 기사에게 3천 원 안팎을 받고 운행한다. 밤 12시가 넘어가면 이곳에 접한 횡단보도를 걷는 사람 중 십중팔구는 대리운전 기사다. 손님을 태우지 못한 채 경기도에서 서울로 복귀하는 택시는 5천 원 가량을 받고 대리 기사를 태우는 ‘택틀(택시셔틀)’로 변신하기도 한다.
 

▲김진선 씨가 100만원을 들여 산 킥보드. 호출을 잡기 위해 킥보드를 타고 강남 일대를 돌고 있다.

‘최후의 노동’으로 여겨지는 대리운전이 급증한 이면에는 자영업 붕괴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 이상국 본부장은 “대리운전 기사는 IMF 때 급증한 후 꾸준히 증가했지만, 최근 들어 자영업이 붕괴하며 특히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강남 지하차도에서 만난 박모 씨(58)는 “내 또래 기사들 중에는 한때 사장님 소리 들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자영업자 수는 2015년 들어 전년 대비 15만여 명 줄어들었다.

취업난은 30~50대가 주축을 이루던 대리운전 시장에 20대 청년들까지 불러냈다. 낮에는 출장 수리기사로 일한다는 김현수 씨(27)는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지 대리운전 기사로 활동하는 20대가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리운전 기사들의 모임인 네이버 카페 ‘새벽을 달리는 사람들’에 “20대 기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게시물을 올리자 밤새 6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2년 동안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대리운전을 하고 있다는 박모 씨(26)는 “최저시급밖에 못 받는 아르바이트로는 도저히 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대리운전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서울이동노동자쉼터 방승범 간사는 “대리운전 시장은 진입장벽이 낮아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는 구직자가 몰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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