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5. 린 : 토마스와 함께




 


 

 

  먹구름이 운동장을 서서히 집어삼킨다. 소나기라도 뿌릴 모양이다. 어느새 학교 곳곳에 노란 불이 들어와 부엉이 눈처럼 말똥거린다. 종이 울린 지 오래지만, 나는 별로 일어나고 싶지 않다. 이대로 계속 화단에 앉아 B1A4 노래나 듣고 싶은걸. 나도 알거든? 어차피 갈 거야. 마음이 더 약해지기 전에 일어서며, 운동화에 눌린 껌처럼 찍찍 들러붙는 미련을 떼듯 엉덩이를 턴다.
  나는 수업 중인 다른 반을 피해 창 그림자처럼 몰래 교실로 숨어든다. 담임에게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몰라도, 이번 시간은 자습이다. 침까지 흘리며 책상에 엎드려 자는 날라리, 폰으로 라디오를 듣는 농땡이, 두꺼운 안경 너머로 참고서만 들여다보는 범생이… 저러다가 정말로 책이 뚫어져도 아무도 안 놀랄 거야. 애들의 온기로 가득한 작은 교실에서, 덩그러니 버려진 곳이 딱 하나 있다. 내 자리다. 나만이 내 존재를 알아주는, 유령 같은 나. 하긴 차라리 이런 평화로움이 나은걸. 마음껏 책을 볼 수는 있거든. 이번에 다시 읽기로 마음먹은 책은 이사카 코타로의 단편집 『피쉬 스토리』다. 커다란 물고기의 눈동자에 콩알만 한 인간이 벌거벗고 매달린 표지 그림과 함께 내 마음을 강하게 잡아끈 건, 제목 밑에 세로로 적힌 한 문장이었다.
                                    


   
  동감이에요, 이사카 씨. 당신은 인생을 좀 아는군요! 진심 어린 사과를 외면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앙금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칠레, 아프가니스탄, 포르투갈, 파푸아뉴기니 등 세계 각국의 작가가 쓴 소설을 골고루 읽으면서도 일본 작가의 책에는 이상하게 손이 안 갔다. 여중생들이 자지러지게 좋아하는 사랑이나 연애에 관한 소설도 유명한 일본 작가가 쓴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읽고 나면, 어째 위장 한구석이 삐딱하게 쑤시는 불편함을 느꼈다. 주인공들의 자유로운 성생활에 대한 묘사는 나름대로 읽는 즐거움이 있지만, 글에 졸졸 흐르는 나른함이랄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람을 우울로 가득한 우물에 빠뜨려 놓고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느낌이라서, 싫었다. 손이 닿을락 말락 하게 대롱거리는, 희망이란 지푸라기를 잡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처럼 초라해지기까지 했다. 사랑이나 삶이 원래 그런 거란 씁쓸한 가르침은 현실에서 겪는 걸로도 이미 충분하거든?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이 지독한 절망을 되새김질하고 싶진 않은걸.
  그렇기에 『피쉬 스토리』를 만난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사은품 증정’이란 아이콘이 붙어 매력적으로 반짝거리는 데다가 구매자 평점이 워낙 좋아서, 마지막으로 속은 셈 치고 샀다가 대어를 낚은 셈이다. 이사카 씨의 글은 그동안 내가 본 다른 일본 소설과는 180도 다르다. 강물을 뛰어오르는 연어 떼처럼 살아 있고, 미꾸라지처럼 힘차게 꿈틀거린다. 조금은 엉뚱하지만 자기 생각이 분명한 주인공들이 서로 얽히며 빚어내는 퍼즐 같은 구성은,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칠 만큼 천재적이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처럼, 사소한 일 하나도 모두 다른 사건과 바둑판의 알처럼 이어지거든. 말이 안될 만큼 지나치게 갖다붙인다 싶을 때도 있지만, 인물들의 삶이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기막힌 부분에서 우리 할머니의 틀니처럼 우습게 맞부딪치게 만드는 능력은 거의 예술가 수준인걸! 하지만 내가 이사카 씨의 소설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나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저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 노력이, 거대한 현실 앞에선 너무나 소소해서 별 소용이 없다 하더라도.

  휙. 첫 단편인 「동물원의 엔진」을 한참 재미나게 읽는데, 책상으로 뭔가 날아온다. 꼼꼼하게 접힌 하얀 종이, 끔찍한 카톡 메시지를 피하려고 폰을 없앤 다음 날부터 이어지는 정체불명의 쪽지 테러다. 역시나, 오후라고 그냥 넘어갈 리 없는걸. 얼굴을 빳빳이 세우고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가 보냈노라고 눈길조차 마주치는 인간이 없다. 그래, 너희도 모르는 어디선가부터 종이가 돌았다고 치자.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지만, 등을 돌리고 앉은 아이들의 뒤통수에서 어디 안 펴 보기만 하라는, 솔개의 발톱 같은 눈초리가 나를 과녁으로 삼아 마구 발사되고 있으니 감히 그럴 수도 없다. 폴라로이드 사진 크기의 쪽지엔 누군가 빨간 펜으로 정성을 들여 쓴 수수께끼가 적혀 있다. 쪽지가 돌면서 그 아래에 ‘ㅋㅋㅋ’, ‘완전 궁금’, ‘실험해 보자’ 등의 댓글이 추가로 달렸다. 여기서 질문.
 


   글씨가 뿌옇게 멀어진다. 이럴 때는 이사카 씨도 나를 도와줄 수가 없는걸.
  “무거운 짐을 졌지만, 탭댄스를 추듯이. 삐에로가 공중그네를 타고 날아오를 때는 중력을 잊어버리는 거야.”
  그가 『중력 삐에로』에서 건넨, 나를 펑펑 울린 위로의 말이다. 그 책을 읽고 터지는 눈물을 막는 주문을 만들었는데, 꽤 효과가 있었다. 탭댄스, 공중그네, 탭댄스, 공중그네! 하지만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헛수고인 날이 있다. 오늘처럼 이런 순간에는 내 머릿속에서 발음조차 꼬이고 마는걸. 감은 두 눈,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금방이라도 나약한 울음이 흘러내릴까 두려워.
  나쁜 년들, 갈수록 악랄해진다! 내가 가만히 쪽지만 들여다보고 있자, 교실 여기저기서 비열한 웃음이 터진다. 키득키득. 탭댄스, 공중그네, 탭댄스, 공중그네… 나는 속으로 수십 번을 외우고 입을 앙다문다. 감정을 보이면 지는 거야! 내게 이 정도는 숨쉬기처럼 평범하고 가소로운 일이라는 표정을 지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쪽지를 교복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는다. 오늘 하루 동안 받은 13개의 다른 쪽지가 손등을 따갑게 찌른다. 너희에게 언젠가 갚을 빚을 미리 받았다고 치자. 두고 봐! 오늘만 해도 20번째 다짐하며, 한때는 친구였던 미수를 노려본다.
  “염병하네! 저 독한 년, 눈깔 좀 봐. 확 뽑아 버릴까 보다.”
  “저 년은 이 정도론 아무렇지도 않아. 완전 독종이야, 독종!”
  “내가 뭐랬어! 저거한텐 이것도 약하다니까?”
  익숙한 목소리들이 꽈배기처럼 비꼬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반의 실세이자 지금 미수의 친구, 까무잡잡한 피부의 현정과 아이들이다.
  그때 다행히 구세주처럼,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제발, 날 좀 그냥 내버려 둬. 무릎을 꿇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넘쳐흐르지만, 그런 내 모습을 또 비웃을 잔인한 년들이다. 그러니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아주 천천히 걸어서, 이 저주받은 장소를 피해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안전하진 않은걸. 교실을 나서자 뒤에서 애들이 따라붙는 느낌이 들고, 곧이어 누군가의 어색한 휘파람 소리에 맞춰 노래가 시작된다. 혀끝에 일부러 서투르게 힘을 주는지, 마른 땅처럼 갈라진 음빛깔이다.
  “토마스와 기린을, 믹~서에 처넣고, 빨간 버튼 누르면, 으아아아악!”

  안 봐도 다 보여. ‘으아악’에 맞춰 털털거리는 경운기라도 탄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몸을 뒤흔들걸? 저절로 주먹이 쥐어진다. 우뚝 멈춰 서서 뒤를 째려보려는 그때, 어느새 다가온 현정이 내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자기 옆에 있는 미수에게만 들릴 정도로.
  “미친년아, 힘 빼. 까불지 말고.”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다. 나는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순서고 뭐고 무시하고 빈칸으로 뛰어들어 문을 잠근다. 어차피 내가 어떻게 하든 꼬투리를 잡아 또 욕할 테니, 기린은 새치기까지 하는 치사한 년이라 쳐라! 다음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다들 자리에 앉는 어수선한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나와서 고양이세수를 한다. 주인을 잘못 만난 두 눈이 불쌍할 정도로 새빨갛다. 제발, 남은 시간만이라도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 이사카 코타로의 『피쉬 스토리』 표지를 찍은 사진과 문장 인용을 허락해 주신 웅진지식하우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이사카 코타로의 『중력 삐에로』 문장 인용을 허락해 주신 작가정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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